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차도도와 신새벽 (3)
영화를 보고 나와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국밥을 외치던 강우의 의견은 가볍게 무시되었고 두 사람을 따라 들어간 곳은 스파게티 전문점이었다.
여자들은 다 이런 곳을 좋아하나?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양인데다 비싼 가격까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돈을 내는 사람이 왕이기에 강우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리고 불과 몇 젓가락 만에 다 먹어 치운 강우는 차도도와 신새벽이 먹는 장면을 구경했다. 포크로 면발을 돌돌 말아 조금씩 감질나게 먹는 두 사람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접시를 비우고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누른 신새벽이 그제야 말을 걸었다.
“강우 영 쑥맥이더라? 기껏 영화관에 데려왔더니 꼼짝도 안 하고 영화만 보던데.”
“네?”
“나중에 여자친구랑 데이트할 때 어쩌려고 저럴까.”
“…….”
“애한테 그게 무슨 말이야.”
짐짓 엄하게 인상을 쓴 차도도가 강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럴 때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가 대답할 틈도 없이 다시 신새벽이 쏟아냈다.
“오늘 재밌었어?”
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히, 그렇겠지. 나 같은 미녀랑 데이트하는데 재미없을 리 없잖아? 이건 로또 맞은 거랑 비슷해.”
로또 5등, 5천 원짜리. 반박하려던 강우는 한 대 맞을 것 같아 입을 닫았다.
“기말고사에도 시험 잘 치면 또 데이트해줄 테니까 시험 잘 칠 수 있지?”
“이젠 적당히 할 건데요?”
강우는 바로 반박했다. 이제부터는 열심히 공부해서 괜히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이번 중간고사처럼 좋은 성적을 거둘 일도 없었다.
“적당히? 열심히 해야지, 그렇지 않아?”
“시험공부는 별 재미가 없어서요.”
과학고에 들어온 천재 중에는 가끔 지금 강우가 말한 것과 같은 행동을 보이는 학생이 있다. 특정 과목만 잘한다거나 아니면 교과 과정과 상관없는 분야에 집중한다거나.
그런 학생을 여러 차례 봤기에 차도도와 신새벽은 놀라지 않았다.
“음, 그러면 곤란한데? 네가 열심히 해야 선생님도 기쁘지. 그러지 말고 열심히 하자, 응?”
“네.”
강우는 마지못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차도도는 강우의 내심을 바로 잡아냈다. 중간고사 전과 달리 지금은 공부에 관한 열정이 줄어들어 보였다. 사실 오늘 이런 자리를 가진 이유도 지난 중간고사 성적을 보상하고 앞으로 열심히 하자는 격려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꺼냈다.
“강우야! 요즘 보니까 네가 조금 걱정이 돼. 열심히는 하는데……. 사이언스 페스타랑 물리 블로그랑 그리고…… 그 핵융합 자료까지. 너무 교과 외 활동만 열심히 하는 거 아닌가?”
지금 강우의 시간은 매우 바쁘게 돌아갔다. 그만 그런 게 아니라 조원 모두가 그렇다. 자연스럽게 학교 수업을 완벽하게 따라가기 더 힘들어졌다. 그야 결심했으니 상관없지만 다른 조원들은 타격이 있을지도 모른다.
“페스타 끝날 때까지만인데요.”
사이언스 페스타가 끝나면 기말고사 때까지 시간이 다소 있다. 페스타 덕분에 과제연구를 미리 끝내는 셈이니까 겉보기처럼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물론 알아서 잘하겠지만…… 나중에 대학 입시를 고민할 때가 되면 한 학기 놓친 게 의외로 큰 타격으로 다가올 수 있어.”
강우는 그를 완벽하게 파악한 차도도의 섬세함을 눈치챘다. 이번 기말고사 때 그가 시험을 성의 없이 볼 거라고 이미 예상한 듯했다.
차도도를 그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시점일까. 미래의 계획을 떠올려 보면 그녀의 도움이 적잖게 필요하긴 했다.
“쌤, 저는…… 국내 대학으로 진학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아. 외국으로 유학 가는 학생도 꽤 있으니까. 하지만 벌써 그렇게 단정하기엔…….”
“이미 목표를 정했어요. 덕분에 앞으로 과제연구와 R&E가 무척 중요해졌어요. 내신 성적보다도.”
강우를 빤히 쳐다보던 차도도가 한숨을 내쉬었다.
R&E에서 운이 좋으면 국내 대학 유명 교수의 지도를 받아 논문을 작성하게 된다. 보통 한국대 교수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협동연구를 하고 그 논문이 유명 학술지에 실리면 이 실적을 이용해서 외국 대학에 지원할 수 있다.
다만 그런 과정을 밟은 학생들은 과제연구나 R&E 지도교사로 김윤택을 원했다. 김윤택이 한국대 물리학과나 물리교육과 쪽에 발이 넓기 때문이다.
강우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차도도는 순간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번 학기 과제연구에서도 강우를 김선호에게 빼앗겼고 손차희를 김윤택에게 빼앗겼다.
최근 강우가 핵융합에 비상한 관심을 두고 있으니……. 문득 차도도는 얼마 전에 보았던 한국대 물리학과 교수 마도환이 떠올랐다. 핵융합 전공이라 강우를 지도하기에 딱 적합했다. 학교에 강연을 오겠다고 했으니 과학고 학생에게 관심도 있고.
그녀가 보기에 괜찮은 사람 같았다. 다만 마도환은 그녀보다 김윤택과 더 가까운 사이다. 그녀는 이번에 처음 인사한 정도니까. 어쩌면 강우와 연결하기 위해 마도환과 가까워질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자 차도도는 기운이 쭉 빠졌다. 어쨌든 강우의 앞날이 중요했다. 김윤택이 지도를 맡더라도 학생의 앞날이 밝아지면 충분히 양보할 수 있다. 물론 그녀가 맡아서 더 잘하고 싶었지만.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이번 사이언스 페스타에 집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차도도는 마지못해 강우를 격려했다.
“다음 학기에는 과제연구로 물리를 할 생각이에요.”
“그래, 그것도 좋지.”
겉으로는 찬성하면서도 차도도는 자신의 예상과 강우의 계획이 어긋나지 않자 우울해졌다. 강우가 물리를 선택하면 김윤택이 담당할 확률이 높았다. 강우를 꼭 키워보고 싶었는데 단 한 학기도 과제연구에서 인연이 없어 보였다.
강우는 구체적인 계획을 설명했다. 차도도가 성적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하려면 지금 확실하게 못을 박아둬야 한다.
물론 차도도에게는 철없는 고등학생의 뜬구름 잡기일 뿐이다. 실망한 차도도는 듣는 척만 하고 있었다.
오히려 옆에서 신새벽이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강우야, 네 계획도 좋아.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좋은 대학에 진학하려면 내신을 잘 보거나, 수능을 잘 치거나, 아니면 네 계획처럼 실적을 쌓거나…….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지.”
강우는 자신을 격려해주는 신새벽이 고마웠다. 어쨌든 계획이 무모하지 않다고 판정이 내려져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강우의 의욕을 고취해주고 싶어진 신새벽이 열심히 조건을 걸었다.
“나중에 네가 좋은 대학 들어가면…… 내가 또 데이트해줄게. 어때? 그땐 너도 어른이라고! 의욕이 팍팍 생기지? 그러니까…… 과제연구를 화학으로 하면 안 되겠니?”
무덤덤한 표정의 강우와 달리 차도도의 안색이 확 붉어졌다.
“헛소리는 그만하지? 강우야, 가자!”
“어? 어디 갈 건데? 커피 마셔야지?”
신새벽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한 차도도는 강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강우 옷 사러 가야 해. 곧 계절이 여름으로 바뀌는데…… 여름옷 없을걸?”
강우는 감격한 눈빛으로 차도도를 바라보았다. 마침 옷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어떻게 알고.
예전에 차도도와 골랐던 옷들이 마음에 들었었기에 마다할 그가 아니었다.
“감사해요. 선생님.”
강우가 차도도를 따라나서자 홀로 남은 신새벽이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강우야! 나도 골라줄게. 나 눈썰미 좋거든!”
“넌 밥값이나 내!”
먼저 나간 차도도가 신새벽을 향해 소리쳤다.
* * *
3D 프린터로 작업한 월면 모형이 도착했다.
달 표면에서 북위 10도, 동경 340도 지점에 위치한 코페르니쿠스는 직경 93km에 달하는 거대한 크레이터다. 내부의 평평한 지역은 62km이고 크레이터를 둘러싼 외벽은 무려 3.8km나 된다. 크레이터 바깥지형을 기준으로 크레이터 내부는 2.9km나 파여 있다. 대략 서울시의 4배 면적이다.
크레이터 내부에는 복잡한 산악 지형이 솟아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크레이터 바닥에서 1.2km나 된다. 이 산은 에베레스트산보다 더 높다.
강우네 팀이 천체망원경으로 얻어낸 관측 결과로 계산한 수치는 거의 참값에 가까웠다. 이 계산 아이디어는 강우가 냈고 최대우가 구체적으로 수식을 만들었으며 이것을 윤수아가 프로그램화했다.
윤수아의 프로그램으로 필요한 3D 값을 얻어내어 3D 캐드 작업을 맡겼다. 이 과정부터는 사실상 그들의 손을 떠났다.
3D 캐드와 3D 프린터로 모형을 구현하는 작업을 김선호가 해결해줬다. 그 비용 또한 페스타 출품을 빌미로 학교에서 지원해줬다. 사이언스 페스타 참여를 학교 측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준 덕분이었다.
“와아!”
크기 1m로 완성된 크레이터 모형은 절로 탄성을 불러왔다. 망원경으로 보던 장면을 실물로 직접 보게 되니 그 감격이 남달랐다.
“이게 10만분의 1로 축소한 모형이거든. 어때? 달 표면 같아?”
윤수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의기양양하게 질문을 던졌다.
“하아! 실물과 똑같잖아? 진흙으로 만든 것보다 확실히 낫네.”
“당연하지. 돈이 얼만데.”
최대우는 자신이 진흙으로 만든 모형과 비교하며 쓴맛을 삼켰다.
“이거 엄청 정교한 거야. 크레이터 지형을 하나하나 똑같이 작업했거든.”
이렇게 모형을 확인하자 달의 거대함과 그 표면의 신비가 가슴에 와닿았다.
강우는 옆에서 전등을 비스듬히 비추고 실내의 불을 모두 껐다.
모형에 빛이 드리워지며 그림자가 길게 생겨났다. 이 장면을 위에서 바라보니 망원경으로 보던 월면과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진 찍어서 망원경으로 찍은 달 표면과 비교해보자.”
강우의 제안에 최대우가 핸드폰을 꺼냈다.
이 모형은 그동안 그들이 고생한 최종 결과물이다. 이 모형을 만들기 위해 꽤 많은 날을 천문대에서 보냈다. 야밤 관측도 모자라서 저녁 자습시간에 모여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수식을 작성하고 프로그램을 코딩했다. 그리고 3D 프린터 작업을 맡기고 받아오는 일까지.
이 과정 동안 그들이 쏟아부은 열정은 절대 적지 않았다.
“달 전체를 이렇게 모형으로 만들어봤으면 좋겠다.”
“그게 돈이 얼만데…….”
최대우의 바람을 윤수아가 무참하게 꺾었다.
비록 희망 사항일 뿐이지만, 그들 모두 비슷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제 페스타 준비 끝난 거야?”
윤수아의 질문에 강우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부터 시작이지. 이 과정을 설명하는 전시 판넬을 만들어야 해. 또 관측한 사진으로 만든 동영상도 필요하고. 이 작업에 적용한 과학 이론을 쉽게 설명하고 보여줄 아이디어도 짜내야……, 아! 에베레스트 모형도 만들어서 옆에 전시하자. 그러면 크기가 쉽게 비교될 거야. 다만…….”
강우는 상기된 표정의 두 사람에게 미소를 지었다.
“중요한 일은 다 끝났으니까 앞으로는 공부도 하면서 작업해야겠지.”
공부란 말에 윤수아와 최대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시간을 잘게 쪼개어 아껴 썼다고 해도 다른 학생들에 비해 학업 시간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페스타 출품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그래도 페스타에선 좋은 성과가 있겠지?”
강우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결과는 좋을 거야. 열심히 했으니까. 흠, 상을 못 타면 어때? 우리가 이 과정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으면 충분한 거지.”
그들은 이 작업에 매달리면서 한층 성장했다. 이제는 어떤 어려운 과제를 만나더라도 마주쳐 해결할 용기가 생겼다. 그들 셋이 힘을 합치면 어떤 연구라도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아, 안돼! 상을 못 타면. 그러면 유성이가 이기게 되잖아?”
윤수아의 외침에 강우는 새삼 권유성과의 대결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