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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59화 (59/325)

제59화 차도도와 신새벽 (1)

지금 강우의 노트북에는 손강우가 연구했던 모든 자료가 담겨 있었다.

손강우의 계정에서 확보한 각종 메일, 연구자료, 논문, 보고서에 한국대를 방문했던 날 실험실 피씨에서 클라우드로 넘긴 각종 자료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연구자료가 쌓여 있었다.

아직 제대로 정리하고 분류하지 않아 뒤섞여있는 상태이지만 고등학생의 노트북에 있을 만한 건 아니었다.

차도도에게는 어쩌면 야동보다 이 연구자료가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주제가 고교 물리와 전혀 무관한 상온 핵융합이라니.

클릭한 폴더 내부의 파일 제목을 쓱 훑어보던 차도도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이다.

그렇다고 전생에서 연구하던 자료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일이 꼬이네.’

이럴 때 임기응변이 필요한데 딱히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다.

신새벽이 화면을 쓱 훑어보고는 말했다.

“그거 제목만 그럴듯할지도 몰라. 실제로 눌러보면 이상한 그림 막 뜨고…….”

차도도는 간신히 미소를 짓고는 다시 강우를 보았다. 다그치는 느낌은 없었고 평소처럼 차분한 표정이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강우는 간신히 좋은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지난번에 요셉 교수 강연회 주제가 핵융합이었잖아요?”

“응, 그랬었지.”

“그때 제가 질문하다가…… 핵융합에 팍 꽂혔거든요? 그래서 그동안 관련 자료를 뒤져 저장해놓은 거예요.”

“흐음, 그래?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전문적인데?”

여전히 차도도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강우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얼마 전에 한국대 마도환 교수 실험실을 방문했었잖아요?”

“그런데?”

“그때 대학원생이 핵융합을 연구했던 유명 교수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얼마 전에 설악산에서 실족사했는데…… 그분 자료가 그 실험실에 있어서…….”

“그래서 그 자료를 받아왔다는 거야? 그 사람이 누구였지?”

“손강우란 분인데…….”

“강우?”

이름이 같아서일까, 차도도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드러났다. 다시 그녀의 시선이 모아둔 파일로 향했다.

강우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학교수, 그것도 관련 분야 전문가의 자료를 다운 받았으니 그가 이런 자료를 소유하고 있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여전히 미심쩍은 듯 모니터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차도도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노트북을 닫았다.

“신 선생님, 바람과 달리 야동은 없네요.”

차도도가 신새벽에게 미소를 던졌다.

“수업 시간에 조는 거 보면 딱인데…….”

시큰둥한 표정으로 신새벽이 강우를 흘겨보았다.

강우는 노트북을 챙기면서 물었다.

“그럼 전 이제 가도 될까요?”

“아니.”

차도도가 그의 퇴로를 차단했다.

가방에 노트북을 집어넣고 강우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차도도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우야, 중간고사 때 우리랑 내기했잖아? 네가 시험을 잘 치면 소원 들어주기로.”

“네, 그랬었죠.”

당장은 딱히 바라는 게 없었기에 강우는 잊어버린 상태였다. 최근에 이런저런 일로 너무 바빴다.

“그런데 네 성적이…… 너무 잘 나왔단 말이야.”

차도도는 강우가 중간만 넘어가도 다행이라고 여겼었다. 물론 수학과 물리는 빼어난 성적을 거두겠지만 다른 과목에서 밀려 중간 정도를 예상했었다. 그런데 강우가 무려 전교에서 1등을 해버렸다. 특히 수학과 물리에서는 만점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이었다.

“화학도 만점이라 신 선생님 콧대를 팍 죽여놓았지.”

“어? 내 콧대 아직 높다고!”

신새벽이 웃으며 반박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원하는 게 있니?”

딱히 있을 리가. 톡 보고를 없애달라고 해도 그건 절대 안 된다니 달리 원하는 게 없었다. 지금 당장에는 필요한 물건도 없고 그렇다고 두 선생님에게 도움받을 일도 생각나지 않았다.

“딱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차도도가 말을 이었다.

“그럼 이번 주말에 나랑 신 선생님이랑 영화 보러 갈래? 어때?”

“네?”

“마침 우리 둘이 영화 보러 가기로 했는데 너도 올 거냐고?”

멍한 표정으로 강우는 두 사람을 살폈다. 차도도는 여전히 차갑고 진지한 표정이었고 신새벽은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음…….”

강우는 조금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신새벽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어? 이 녀석이 퇴짜놓으려 하네? 야! 나랑 영화 보려는 남자들 줄 섰거든? 내가 거절한 남자들만 해도 한 트럭이야. 물론 차 선생님이야…… 별로 없겠지만.”

그럴 리가? 저 미모라면 남자가 꼬이지 않을 리 없는데? 당장 강남역 앞에만 지나가도 전화번호 따겠다고 접근하는 남자가 부지기수일 텐데?

“으이그, 이 녀석은 내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하나 본데……. 차 선생님은 포스가 넘쳐서 남자들이 접근을 못 해요. 나처럼 겉보기에 사근사근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어야 남자가 꼬이는 법이지. 그게 예쁘다고 다 걸리는 게 아니야.”

신새벽의 말뜻을 대충 알아들었다. 하긴 차도도는 분위기가 지나치게 차갑다. 아름답지만 감히 다가가기 어려운 기운이 있었다. 반면 신새벽은 애원하면 받아줄 것 같은 분위기니까.

“그렇게 좋아하는 표정이 아닌데?”

“그게…….”

인상을 확 구긴 차도도 대신에 신새벽이 말했다.

“얼른 승낙 안 해? 많이 봐준 거야. 네가 평생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니? 게다가 돈도 우리가 다 내주잖아.”

강우는 실소를 머금었다. 말만 데이트지,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거나 하다못해 간단한 스킨십도 못하는데.

“알았어요.”

“이게 표정 보니까 진짜 데이트라고 생각하나 봐? 알았어, 알았다고. 이번 주말 일요일에 시간 되지? 안돼도 시간 비워 놔.”

강우는 알았다고 대답한 후 꾸벅 인사했다.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뒤에서 요란한 신새벽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 *

물리 문제풀이 센터 블로그를 개장했다.

플랫폼에서 제공하는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어렵진 않았지만, 내용을 채우려니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강우는 괜찮은 문제 몇 개를 뽑아 표준 답안을 만들어 넘겼고 손차희는 학원에서 풀었던 문제 가운데 어려웠던 문제만 뽑아 정리했다.

최대우와 윤수아는 중학교 물리 문제 가운데 핵심 문제를 뽑아 새로운 설명을 덧붙였다.

그들 네 사람이 힘을 합쳐서 꾸미자 꽤 그럴싸한 블로그가 탄생했다.

- 어려운 문제를 질문하면 풀어드립니다.

마지막에 이런 멘트를 달았다. 블로그 운영 주체는 ‘고곽천재’라고 썼다. 물론 고곽천재가 누구인지 외부에서는 전혀 특정 지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을 제외하면 반에서도 가까운 몇몇 정도만 그 별칭을 기억할 정도였으니까.

블로그를 열고 만 하루가 지났으나 방문자는 아무도 없었다.

저녁에 자습실에 모인 네 사람의 한숨이 커졌다.

“아무도 안 오잖아!”

“당연하지. 오픈했다고 손님들이 막 몰려오면 망할 장사꾼이 누가 있을까.”

길거리 장사나 블로그나 비슷하다는 게 윤수아의 논리였다.

강우는 그래도 이렇게까지 파리만 날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래서야 블로그를 통해 최대우를 각성시켜 보겠다는 의도가 완전히 틀어졌다. 괜히 쓸모없는 짓을 벌인 것 같기도 하고.

당사자인 최대우도 한결 풀이 죽은 얼굴이었다.

“하아! 망했어.”

강우가 그들에게 사과하려는 순간이었다.

윤수아가 새로운 돌파구를 들고 나왔다.

“이럴 때 구세주가 있지. 나와 차희를 무시하지 말라고.”

“응? 뭔 소리야?”

“나랑 차희랑 SNS를 하잖아? 거기에 올려서 소문내면 돼. 그 생각을 왜 못 했지?”

물론 강우는 이런 쪽으로 재능도 없고 알지도 못했다. 울릉도에서 별만 보고 살았던 최대우도 마찬가지.

“차희야, 무슨 말인지 알지?”

“당연하지. 그럼 소식부터 퍼트려볼까?”

손차희가 핸드폰을 들었다.

중학교 시절 학교와 학원에서 스타였던 손차희를 따르는 무리가 꽤 있다. 같은 학년뿐 아니라 후배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화제의 인물이었으니까. 과학영재고를 입학할 정도면 유명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손차희 만큼은 아니었지만 윤수아도 마찬가지다. 시험 때가 되면 그녀에게 질문하는 친구나 동생들이 많았다.

두 사람이 핸드폰으로 물리 문제풀이 센터 블로그 오픈 소식을 알리자 10분 만에 방문자가 들어왔다.

- 물리 문제풀이 센터 오픈을 축하해요. 앞으로 자주 들어올게요.

단순한 방문 인사였으나 그들은 첫 손님을 맞이한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다시 10분 후, 이번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글을 올렸다.

- 정말 문제 풀어주나요? 이 문제 학원에서 받았는데 너무 어려워요. 풀어주세요.

문제지를 스캔한 그림과 함께 처음으로 문의가 올라왔다.

중학교 과학에서 다루는 조금 어려운 물리 문제. 물론 그들은 눈 감고도 풀 수준이다.

“대우야, 이거 풀 줄 알지? 네가 풀어서 답을 올려줘.”

강우의 재촉에 최대우가 불만 없이 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설명을 곁들여서 해답을 올렸다.

- 언니, 오빠! 고맙습니다.

질문한 사람이 만족해서 인사를 남겼다.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방금 질문한 중학생은 이 해답을 보고 제대로 내용을 이해할 것이다.

손차희와 윤수아의 SNS 위력은 상당했다. 사실상 외톨이나 다름없는 강우와 최대우가 꿈도 꾸지 못할 수준. 문제풀이 블로그 오픈을 축하한다는 친구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방문객이 이어지자 침울했던 그들의 분위기도 단번에 살아났다.

그리고 연속으로 방문 소감과 질문이 올라왔다. 질문에는 강우를 비롯하여 모두가 돌아가면서 맡아 푼 다음 곧바로 올렸다. 대부분 고등학교 과정의 물리 문제였고 그들 수준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 또한 공부의 일환이었지만 재미도 있었다.

자습시간이 끝날 때쯤 다소 특별한 문제의 풀이요청이 올라왔다.

문제를 본 순간 손차희가 안면을 찌푸렸다.

“이건 안 배운 문제인데? 대체 뭐지?”

이미 교과 과정을 끝내고 대학 일반 물리 교재도 한번은 훑어봤던 손차희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문제가 등장했다. 애초에 그들 블로그는 중고등학생 대상이기에 무시해도 상관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거절할 수는 없었다. 최악의 경우 교과 과정 밖이라는 코멘트라도 붙여줘야 한다.

역시 어려운 문제는 강우에게로 넘어왔다.

화면에 뜬 질문을 살핀 강우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유체역학 문제인데?”

유체역학은 물리의 한 분야이지만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극히 일부만 다룬다. 대학 일반물리에서도 수박 겉핥기로 다룰 뿐이다. 대학에서 물리학과 고학년으로 올라가서 세부 전공으로 들어간 다음에야 제대로 배우기 때문에 대충 대학 3학년 수준의 문제라고 보면 된다.

“할리데이에는 나오나?”

손차희가 자신이 봤던 물리 대학교재 이름을 꺼냈다.

“아니, 거기 말고. 그보다 더 전문 서적에.”

강우의 대답에 세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대체 강우는 물리 공부를 어디까지 한 걸까.

그제야 강우도 자신의 실수를 감지했다. 상식적으로 고등학생인 그가 대학 일반물리도 아니고 세부 전공 서적을 공부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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