제53화 한국대 탐방 (2)
솔직히 신새벽은 예뻤지만 강우는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네? 평소와 같은데요?”
“대학생처럼 보이지 않아?”
“지나가던 대학생 다 죽었게요?”
“뭐야?”
잔뜩 인상을 구기고 째려보던 신새벽이 강우를 지나쳤다.
그 장면을 지켜본 윤수아와 최대우의 웃음보가 터졌다. 여전히 손차희는 잔뜩 찡그린 얼굴이다.
자신의 반 학생들을 점검하는 신새벽을 힐끔 보면서 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 담임은 왜 안 오지?”
“담임? 우리 강우가 말이 짧네.”
뒤에서 뾰족한 음성이 들렸다.
기겁한 강우는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서 차도도가 허리에 손을 걸치고 노려보고 있었다.
“그, 그게 아니라요.”
강우는 재빨리 손을 저으며 최대우 옆으로 숨었다. 최대우의 거구가 이럴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차도도는 청바지에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강의 들으러 가는 대학생 같아 보이는 패션이다.
“자, 모두 모였니?”
차도도를 고곽천재가 둘러쌌다. 오늘 차도도와 함께 한국대 물리교육과를 탐방하는 학생은 그들 뿐이었다. 전상철네 조는 수학 선생님을 따라 카이스트로 갔고 다른 조 또한 다른 학과로 움직였다.
차도도는 물리교육과 출신이라 엄연히 물리학과와 다르다. 그렇기에 훗날 물리를 희망하는 목표를 가진 학생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물리를 전공하려는 학생들 일부는 김윤택을 따라갔다.
김윤택도 한국대 물리교육과이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물리학과를 견학한다고 선포했었다. 덕분에 차도도가 맡은 학생은 고곽천재 넷뿐이었다.
당연히 강우는 이런 상황을 환영했다.
그는 손강우 시절에 한국대 물리학과를 다녔기에 호기심도 없었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 괜히 마도환과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고. 솔직히 다른 학생과 달리 그에게 대학 탐방은 놀러 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최대우는 천문학과를 가보고 싶다고 투덜댔고 윤수아는 컴퓨터공학과를 견학하고 싶었으나 말도 꺼내지 못했다.
손차희는 김윤택을 따라가지 못해 기분이 저조했다. 예전 같았으면 조원을 끌고 김윤택 팀에 합류하겠다고 주장했겠지만, 요즘은 저기압이라 나설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자, 번호 붙여보자. 강우부터!”
차도도의 발랄한 목소리에 강우가 바로 반박했다.
“척 보면 네 명인데 뭔 번호를 붙여요? 유치원 소풍도 아니고.”
“내 눈에는 너희들이나 유치원생이나 똑같아! 눈만 떼면 사고 치잖아!”
아니라고 반박하려다 차도도의 표정을 본 강우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조금 억울하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늘은 지하철로 이동한다! 가자!”
차도도가 앞장서고 강우를 비롯하여 나머지가 뒤를 따랐다.
“다른 팀 애들은 차 타고 가던데…….”
무심코 꺼낸 강우의 불평에 차도도가 눈을 흘겼다.
“모닝에 너희 넷 모두 들어가겠니?”
정원이 다섯이니 못 탈 일은 없지만…… 최대우를 보니 차마 탈 수 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차도도의 운전 실력으로 거기까지 가려면 목숨이 몇 개가 필요할지 몰랐다.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시야를 막는 한 무리가 들어왔다.
신새벽과 그 똘마니들이다.
“신 선생님, 학생들 많이 데려가시네요?”
“차 선생님도요. 말썽꾸러기도 데려가네요?”
“화학교육과 가시는 거죠?”
“물리교육과 가시죠?”
마치 이제 만난 것처럼 너스레를 떠는 두 사람 때문에 강우는 씩씩댔다. 말썽꾸러기가 누구인지 굳이 물어보려다 참았다.
* * *
마치 대학교를 처음 방문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학생들 사이에서 강우는 하품을 연발했다.
따지고 보면 그가 한국대를 다닌 게 몇 년인지, 한국대 학생식당에서 먹은 끼니 수가 몇 끼인지 셀 수가 없었다.
학부 4년부터 시작해서 대학원 석사, 박사 과정에 포닥으로 연구원까지. 한설대학교에 교수로 부임하기 전까지 손강우의 청춘을 모두 바쳤으니 10년을 훌쩍 넘는 기간이었다.
누구는 군대 1년 6개월에도 그쪽으로 오줌도 누지 않는다는데 강우도 다르지 않다. 한국대학교 정문을 보는 순간부터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옆의 다른 학생들은 소풍 나온 듯한 즐거운 표정이었지만 강우와 손차희, 둘만은 얼굴에 웃음기가 없었다.
강우는 멀리 보이는 건물을 보며 전의를 불태웠다.
저곳에 원수인 마도환이 근무하고 있다. 그나마 오늘 물리학과를 견학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자, 선생님들끼리 합의했는데 이왕 온 김에 두 곳을 모두 견학하는 것이 좋겠죠?”
“네!”
신새벽이 목소리를 높이자 학생들이 모두 찬성했다. 물리교육과와 화학교육과를 동시에 구경하자는 의견에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물론 강우는 시큰둥했다. 두 학과는 사범대에 있어 거리가 가까웠다. 일부 실험실은 자연과학대 쪽에 있긴 하지만 분위기로 봐서는 거기까지 구경할 것 같지 않아 다행이었다.
“재미도 없는데…….”
대학교 강의실이라고 해봐야 볼 것 없고 실험실도 특별한 실험 기자재가 있지 않은 다음에야 평범하다. 어떤 곳은 과학고 실험실보다 오히려 못하다. 그렇기에 실제로 무엇을 배운다기보다 학교를 구경했다는 점에 의의를 두었다.
물론 유명 교수의 강의를 들어볼 기회가 있으면 색다른 경험이겠지만 그런 일은 웬만해서는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무심코 중얼거리는 말이 차도도의 귀에 들렸나 보다.
차도도가 눈썹을 확 세우며 그를 노려봤다.
강우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고 손을 저었다.
학과 관계자에게 미리 이야기한 듯 안내자가 한 사람 따라붙었다. 강우네 조는 신새벽네 반 학생들과 함께 뒤엉켜 곳곳을 구경했다.
“이건 뭐예요?”
학생들이 마치 초등생처럼 열심히 질문했다.
내심 그것도 모르냐고 투덜거리던 강우는 조용히 뒤를 따라다녔다.
어쨌든 견학은 순식간에 끝났다. 넓은 캠퍼스에서 겨우 한두 건물 본 것뿐이지만 마치 전 학교를 둘러본 것처럼 학생들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피어났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됐다.
“밥은 학생식당에서 먹어요. 물론 돈은 각자 내고.”
차도도가 학생들을 인솔해서 식당으로 향했다.
대학교 구내식당에서 가장 경제적인 백반을 들고 고곽천재는 한곳에 모였다.
윤수아는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이 학교도 정말 밥이 맛있어. 난 한국대를 목표로 정했어. 이유는 밥 때문이야.”
“진짜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최대우가 맞장구를 쳤다.
이 둘은 먹는 것 앞에서 신기할 정도로 항상 의견 일치를 보였다.
정작 강우는 내심 투덜거렸다.
‘이게 맛있다고? 너네도 똑같은 백반 십 년 동안 먹어봐라. 맛있나.’
한국대학교 학생식당 밥은 가성비에서는 단연 돋보이지만, 맛에서는 절대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었다.
강우는 두 사람이 이상한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 증거는 신새벽이나 차도도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도 한국대의 물을 먹어본 두 선생님은 식판을 보며 인상을 확 찌푸리고 있다. 오직 한국대를 나온 사람들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다.
대충 밥을 먹은 후 오후의 일정을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물리학과를 구경하면 어떨까?”
그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손차희가 의견을 냈고 최대우가 반대했다.
“아냐, 천문학과를 가봐야지.”
과제연구로 천문을 선택한 최대우다운 의견이었다.
의견이 양쪽으로 갈리자 윤수아와 강우의 의견이 중요해졌다.
“난 차희를 배신할 수 없거든.”
윤수아가 손차희의 편을 들었다.
강우는 고민을 거듭했다. 물리학과만은 가고 싶지 않았다. 과거에 십 년 이상 다녔던 곳을 다른 사람의 몸으로 방문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했다. 물리학과에서 예전 은사님이나 실험실 후배를 만날지도 몰랐다. 적어도 지금 이 상태로 예전의 후배 녀석들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최대우의 손을 들어주자니 손차희가 신경 쓰였다. 손차희는 물리를 과제연구로 선택하지 않았던가. 오늘 김윤택네 반 학생들이 한국대 물리학과를 방문한다는 소문이 있었기에 고곽천재와 함께 움직인 손차희는 좋은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강우야, 넌 천문학과에 구경 갈 거지?”
최대우가 지원을 요청했다.
이래저래 손차희의 눈치를 보던 강우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동전 던져서 정하자. 숫자가 나오면 물리학과로 가고 반대면 천문학과로 가는 거야. 어때?”
재미있겠다며 모두가 찬성했다.
강우는 호주머니를 뒤져 100원짜리 동전을 꺼냈다. 그리고 공중으로 동전을 던져 탁자에 떨어지게 했다.
“어? 숫자네.”
“그럼 물리학과잖아?”
윤수아의 판정에 강우는 재빨리 손을 저었다.
“아냐, 삼세판이지.”
강우는 재빨리 동전을 주워 다시 던졌다.
이번에도 숫자가 나왔다.
“헉! 이럴 리 없는데? 이거 동전이 이상한 거야. 너희들 동전 있는 거 다 내놔봐.”
강우는 모두에게 십여 개의 동전을 받았다.
“잘 봐! 여러 개 던져야 확실하니까.”
손차희와 윤수아의 비웃음을 마다하고 강우는 탁자 위에 십여 개의 동전을 한꺼번에 던졌다.
그리고 결과가 나왔다.
“허억!”
탁자에 떨어진 동전은 모두 숫자가 위를 향하고 있었다.
* * *
강우는 울상을 하고 물리학과로 끌려갔다.
너무 익숙해서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는 곳이었으나 마치 처음 온 사람처럼 강우는 일행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차도도가 학과사무실에 들러 실험실 견학 허락을 얻어냈고 그들에게 대학원생 한 사람이 붙었다.
“고려 과학고에서 오셨다고요? 반갑습니다. 저는 핵입자 물리 연구실의 김상원입니다. 현재 마도환 교수님 밑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말끔하게 생긴 한 대학원생이 꾸벅 인사했다. 물론 녀석의 시선은 학생들이 아닌 유별나게 아름다운 차도도에게서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지만.
강우도 이 녀석을 잘 안다. 그가 이곳에서 박사후과정을 밟고 있을 때 김상원은 석사과정 대학원생이었다. 그때 녀석은 그를 형이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녔었다. 연구에서 녀석을 많이 부려 먹었었다. 그래서 다른 학생보다 친밀했던 후배였다.
오랜 인연을 만나 반가웠으나 한편으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상대를 알지만 상대는 그를 전혀 몰랐으니까.
“이곳은 나노 물리 연구실입니다. 이곳에서는…….”
대표적인 몇몇 연구실을 둘러보다가 마침내 마도환 교수의 핵입자 물리 연구실에 도착했다. 세부 전공이 같은 이 실험실 대학원생들은 강우에게도 대부분 낯이 익은 사람들이었다.
물리 연구실은 분위기가 비슷하다. 대부분 모니터를 노려보면서 고민에 잠겨 있다. 실험실 벽에는 입자 현상을 다룬 각종 사진이 걸려 있다.
김상원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이런저런 설명을 시작했다.
정작 강우는 당황한 눈치로 한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한쪽 구석 책상 위에 익숙한 피씨 본체가 놓여 있었다. 바로 한설대학교에서 손강우가 사용하던 그 피씨였다.
손강우의 유품과 연구자료를 마도환 교수가 처분했다고 하더니 그 일부가 이 실험실에 놓여 있었다.
지금 저 피씨에는 생전에 그가 연구했던 자료가 꽤 많이 담겨 있다. 그 자료는 마도환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필요했다. 앞으로 찾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 만나다니.
‘저 자료를 빼낼 수 있을까?’
설명을 마친 김상원에게 강우는 구석의 컴퓨터를 가리켰다.
“저 자리도 사용하나요?”
“아, 그건 아니고요. 저 피씨는 작고하신 유명한 선배님께서 쓰시던 것입니다. 내부 자료가 필요해서 여기에 두었어요. 자료에 암호가 걸려 있어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긴 하지만.”
“아, 네.”
역시 예상이 맞았다. 익숙한 피씨는 손강우의 것이었다.
그가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익숙한 인물이 성큼 들어왔다.
바로 그의 원수인 마도환 교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