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54화 (54/325)

제54화 한국대 탐방 (3)

강우가 이번 생을 다시 살면서 두 번째로 마도환 교수를 만난 날이었다. 그것도 마도환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한국대 물리학과에서.

마도환의 겉모습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그 인상까지.

실험실 내로 들어서던 마도환은 북적대는 학생들을 약간은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살폈다.

“흠, 고등학생 견학 프로그램 중이었나?”

“교수님! 오셨습니까?”

김상원을 비롯한 대학원생들이 허리를 구십 도로 꺾으며 인사했다. 대학원생과 교수의 갑을관계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찜찜한 눈으로 내부를 쓱 훑어보던 마도환의 시선이 일순간 차도도에게 고정됐다. 그 미모에 적잖게 놀란 듯 했다.

김상원이 재빨리 설명했다.

“이 학생들은 고려 과학고에서 왔습니다. 이분은 인솔 선생님이시고요.”

“교수님 안녕하세요.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차도도가 재빨리 머리를 숙였다.

“아, 그러시군요.”

금방 인상을 푼 마도환이 옆으로 비켜섰다.

그제야 강우는 마도환의 뒤에서 북적이는 여러 사람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김윤택 주임 선생님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이민찬을 비롯한 학생들이 있었다. 오늘 김윤택이 인솔하는 체험학습 학생들과 마주친 것이다.

“같은 학교 학생이니 상준이가 계속 인솔하면 되겠네. 이 학생들도 저 친구들과 같이 실험실 구경 좀 시켜주고.”

지시를 내린 마도환이 다시 차도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께선 제 연구실에서 커피 한잔하며 기다리시지요.”

거절할 상황이 아닌지라 차도도는 작게 인사하며 김윤택의 옆에 섰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본 강우는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딱히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마도환과 차도도가 같이 있는 모습에 속이 끓어올랐다.

“학생들! 그럼 다른 실험실도 보러 갑시다.”

김상원이 학생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강우네 조와 이민찬네 조가 동시에 우르르 빠져나갔다.

강우는 눈치를 보다가 손강우의 피씨가 놓인 책상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어? 넌 뭐야? 왜 안 따라갔어?”

석사과정으로 보이는 대학원생이 뒤늦게 강우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제가 다리를 삐끗해서요. 여기에 앉아서 기다리려고요.”

발목을 쓰다듬으며 대답하자 대학원생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고민하던 대학원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라, 어쩔 수 없지. 대신에 아무거나 만지면 안 돼.”

매섭게 눈을 뜨고 경고한 대학원생이 그에게서 관심을 끌 즈음 강우는 눈앞의 피씨를 조용히 살폈다.

그토록 원하던 연구자료가 담긴 피씨를 눈앞에 두고 한가하게 실험실 투어나 하고 있을 그가 아니었다. 예기치 않게 맞이한 기회를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다만 만지지 말라고 했으니……. 강우는 주위를 힐끔거리면서 눈치를 봤다.

어차피 대학원생의 생활 패턴은 뻔했다. 그 또한 십 년간 했던 일과이기도 했고. 조금 있으면 수업을 들으러 학생들이 일부 빠져나갈 테고 일부는 실험실로 돌아올 것이다. 문제는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에게 경고했던 석사과정 학생이 주섬주섬 일어나더니 책을 들고 사라졌다.

지금 당장은 그를 감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실내에 남은 몇 명의 대학원생은 책상에 앉아 책이나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연구에 매달리고 있었다.

강우는 눈앞에 놓인 피씨의 전원을 확인했다. 겉으로 보기로는 제대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마도 가져온 후 내부 자료를 확인하느라 연결했던 것으로 보였다.

스위치를 켜고 잠시 기다리자 모니터가 밝아지고 피씨가 부팅됐다. 익숙한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강우는 기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마우스를 클릭했다. 인터넷 연결까지 완벽했다.

다시 주변 눈치를 살폈다. 아직은 그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 없으니 핵심 폴더 몇 개만 옮길 생각이다.

클릭! 폴더가 열리고 예전에 그가 저장했던 자료들이 변함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져온 USB가 없어서 개인 클라우드로 옮겨야 했다. 파일 크기가 크지 않았기에 전송 속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클라우드 접속 후 곧바로 업로드 표시를 누르고 전송이 될 동안 추가로 폴더를 뒤졌다. 손강우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 너 뭐해?”

뒤에서 벼락처럼 호통이 들려왔다.

강우는 클라우드를 가리고 폴더를 열어둔 채 몸이 얼어붙었다. 이미 파일이 업로드되고 있는데 무슨 상관인가. 마음을 다진 강우는 뒤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대학원생 한 사람이 인상을 팍 쓰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인터넷 좀 사용하려고요.”

“어휴, 이 녀석이! 여기 장비들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돼.”

“그, 급하게 확인할 게 있어서…….”

대학원생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특히 그 피씨는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데.”

“저, 저도 중요한 거라…….”

강우는 우는 얼굴을 하며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혼신의 연기가 통한 걸까. 대학원생의 얼굴이 서서히 펴졌다.

“알았다. 금방 끝내야 해. 거기 있는 자료는 절대 지우거나 건드리면 안 된다.”

신신당부하는 대학원생을 향해 밝게 웃음을 지으며 감사를 표한 강우는 자신 있게 웹 브라우저를 열었다.

브라우저로 화면을 교묘하게 숨기면서 파일 전송을 계속했다.

다행히 목적을 달성했다.

강우는 재빨리 흔적을 지우고 피씨를 종료했다. 물리학과를 방문했다가 뜻하지 않은 수확을 얻었다.

문득 동전 던지기가 생각났다. 계속 숫자가 나온 것은 그에게 이 자료를 넘기려는 하늘의 뜻이 아니었을까. 그것도 모르고 동전 던지기 결과를 욕했으니.

목적을 달성했기에 굳이 여기에 계속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다른 학생들과 합류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 * *

지금쯤 학생들이 어느 실험실을 돌고 있을지 대충 감이 왔다. 그쪽으로 합류하기에는 왠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수십 번도 더 갔던 실험실을 구경할 생각을 하니 지겨움부터 몰려왔다.

그보다 차도도에게 신경이 쓰였다.

마도환과 만난 차도도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문득 마도환이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점이 생각났다. 삼십 대 중반이면 노총각일까? 한국대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면 노총각이라기보다 한창 주가가 높을 때였다.

이십 대 중반인 차도도 또한 흔히들 결혼 적령기라고 말하는 나이였고.

무려 십 년의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니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는 없지만 차도도가 워낙 예쁘니까 괜히 신경이 쓰였다.

한참 갈등하며 고민하던 강우의 발길이 저절로 마도환의 연구실로 향했다. 마도환의 연구실 정도야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었다.

교수 연구실이 쭉 늘어선 복도에서 강우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기다렸다. 문 앞에 마도환이라는 팻말이 선명하게 보였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마도환의 연구실 문도 굳건하게 닫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벌컥 열고 안에서 무엇을 하든 방해하고 싶었다.

“그래도 세 사람이니까.”

연구실 안에 김윤택이 함께 있다는 걸 떠올리니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하릴없이 복도를 서성이기를 십여 분쯤, 옆 연구실의 낯이 익은 교수가 강우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무심코 아는 척 인사하려다 강우는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마도환 연구실 문이 열리고 차도도와 김윤택이 밖으로 나왔다.

“다음에 시간 나시는 대로 강연 한번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지요. 얼마 전에 요셉 교수가 하셨으니 저는 주제를 조금 달리해서…… 가을쯤이면 될까요?”

“언제든 좋습니다. 한국대 교수님이시라면 학생들이 환영하니까요.”

김윤택과 용건을 마무리한 마도환이 차도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오늘 차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앞으로 필요하실 때 연락하세요. 차 선생님이라면 금방 달려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차도도가 허리를 굽히며 손을 잡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장면을 본 강우는 괜히 분노가 치밀었다.

신경질이 나서 벽을 발로 찬 강우가 돌아섰을 때 차도도와 눈이 마주쳤다.

“어? 강우야? 왜 혼자 여기에 있어?”

환하게 미소를 짓는 차도도를 보자 강우는 짜증이 팍 났다.

굳이 대답하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아하, 낙오됐구나?”

차도도와 달리 그를 노려보는 김윤택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학교 탐방을 왔으면 여러 곳을 돌아보면서 견문을 넓혀야지,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면 되나?”

질책이 담긴 김윤택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김윤택에게는 지난번 지도교사 문제로 이미 밉보였기에 새삼 잘 보일 이유가 없다. 그는 얼른 차도도 옆으로 피했다. 물론 지금은 차도도 역시 밉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다른 학생들은 지금 옆 건물에 있다더라. 그쪽으로 가자.”

차도도가 강우의 한쪽 팔을 잡으면서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 뒤에서 약간은 짜증이 난 표정으로 김윤택이 두 사람을 따라왔다.

* * *

손차희는 오늘따라 일회용 음료 컵을 손에 들고 빨대로 쭉쭉 빨아 먹는 이민찬이 신경 쓰였다.

이민찬의 저런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건만 오늘은 도무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시험이 끝난 후 이민찬과는 첫 만남이다. 이런 기분은 순전히 시험을 망친 탓이었다.

손차희는 자꾸만 피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학생들과 함께 실험실을 구경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한국대학교 물리학과 실험실이었는데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이민찬의 얼굴과 쭉쭉 대며 빨아먹는 음료 컵만 들어왔다.

마치 야단맞기 직전의 학생 같은 기분이다. 언제쯤 이민찬이 시험 결과로 그녀를 놀릴까. 차라리 빨리 두들겨 맞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실험실 몇 군데를 열심히 견학하던 이민찬이 지겨웠는지 점차 건성으로 딴짓하더니 손차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손차희는 저절로 몸이 움찔했다.

“너 이름 안 보이더라?”

역시 올 것이 왔다.

손차희는 대답 대신 상대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과연 녀석의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굴욕과 자괴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이민찬이 먼저 한탄했다.

“강우, 그 자식은 대체 누구냐? 그런 녀석한테 내가 밟히다니!”

“시골에서 올라온 학생 있어.”

손차희의 대답에 이민찬이 더욱 분개했다.

“나도 나지만 넌 더 쪽팔리겠다? 같은 반이잖아. 아, 이번에는 반에서 1, 2등도 아니지? 너희 반이…… 강우, 상철이 순이었나?”

반쯤 놀리는 말투에 손차희는 간신히 분노를 참았다. 이 자리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울면 지는 거였다. 이 녀석의 이런 놀림을 한두 번 경험하는 게 아니니까 버텨야지.

어쩌면 이민찬의 이런 태도 때문에 더 그를 이기고 싶은지도 모른다.

“난 그래도 너랑 나랑 경쟁할 줄 알았는데…… 어떡하냐?”

다시 음료를 쭉 빨고서 이민찬이 손차희에게 비웃음을 던졌다.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한 손차희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앞으로 난 빼고 강우랑 경쟁해.”

한마디 쏘아붙이고 그녀는 걸음을 빨리해서 이민찬을 벗어났다. 뒤에서 이민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희! 그깟 일로 기죽었냐?”

그녀는 못 들은 척하며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민찬이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저런 말을 할 리가 없다. 저 녀석은 지금 그녀를 놀리고 있을 뿐이다. 반박할 수 없으니 무시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속이 곯았다.

다행히 그녀의 앞쪽 멀리 차도도가 보였다. 구원자를 만난 기분이었다.

후다닥 뛰어가 보니 차도도의 옆에 강우가 버티고 서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다시 가슴이 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강우야말로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차희야, 실험실 투어 끝났어?”

“끝나긴 뭐가 끝나?”

손차희가 강우의 말에 버럭 소리치자 차도도는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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