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사이언스 페스타 (2)
“이만하면 됐지?”
강우는 전시 부스를 꾸미는 데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윤수아에게 의견을 물었다.
깐깐하게 간섭하던 윤수아도 그제야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만족을 드러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지도교사인 김선호를 향했다.
김선호는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느라 준비 과정에서는 의견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놓은 전시물을 보고는 미소로 격려했다.
“이 정도면 작년보다 훨씬 낫네. 고생했다.”
김선호의 평가에 세 사람은 짐을 내려놓았다.
“강우야, 다른 학교 부스 구경하러 가자.”
이제 막 오픈해서 아직은 관람객이 많지 않았다. 주최측 및 후원 관계자들이 돌아보는 때는 점심 직후라고 했으니, 그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강우는 윤수아에게 잡혀서 옆 부스로 끌려갔다.
“대우는?”
“한 사람은 지키고 있어야지.”
결과적으로 최대우를 남겨놓고 둘만 움직였다.
적어도 강우에게는 특별한 전시 작품이 보이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동아리 출품작이라 대부분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이 그 자체로는 의미가 적을지라도 참여 학생들에게 엄청난 동기 부여가 되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해볼 수 있었다.
이런 학습 과정을 경험한 학생들은 훗날 훌륭한 과학자로 자라날 것이다.
인근 부스에 익숙한 인물이 보였다. 바로 신새벽이었다.
신새벽이 지도하는 과제연구팀도 페스타에 출전했다. 실험을 가미한 화학 주제로 열심히 한 흔적이 엿보였다.
다급하게 학생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는 신새벽의 모습이 왠지 낯설었다. 그와 같이 있을 때의 그녀는 약간 허당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완벽한 베테랑 선생님이었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작업하기 편하도록 수수하게 입었다. 학교에서는 볼 수 없던 차림새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신새벽이 강우를 발견하고 손짓했다.
“강우 왔어?”
강우는 윤수아와 함께 그녀의 옆으로 가서 구경했다.
“준비 다 끝냈니? 우리는 아직…… 얘들아! 얼른 얼른 서둘러야지! 지구과학팀은 벌써 끝났다잖아!”
신새벽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학생들의 동작이 후다닥 빨라졌다.
강우는 신새벽네 반 학생들을 잘 몰랐다. 솔직히 고려 과학고에서 그가 아는 학생은 매우 드물었다. 같은 반 학생들조차도 전부 알지 못했다.
반면 윤수아는 안면이 있는 학생들과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너흰 잘했어?”
신새벽의 물음에 강우는 방금 전시하며 힘들었던 신세타령을 늘어놓았다.
“그만하면 처음치곤 잘한 거야. 하긴 김 선생님이 꼼꼼하게 봐주셨을 테니까.”
“그래도 선생님만 하겠어요?”
“이런! 김 선생님 들으시면 섭섭하겠다. 원래 이런 일은 김 선생님이 베테랑이야. 작년에도 상을 탔으니까. 우리 화학팀은 그냥 참가에 의의를 두고 있어. 근데…… 이거 무슨 내용인지 아니?”
판넬을 보니 촉매를 이용한 화학반응이 나열되어 있었다. 뭔지도 모를 분자 기호가 적혀 있고 결과로 화학 공정을 개선했다는 내용인데 강우가 알 턱이 없다.
“모르나 보네.”
“제가 화학은 깡통이라…….”
“그래, 내가 뭘 바라겠니.”
“다른 선생님들은 안 오셨어요?”
“너희 담임 쌤은 적당한 주제가 없어서 포기했고 김윤택 부장 선생님은 원래 이런 대회에 관심이 없어.”
오로지 대학교 진학만을 추구하는 김윤택의 성향을 보면 이런 대회는 안중에 두지 않을 게 뻔했다. 교육부가 후원하면서도 학생부에 기록할 수 없는 대회이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손차희가 이곳에 없다는 점이 섭섭했다.
“저흰 다른 곳 구경하러 갈게요.”
“그래라. 나중에 배고프면 오렴. 밥 사줄게.”
듣기만 해도 반가운 말에 강우는 꾸벅 인사하고는 다른 부스를 구경하러 갔다.
경쟁자인 권유성의 부스가 보였다.
강우는 권유성 팀의 과제연구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기에 어떻게 전시했는지 궁금했다. 마지막에 헤매는 듯했는데 제대로 극복했으려나.
전시 판넬은 예상대로였다. 일 년간 심혈을 기울여 찍은 태양 사진을 합성해서 큼지막하게 걸어놓았다. 8자를 옆으로 기울인 무한대 표시(∞)를 확연히 보여주는 태양의 움직임이 선명했다. 가로로 평균 태양시와 실제 태양시의 차이를, 세로로 계절별 태양고도 차이를 드러내는 사진이었다.
그 옆에 이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복잡한 이론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리고 역시 강우의 예상대로 각 행성에서 예상되는 같은 유형의 그림이 있었다. 강우가 윤수아에게 아이디어를 주었던.
덕분에 전시장 판넬은 더 풍성해지고 볼거리가 많아졌다.
“봤냐?”
권유성이 으쓱대며 다가왔다.
강우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재주껏 잘했네.”
“무려 일 년간 고생한 역작이거든! 놀랍지? 질까 봐 신경이 팍팍 쓰이지?”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아직 말하는 태도가 영락없는 중딩…… 아니 초딩이다. 정작 본인은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물론 어리다고 따뜻하게 보듬어줄 강우는 아니었다. 내기한 적군이기도 하고.
“내가 보기엔 아직 멀었어. 우리 팀이 한 거랑 비교해봐. 아쉽지만 이걸로는 상 받기는 어려울걸?”
“뭔 소리야? 악담을 퍼붓다니!”
“그래도 그럭저럭 고생했다. 나중에 보자.”
강우는 손을 흔들며 옆 부스로 몸을 틀었다.
“으아! 저 자식이!”
발을 구르는 권유성을 윤수아가 달랬다.
“유성아, 강우를 너무 나쁘게 말하지 마. 난 둘이 사이좋게…….”
“누나도 방금 봤잖아? 망하라고 고사 지내는 거.”
“그거 너랑 있으니 어색해서 그래.”
“어휴, 어쨌든 누나 고마워요. 누나 덕분에 골치 아팠던 거 다 해결했거든요. 저기 저 판넬은 누나 아이디어를 참고해서…….”
권유성이 몇몇 판넬을 가리키며 고마워했다.
정작 윤수아는 고민에 잠겼다. 강우가 도와줬다고 말해야 하나……. 괜히 말을 꺼냈다가 권유성이 충격을 받을 것만 같아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 * *
홀로 전시장을 돌아다니던 강우는 물리 주제를 연구한 부스 앞을 얼쩡거리고 있었다.
“밀물 썰물?”
어디선가 들었던 익숙함이 전해졌다.
기초적인 내용이지만 꽤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했다. 만조와 간조 시각을 측정하고 이를 천구에서 달의 위치와 연관 지어 설명했다. 밀물과 썰물이 발생하는 이론을 제시하고 이 힘이 지구 각 지역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설명했다.
“흔한 주제이지만 이론적으로 설명하려고 꽤 깊이 조사하고 연구했어.”
판넬을 살피는 강우는 어느새 대학교수였던 손강우의 마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만유인력과 기조력은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도 다루기에 어려운 물리 이론이라서 이해 없이 나열한 연구보다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게 더 바람직했다.
차분하게 판넬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옆에서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렸다.
“이 자식이 또 왔네?”
무슨 말인지 몰라 옆을 돌아보니 녀석들이 씩씩대고 있었다. 그제야 강우는 이 부스가 아침에 전시장으로 들어오다가 만났던 중앙 과학고 학생들의 전시 부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고려 과학고 학생이어서인지 아니면 아침의 해프닝 때문인지 녀석들의 시선에 적의가 가득했다.
“구경하러 왔는데?”
“그럼 조용히 보고 가! 아이디어가 어쩌고…… 평가는 왜 해? 우리를 빈정댔잖아?”
그가 평가한 혼잣말이 녀석들의 귀에 들렸나 보다.
“딱히 나쁜 말을 한 기억은…… 없는데?”
“그야…… 우리가 엄청 잘해서 그렇지. 원래는 빈정대려고 왔잖아?”
녀석들의 태도를 보니 시비를 걸려고 작정한 듯하다. 학교 뒷골목도 아니고 관람객이 북적이는 전시장에서 문제가 일어날 일은 없으니 강우도 굳이 움츠러들 이유는 없었다.
다만 적대시하는 녀석들을 보니 어딘지 마음이 슬퍼졌다. 학생이면 학생답게 서로 이해하고 공정한 경쟁으로 시너지 효과를 바라야 할 텐데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여간 고곽 놈들은…… 출입금지시켜야 해.”
녀석들의 험담에 기분이 나빠진 강우가 안면을 찡그리며 물러나려 할 때였다.
“강우라고 했지?”
뒤를 돌아보니 남동훈이란 녀석이었다. 물리가 S급인 놈이다.
“어? 남동훈?”
“기억하고 있었네. 우리 전시물 어때?”
다행히 이 녀석의 말투에서는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예상보다 좋아. 주제도 괜찮고. 평소에 나도 관심이 있었거든.”
“오호, 물리를 좋아하나 보네? 난 너희 팀 전시물 보고 네가 지구과학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
“지구과학 아니고 물리.”
“나랑 같네.”
남동훈이 강우의 소매를 끌었다.
영문도 모른 채 강우는 녀석에게 붙잡혀 갔다. 설마 쥐어패려고 화장실로 끌고 가나?
전시장 가장자리에는 간이 카페가 영업하고 있었다.
“뭐 마실래?”
강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대를 쳐다봤다. 중앙 과학고 학생들이 지금까지 그를 원수처럼 대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인지.
“너희 학교랑 우리 학교랑 라이벌이라 서로 사이가 나쁘잖아? 그래서 이리로 온 거야. 난 너랑 알고 지내고 싶거든. 물어보니 너희 팀 아이디어를 네가 냈다고 하던데?”
“그, 그렇긴 하지.”
사준다는데 마다할 강우가 아니었다.
“난 주스.”
“그럼 나도.”
강우는 오렌지 주스 컵을 들고 한쪽 옆 탁자에 앉았다.
“학교 다닐만해? 솔직히 나는 좀 지겨워. 배우는 것도 아는 내용이고, 수능 위주 수업이라 재미도 없어. 너희 학교는?”
남동훈이 주스를 빨며 불만을 늘어놓았다.
명백히 친구가 되고 싶다는 표시였다. 상대가 무려 물리 S급 학생이니 강우도 마다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귀한 인연을 만나는 데 같은 학교이건 라이벌 학교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녀석의 취향도 그와 비슷했다.
덕분에 강우도 신나게 학교 불만을 늘어놓았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즐거웠다.
한참 후 윤수아가 찾아올 때까지 강우는 남동훈과 잡담을 주고받았다.
* * *
식사 후 편의점에서 산 커피를 얇은 빨대로 마시는 이민찬을 보며 손차희는 안면을 찌푸렸다.
커피를 저렇게 마시면 맛이 있나? 주변에서 저 빨대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이민찬밖에 없었다. 핫 커피든 아이스 커피든 상관없이 오로지 얇은 빨대로 마시는 녀석이다.
손차희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과제연구 어디까지 했어?”
아니꼽게 생각했기 때문인지 이민찬의 말투가 묘하게 거슬렸다.
“아직 고민 중이야.”
“난 다 했는데.”
깜짝 놀란 손차희는 이민찬의 눈치를 봤다. 김윤택으로부터 주제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다 했다고? 아무리 이민찬이 천재라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벌써?”
“빨리 끝내야 기말고사 공부할 거 아냐? 정말 중요한 건 기말고사니까. 아! 넌 이제 별로 안 중요하려나? 중간고사 성적 나쁘다고 벌써 포기한 건 아니겠지?”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 손차희는 깊은숨을 내쉬며 물었다.
“어떻게 해결했는데?”
“대충했지. 학원 찬스. 학원 물리 쌤에게 물어봤더니 자료를 던져주시더라. 예전에 했던 비슷한 게 있다면서. 그래서 조금 바꿔 정리했지.”
입학 전 과제연구에서 시도했던 방법이다. 스스로 했다고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입학 전에는 그녀 또한 이런 방식이 이상하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강우를 비롯한 친구들이 열심히 하는 것을 본 후에야 그녀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그녀도 지금 이민찬과 똑같은 방식을 사용했을 것이다. 굳이 쉬운 길이 있는데 돌아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넌 아직 준비하고 있댔지? 그럼 내가 해둔 거 줄 테니까 네가 정리해. 정리는 네가 훨씬 잘하잖아? 솔직히 대충해도 돼. 어차피 김윤택 쌤이 점수를 잘 주실 테니까.”
그 말을 들은 손차희는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