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월면 과제연구 (3)
어둠에 잠긴 천문대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평소에도 밤에 관측했으니 새벽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었다.
천문대의 간이등을 켜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은 밤하늘에 달이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반달이 되기 직전의 달의 모습. 검은 배경 하늘에 하얀빛의 달이 선명했다. 마치 달이 눈에 들어와서 박히는 기분이다.
“아! 하늘이 참 좋다!”
윤수아가 가슴을 쫙 펴고 감탄사를 터트렸다.
강우는 기숙사 쪽을 바라봤다. 문득 이곳에 없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차희는?”
“꿈나라.”
같이 와도 재미있었을 텐데. 새벽에 나오라고 하는 건 조금 무리였을까?
“얼른 시작하자, 응?”
최대우가 그들을 재촉했다.
돔이 열려 달을 향해 돌아가고 천체망원경과 제어 장비에 전원이 들어왔다.
“지난번에 찍은 사진을 합성해서 영상을 만들어봤는데…… 1분마다 한 장씩 찍으니까 딱 좋았어. 오늘도 1분마다 찍으면 될 것 같아.”
며칠 사이 윤수아는 영상작업을 완료했다. 부지런하기도 하지.
최대우가 그에 맞춰 관측을 세팅했다. 천체망원경에 달을 잡고 CCD 카메라를 장착하기 직전 그들은 눈으로 먼저 달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강우는 천체망원경을 들여다봤다.
어둡고 밝은 경계면에 오늘 그들이 노리고 있는 코페르니쿠스 크레이터가 선명하게 보였다. 지금 달의 저곳은 해가 지는 석양 무렵일 것이다. 시시각각 해의 고도가 낮아지고 마침내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면 달에는 긴 밤이 찾아온다.
달의 밤은 길어 보름이나 된다. 어둠의 세상이 지나고 나면 다시 해가 떠오르고 보름 동안 환한 낮이 지속된다. 지구 환경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정말 특이한 세계다.
달의 크레이터와 산과 계곡이 손에 잡힐 듯 눈에 들어왔다.
“저게 사진이 아니고…… 실물이란 말이지…….”
천체망원경을 들여다볼 때마다 저 달이 정말 저곳에 존재하는 대상이란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곤 한다. 수십억 년 동안 저곳에서 변함없이 빛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그 존재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오늘 찍을 크레이터와 산을 선명하게 기억한 다음 천체망원경에서 눈을 뗐다.
“강우야, 이것 봐.”
윤수아가 자신의 노트북을 그에게 돌렸다.
화면에 방금 본 코페르니쿠스 크레이터가 떠 있었다. 그리고 그 크레이터에 지는 음영이 서서히 변했다. 찍은 사진을 연결하여 달 표면 영상을 만들었다. 어둠에 잠겨 밝은 점처럼 보이던 지점이 점차 뚜렷한 형체를 드러내고 마지막에는 우뚝 선 산의 위용이 화면을 채웠다.
“아! 멋지네!”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오늘 목표는 반대로 달에서 해가 질 때 크레이터의 변화 모습이야. 지금부터 빨리 찍어야 해.”
최대우가 CCD 카메라를 연결하는 동안 강우는 영상을 재생했다.
“언제 완성했어?”
“어제. 며칠 이거 하느라 시간 다 보냈어.”
“공부에 지장 많았겠는데.”
“어차피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는데 뭘. 난 이런 작업이 훨씬 재밌더라.”
윤수아는 정말 부지런하다. 아마 강우 자신이 이 작업을 맡았다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텐데. 그 와중에 고도 계산 프로그램을 완성했고 이를 3D로 구현하는 작업도 시작했다. 컴퓨터 작업에 관해서는 못하는 게 없는 팔방미인이었다. 물론 얼굴도 그만큼 귀엽지만.
완성한 영상을 보니 이번 사이언스 페스타에서 대중의 관심을 끌 게 분명했다. 고려 과학고의 명성을 빛내려면 아직 더 분발해야 한다.
관측을 시작했다.
지금 가장 바쁜 사람은 최대우였다. 최소한 1분마다 한 번씩은 CCD를 점검해야 하니까. 이제는 그들과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윤수아도 남는 자투리 시간에 월면 구현 프로그램을 계속 수정했다.
당장 할 일이 없어진 사람은 강우뿐이었다.
강우는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과제연구의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지금 이 활동이 윤수아나 최대우의 대학 입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시간 낭비가 될지도 모른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때로는 공부 시간도 빼앗기니까.
하지만 지금 시기에 이런 경험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기도 하다. 과거에 연구에 전념해본 사람으로서 강우는 이 활동이 두 사람에게 큰 자신감을 제공하고 훗날 그들이 매진할 연구의 기본 토양을 쌓아줄 거라고 믿었다.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은 각자의 할 일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기에 강우의 부담을 확 덜어주었다.
만일 이런 활동이 두 사람의 공부를 방해한다면 그가 멱살을 잡고 해결해 줄 것이다. 누구보다 부지런한 그들에게 피해를 줄 생각은 없었다.
이제 슬슬 강우도 자신이 맡은 일을 시작해야 할 때다. 윤수아가 만든 영상과 최대우가 제작한 월면 지형을 이용하여 사이언스 페스타에 적합하게 결과물을 포장하는 일이다.
다시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달빛이 그들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 빛은 천체망원경으로 들어와 CCD 카메라를 통해 화면에 저장되고 있었고. 그들은 그 속에서 달의 신비를 캐고 있다.
* * *
“하음.”
하품이 쏟아졌다.
새벽에 달을 관측할 때는 정말 좋았는데 오후가 되자 잠이 쏟아졌다. 눈치를 보니 최대우와 윤수아도 그리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였다. 수면 시간이 불과 두 시간 남짓이다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청춘이라지만 수면 부족 상태로 낮에 수업을 들으려니 고역이었다.
“강우! 또 하품하지?”
교탁에서 신새벽이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눈도 밝다. 어떻게 포동포동한 최대우에게 가려진 그를 꿰뚫어 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음!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데요?”
“네 눈을 봐라, 눈을! 반쯤 감고 있잖아?”
“제가 원래 눈이 작아서 그래요. 이게 제일 크게 뜬 거라고요.”
힘을 써서 눈꺼풀을 들어 올려 보지만 계속 눈이 감겼다. 아무래도 새벽 관측은 한창 자랄 이 나이대에서는 무리였다. 예전 손강우 시절과 비교해서 몸은 젊어졌는데 잠은 더 쏟아지는 느낌. 이래서야 며칠 밤을 새우며 어떻게 연구에 몰두하지? 운동이라도 해야 하나? 아침 점호 때 맨손체조로는 부족한 건가…….
“하음, 완전 저질 체력이야…….”
“응? 저질이라고? 선생님이? 이 녀석이!”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억! 그, 그게 아니라요.”
강우는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신새벽이 안면을 확 찡그리고 그에게 다가올 때 종이 쳤다.
“강우 넌 나랑 면담 좀 하자, 따라와라.”
손가락을 까닥이는 신새벽을 보며 강우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 *
“넌 어떻게 된 게 오늘 영 맥을 못 추니? 밤에 뭐 했어?”
상담실에서 마주 보고 앉아 신새벽이 강우를 살폈다.
강우는 여전히 반쯤 감은 눈을 하고 길게 하품을 내쉬었다.
“그, 그게요…… 밤에 잠을 못 자서…….”
“설마? 너 밤에 야동 보거나 그런 거 아니지?”
“네? 아닌데요?”
바로 부정하는 강우를 살피며 신새벽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보니까 딱 그게 원인이야. 어제 괜찮은 거 구했나 보네. 너, 밤새도록 그거 보느라 늦게 잔 거지?”
열심히 설명하는 신새벽의 잔소리에 강우는 또다시 하품을 쏟아내며 말했다.
“과제연구 때문에…… 늦게 잔 건데요.”
솔직히 그의 정신연령을 생각하면, 이런 짓궂은 농담에 당황하는 척하면서 어울려 줄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를 놀리려는 신새벽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 상담실의 문이 열리며 차도도가 들어왔다.
“어? 차 선생님? 여긴 무슨 일로?”
“우리 애 잡는다는 소문이 들리더라고요.”
미소를 지으며 들어온 차도도가 강우를 보고는 확 인상을 구겼다. 사고 친 녀석이 넌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더욱 기세가 오른 신새벽이 다시 강우를 갈궜다.
“얘가 오늘 수업 시간 내내 잠만 자더라고요. 보니까 딱 밤에 야동을 보다가…….”
한참 설명이 이어지자 차도도의 표정 또한 점점 나빠졌다.
강우는 어이가 없어 고개만 도리질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차도도가 강우에게 명령했다.
“강우! 지금 가방에 노트북 들었지?”
“드, 들었는데요?”
틈틈이 물리 블로그 해답을 작성하느라 최근에는 노트북을 갖고 다니고 있었다.
“꺼내봐.”
“제 노트북이야 뭐…… 청정지역 그 자체죠.”
노트북으로 야동을 보기는커녕 게임도 하지 않는 강우였기에 전혀 거리낄 게 없었다. 노트북을 차도도가 사줬기에 딱히 거부할 수도 없는 일.
노트북을 꺼내자 신새벽마저 시선을 집중했다.
강우는 자신 있게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허억!”
강우는 다급하게 노트북을 덮으려다 신새벽에게 빼앗겼다.
그의 노트북 화면에는 유명한 걸그룹 사진이 떡하니 떠 있었다. 그것도 요즘 잘나가는 걸그룹이 화면 가득 얼굴을 내밀고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이건 최대우가 깔아준 건데…….
당황한 강우는 차도도와 신새벽의 눈치를 살폈다. 이미 사태를 수습하기에는 늦은 것 같았다.
황당한 표정으로 차도도와 신새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게 청정지역이야?”
“이, 이건 제가 한 게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냐? 여기 동영상도 있네.”
신새벽이 바탕화면에 깔린 동영상을 클릭했다. 화면에 요란한 춤을 추는 걸그룹이 등장했다. 하필이면 옷차림마저 무척 화려하고 야하다.
‘그거 대우 최애라고요!’
마음속으로 외침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지자 강우는 차라리 입을 다물기로 했다. 말을 말자. 최대우 이 자식을 패버릴 수도 없고.
차도도는 실망한 듯 시선을 돌렸고 신새벽은 반쯤은 웃는 얼굴로 강우를 노려봤다.
“내가 이럴 줄 알았거든! 밤새도록 이거 구경하다가 잠을 못 잤구나? 물론 너 나이 때면 여자 연예인이 예뻐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밤을 지새우면 어쩌니? 이런 파일이 한두 개가 아니네? 잘 찾으면 야동도 있겠다, 응?”
“으으.”
“원래는 노트북을 압수해서 싹 다 지우고 돌려줘야 하는데…… 내가 봐줬다. 나보다 조금 못생긴 애를 화면에 올려놓았으니까.”
신새벽이 뻔뻔하게 잔소리를 늘어놓은 다음 노트북을 강우에게 다시 넘겼다.
강우가 받으려는 순간 노트북이 차도도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차도도가 그의 노트북을 조사했다.
“차 선생님, 그거 뒤질수록 못 볼 게 늘어날 텐데……. 얘 프라이버시도 있고…….”
이미 프라이버시가 털려버린 강우는 차마 노트북으로 손을 뻗지 못했다.
클릭하자 폴더가 열리고 최근 그가 작업하던 몇몇 파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코페르니쿠스? 이건 뭐니?”
“그거 과제연구인데요…….”
강우는 짤막하게 과제연구 주제인 월면 지형 탐구를 설명했다. 달에 있는 산의 고도를 측정하고 달 지형을 모형으로 구현한다고 설명하자 차도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제연구로 지구과학을 선택했다고 하더니 재밌는 작업을 하고 있었네. 그런데 네 설명대로라면…… 과제연구라기엔 작업량이 너무 많은데?”
“사이언스 페스타에 나가기로 했거든요.”
“아!”
차도도도 사이언스 페스타를 잘 아는 모양이다. 흥미를 느낀 신새벽도 다시 화면에 시선을 모았다.
“너희 팀도 출품하는구나. 선생님도 이번에 사이언스 페스타 가는데. 거기서 보겠네?”
차도도가 의외의 말을 던졌다.
“네? 선생님께서 지도하고 있는 과제연구도 출전하나요?”
“그건 아니고…… 난 그날 ‘생활 속의 물리’라는 주제로 강연할 거야. 그때 강연 들으러 오렴.”
사이언스 페스타에서 기획한 여러 행사 가운데 차도도의 강연도 있었다. 과학고 선생님으로서 일반 중고등학교 학생에게 물리를 쉽게 설명해주는 강연이었다.
“이건 뭐니?”
“아, 그건 요즘 대우가 블로그를 만드는데요…….”
간략한 설명에 차도도가 이해한 듯 수긍했다. 강우는 그 표정에서 긍정적인 기운을 읽었다. 역시 차도도는 적어도 물리에서만큼은 그와 공감하는 면이 상당히 많다.
차도도의 손이 다른 폴더를 클릭했다. 그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상온 핵융합? 이건 또 뭐니?”
강우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