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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55화 (55/325)

제55화 한국대 탐방 (4)

온종일 한국대를 돌아다니다가 저녁 늦게야 학교로 돌아온 고곽천재는 기숙사로 직행했다.

저녁도 먹었겠다 남은 건 침대에 누워 자거나 뒹굴 일뿐이었다.

“학교가 너무 커도 문제네.”

“자연과학대만 해도 우리보다 훨씬 커.”

“학교 안에 시내버스가 돌아다니더라.”

기숙사로 돌아가면서도 학생들은 오늘 방문한 한국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한국대를 처음 간 사람은 최대우뿐이었으나 제대로 실험실이나 강의실을 돌아본 것은 다른 학생들도 처음인지라 감회가 남달랐다.

각자의 방으로 흩어지기 직전에 강우는 손차희를 붙잡았다.

“차희야, 나 좀 볼래?”

머뭇거리는 손차희를 잡아 놓고 눈을 동그랗게 뜬 윤수아와 최대우를 향해 강우는 손을 저었다.

“할 말이 좀 있어서.”

금방 이해한다는 듯이 표정을 바꾼 두 사람이 쑥 들어가 버리는 통에 손차희는 선택권을 잃었다.

“편의점?”

“아니, 조금 걸을래.”

오늘 워낙 많이 걸었으니 걷겠다는 의사보다는 바깥바람을 쐬고 싶다는 뜻이다.

강우는 손차희의 의견을 존중해서 천천히 교정을 걸었다.

교정에는 어둠이 내려앉았고 학생들은 띄엄띄엄 보였다. 오늘 같은 날에도 자습하는 학생이 있는지 자습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고곽천재가 항상 이용하는 세미나실은 불이 꺼져 있다. 체험학습일이라 세미나실을 이용하는 사람이 없나 보다.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까. 지난 중간고사 때부터 손차희의 동요가 눈에 보였다. 내버려 두어도 언젠가는 스스로 극복하겠지만 시간이 걸릴수록 본인에게도 고곽천재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오늘처럼 활동적으로 움직이는 날에도 손차희의 기분과 태도가 엉망이니 아직은 극복이 요원한 듯하여 강우는 직접 나서기로 했다. 다만 심리적으로 섬세하지 못한 그이기에, 특히 여자 앞에서는 더더욱 그러하기에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오늘 한국대 본 소감이 어땠어?”

“학교는 넓고 좋더라. 나는 가기 어렵겠지만.”

바로 부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예전이라면 한국대에 꼭 입학하겠다는 결심이 나왔을 텐데.

강우는 상대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고 일단 본인의 이야기부터 꺼냈다.

“나도 한국대에는 입학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

뜻밖의 말이었을까. 손차희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

“왜?”

“오늘 그곳에서 만났던 교수님들, 특히 마도환 교수 같은 사람 밑에서 공부하라면 난 못할 것 같아. 실험실 분위기도 그렇고.”

“무슨 말이야?”

“난 자유롭게 배우고 연구하는 분위기가 좋은데 한국대는 너무 틀에 박혀 있거든.”

국내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는 이런 분위기가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하다. 그건 딱히 마도환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물끄러미 눈치를 보던 손차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강우가 학교에서 보여준 자유로운 모습이 틀에 박힌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해한 표정이다.

“그리고 이번 중간고사 때 학교 수업에 맞춰 열심히 공부해봤는데…… 역시 나한테는 안 맞더라.”

이것 역시 진심이었다. 그가 일반 학생과 같은 입장이라면 열심히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솔직히 지금의 그는 고교 과정의 지식이 불필요했다. 단지 강우로 새 삶을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하려 해보았지만, 이미 사회 경험마저 풍부한 그가 굳이 전공하지도 않을 인문학이나 사회학을 깊이 파고들 이유가 없었다.

지금 그는 빨리 핵융합 연구로 복귀하고 싶었다. 오늘 마침 과거 자료도 확보한 참이라 그런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

“그래서?”

자칫 오해할 수도 있는 말에 손차희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난 시험 성적이 그 사람의 실력이라고 보진 않아. 좀 과한 비유이긴 하지만 노벨 물리학자가 국어를 얼마나 알겠어?”

“그 사람은 한국 사람이 아니니까 당연하지.”

“그런 뜻이 아니잖아? 하여튼 모든 과목에서 점수를 잘 받으려는 공부보다 자신의 기본 지식과 기반을 넓히는 공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입시에선…….”

“학교를 한국대로 한정하니까 그렇지.”

말문이 막힌 손차희는 반박하지 않았다.

강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결론을 말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내신 성적을 신경 쓰지 않을 거야.”

평소라면 손차희는 경쟁자 한 명을 제쳤다며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강우의 뜻을 이해하려고 고민했다. 그녀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선언이었으니까.

“난 한 분야에 관심이 있으면 그 분야를 깊게 파고드는 편이거든. 내신 신경 쓰니까 그게 안 되더라. 그리고 점수를 잘 받는다고 기초가 튼튼한 것도 아니고. 앞으로 수학이나 물리는 열심히 하겠지만 다른 과목은 대충 할 거야. 내가 보기에 너도…….”

“나?”

“점수에 너무 연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점수야 잘 나오기도 하고 못 나오기도 하는 거니까. 그 사람의 실제 실력은 그렇지 않은데 점수만 다르게 표현한 거잖아? 물론 그게 반비례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점수 때문에 자격지심을 가질 필요는 없어.”

손차희는 그제야 강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에둘러 그녀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도 강우의 진심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이번 시험은 심리적으로 유달리 흔들렸을 뿐이다. 그녀의 실력이 부족해서 나쁜 점수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한 것도, 강우를 보며 흔들렸던 것도 모두 그녀 자신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우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자부심을 느껴. 누가 뭐래도 넌 차석으로 입학했고 우리 반 1등이니까. 시험 한 번으로 그게 바뀌지 않아.”

“아, 아니…… 그게…….”

“난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야. 이번에는 시험 범위도 좁았고. 그게 아니었다면 난 어림 없었지. 전체적인 실력을 보면 나보다 네가 더 나으니까.”

강우의 격려에 손차희는 한결 편안해졌다.

“대학은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따라오는 거야. 대입이 유일한 목적이라면 공부가 너무 삭막해지지. 우리의 목적은 더 많이 아는 것뿐이야.”

“목적을 재정립하면 공부가 즐거워질 수도 있겠네.”

“그렇지. 내가 볼 때 넌 정말 열심히 하더라. 다음에는 그 노력을 확실하게 보상받을 거야.”

“노력이라…….”

손차희는 연신 그 말을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걷다 보니 어느새 학교 끝까지 왔다. 담이 막혔으니 다시 돌아가야 했다.

강우는 방향을 틀었다. 그의 앞으로 가로등이 쭉 늘어선 교정이 보였다. 밤의 학교 풍경은 아름다웠다.

손차희의 경계심이 한결 누그러지고 안색이 편해진 걸 보니 효과가 없진 않았다. 남은 것은 그녀의 몫이다.

* * *

새롭게 선택한 과제연구 주제는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최대우는 달 관측에 관련된 모든 실험을 책임졌고 윤수아는 관측 결과를 이용한 컴퓨터 계산과 3차원 이미지 구현에 몰두했다. 강우는 이 과정에 필요한 모든 이론적인 수식을 담당했다.

중간고사 직후라 조금 여유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많은 시간을 교과 외로 사용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다행히 윤수아와 최대우는 주어진 환경을 고려해서 적절히 시간을 배분했다. 물론 강우는 학교 공부에 미련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상관없었다.

오늘은 월면 관측이 예정된 날이었기에 저녁을 먹은 세 사람은 천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늘이 좀 이상하지 않아?”

윤수아가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에는 군데군데 구름이 흘러가고 남쪽에는 반달 모양의 달이 구름에 가렸다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달이 구름에 가리면 관측이 어려울 수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구름이 군데군데 떠 있어 가끔은 구름 사이로 달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아! 조금만 하늘이 개어 주면 좋을 텐데.”

최대우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고 강우는 하늘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은 관측하지 말고 놀라는 하늘의 뜻이다.”

“그럼 내일 또 해야 하잖아?”

“내일도 놀라는 신의 계시지.”

강우의 대답에 두 사람의 한숨이 늘었다. 내일마저 구름이 끼면 그들은 한 달 뒤를 기약해야 했다. 이 과제연구는 기말고사 직후에 제출해야 하기에 자칫 완성조차 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강우를 믿었다. 지난 과제연구에서 보여준 강우의 놀라운 활약을 기억했다.

세 사람이 천문대로 올라갔을 때 담당 선생님인 김선호 외에도 여러 학생들이 있었다.

마침 그중에 권유성이 있어 윤수아가 반갑게 인사했다.

강우는 권유성이 김선호와 심각하게 토론하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들이 왔음에도 여전히 토론이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올해 사이언스 페스타에 출전할 팀은 너희밖에 없다. 너희 주제라면 충분히 상을 노릴 수 있을 거다.”

“출전하려면 내용을 조금 보강해야 하잖아요?”

“그렇지. 태양을 찍은 결과 사진 하나만으로는 관람객에게 어필하기 힘들어. 그 과정을 기록해 두었으니까 잘 활용해서…….”

옆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강우는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사이언스 페스타는 교육부와 과학기술통신부가 공동 후원하는 청소년 과학 행사였다. 코엑스나 킨텍스 같은 대형 전시장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행사를 개최했다. 과학 강연과 첨단 과학기술 전시와 고등학교 과학 동아리의 발표회를 겸했다.

지금 논의하는 내용은 과학동아리 발표회에 참여할 콘텐츠였다. 권유성 조가 일 년간 준비한 과제연구로 페스타에 출전한다. 이 발표회는 과학고를 비롯한 전국 고등학교에서 참가하기에 학교의 명예를 건 대항전이기도 했다.

고려 과학고에서도 과학 네 분야에서 각각 한 작품 이상을 발표해왔었다. 올해 지구과학 분야에서는 권유성 조가 출품한다는 뜻이다.

“저희가 출전해서 다른 과학고 작품을 모두 눌러버리죠.”

권유성이 자신 있게 목소리를 높였다.

논의가 끝난 후 권유성이 강우를 돌아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봤지? 우리는 학교를 대표해서 페스타에 출전한다. 벌써 격차가 확 벌어지는데 어떡하냐?”

내기를 떠올린 강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학교 내부의 채점만 고민했더니 정작 다른 곳에서 판정이 날 판이었다. 교내에서 아무리 평가를 잘 받아도 권유성이 페스타에서 상을 타오면 물거품이 된다.

“캬캬! 게임은 끝났어, 그렇지? 자! 강우야, 형님이라 불러라.”

권유성이 빤질거리며 강우를 놀렸다.

‘어휴, 어린 자식.’

강우도 사이언스 페스타에 대해서는 잘 알았다. 예전에 한국대 대학원 시절에 도우미로 참가했던 적도 있었고 강연자로 나서기도 했었으니까. 고등학교 동아리가 어떤 식으로 참가하는지도 잘 알았다.

열심히 놀리던 권유성이 사라지자 김선호가 강우 팀을 불렀다.

“너희는 웬일이냐?”

“하아, 오늘 코페르니쿠스 크레이터 찍는 날인데요.”

최대우가 열심히 설명했다.

“아, 그렇지? 아쉽게도 오늘은 하늘에 구름이 많아.”

“그래도 해야죠. 오늘 아니면 내일은 꼭 해야 하니까요.”

“그래, 그럼 준비하렴.”

최대우와 윤수아가 천체망원경을 준비하는 동안 강우는 김선호에게 물었다.

“선생님, 사이언스 페스타 말인데요.”

“그래, 그거 왜?”

“저희 팀도 출전 가능할까요?”

“학교별로 숫자 제한이 있지는 않아서 가능은 하다만…… 예상외로 손이 많이 들어가. 그래서 학생들은 보통 싫어하지.”

김선호의 답변은 예상과 달랐다.

어쨌든 지금 강우에겐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권유성 팀이 나가면 그들 팀도 출전해야 했다. 아니 나가서 더 좋은 성적을 받아와야 내기에서 승리할 수 있다.

“저희도 나갔으면 해서요.”

김선호의 미심쩍은 눈빛이 강우에게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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