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페스타 강연 (1)
주변에서 학생들이 무슨 일인지 모여들었다.
얼굴만 잔뜩 붉힌 채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남학생을 담당 지도교사가 질책했다.
“넌 어떻게 그것도 몰라? 직접 수식을 풀었다면서? 그리고 다른 학교에 가서 사고는 왜 쳐? 자기가 한 연구는 제대로 알아야 할 것 아냐?”
지도교사도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던 모양이었다.
이 정도 혼내주면 충분하려나? 강우는 피식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뒤에서 그의 팔을 잡는 사람이 있었다.
“강우야?”
돌아보니 남동훈이었다.
“저 녀석이 원래 속이 좀 좁아. 네가 이해해라.”
“알아. 난 그냥…… 저 녀석이 실력이 제법 있을 줄 알았지.”
“그런데 너 많이 알더라? 아직 학교에선 안 배웠을 텐데?”
강우는 옆 부스로 옮겨가면서 대답했다.
“예전에 목성에 근접했다가 깨진 혜성이 있었잖아? 슈메이커 레비던가? 그거 연구하다 보니 로시 한계가 나오더라고. 그러다가 기조력을 파고들게 됐어.”
물론 거짓은 아니다. 이 문제는 오래전 손강우가 대학 때 흥미 삼아 파고들었던 문제였으니까.
“어? 나도 그랬어. 깊이 들어갈수록 신기했어. 서로 마주 보는 은하에서도 기조력이 작용해서 은하가 깨지는, 어마어마한 현상이 일어나잖아?”
“그렇지. 웅장한 우주의 드라마지.”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안다. 자신이 표시한 한 줄의 수식이 이 우주에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지. 우주를 지배하는 그 수식이 얼마나 명쾌하게 이 세상의 법칙을 설명하는지.
그런 수식 하나를 이해할 때마다 가슴이 뛰는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강우와 남동훈은 기조력 이론을 주고받으면서 손바닥을 마주쳤다. 이렇게 수학과 과학으로 서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강우는 끝없이 관련 이론을 늘어놓았고 남동훈 역시 맞장구를 치면서 강우의 해박한 설명과 이해력에 감탄했다.
둘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 모습을 지켜본 최대우와 윤수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그들이 목격한 강우는 평소의 강우가 아니었다. 외계어를 방불케 하는 대화 내용은 둘째치고 지금 강우의 표정이 그렇게 밝을 수 없었다.
‘강우는 저렇게 말이 통하는 친구가 필요했었나?’
순간 윤수아는 시무룩해졌다. 평소 강우랑 말이 잘 통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신만의 착각이었다. 강우는 그녀의 짐작보다 훨씬 독특했다. 강우와 어울리기에 자신은 너무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우울해졌다.
* * *
사이언스 페스타 둘째 날은 토요일이었다.
휴일이라 그런지 관람객이 어제보다 배 이상 늘어 전시장이 북적였다. 특히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관람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제야 과학 축제라는 실감이 났다.
오늘은 고곽천재 네 사람이 함께 뭉쳤다. 어제는 수업 때문에 오지 않았던 손차희마저 전시 부스에 와서 잡일을 거들었다.
“차희야, 학원 안 가?”
팀원도 아닌 사람에게 일을 시키자니 괜히 미안해진 강우가 물었다.
“학원 수업이 있긴 한데…… 안 갈래.”
“왜?”
“학원이 재미가 없어. 하루 빠진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예전의 손차희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반응이다.
“집에서 혼나지 않아?”
“요즘 학원 안 가겠다고 싸우는 중이야. 상관없어.”
강우가 짐작하기에 예전의 손차희는 학원 광신도였다. 그런 그녀가 학원에 다니지 않겠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강우야, 나 잠시 볼래?”
“어? 응.”
주변을 둘러보니 최대우는 한 무리의 여학생을 맞이해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고 윤수아는 갑자기 확인한 버그 때문에 노트북으로 프로그래밍 작업 중이었다.
잠시라면 자리를 비워도 문제없어 보였다.
어차피 갈 곳은 전시장 구석에 마련된 작은 카페뿐이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커피를 받아 작은 탁자에 앉았다.
“강우야, 넌 학원 어떻게 생각해?”
“음, 나야 주변에 학원이 없었고, 집안 형편도 그렇고…….”
강우의 시골집 이야기다.
“학원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 다만 학원은 공부 의지가 약한 사람을 강제로 시키는 의미가 있지.”
일반적으로 학부모가 자녀를 학원에 보내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학원에 가면 그 시간에는 공부할 테니까. 실상은 학원에 간다고 공부하는 건 아니지만.
현실에서는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고 싫어하면서도 공부는 해야 한다. 학생이라면.
학원은 강제적으로 공부에 시간을 투입하게 만든다.
사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싫어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다만 대부분 경우 학원처럼 강제적인 요인이 없이는 게을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게 학원의 타율적 습성에 길들어지게 되면 싫어도 본인의 의지 하나만으로 주어진 일을 완수하는 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수능 공부에서는 학원이 도움이 될지도 몰라. 내신에서도. 하지만 연구 활동은 다르지. 그래서 네가 공부의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또 효율을 어떻게 올리느냐에 따라 다를 거야. 정답은 없거든.”
강우의 대답이 길게 이어졌다. 목표를 대학 입시에 둔다면 학원이 유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후를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특히나 창의와 자율이 필요한 대학원 과정에서는 학원 경험이 오히려 독이 되기도 했다.
또 과학고는 시험 문제 유형이 특이해서 학원이 큰 역할을 하기 어려웠다.
물론 손차희도 많이 들은 내용이다. 단지 답답하니까 강우에게 확인했을 뿐.
“내가 학원을 그만두면 어떨까?”
“흠, 내가 보기엔 괜찮아 보여. 넌 열심히 하잖아? 오히려 학원에 얽매는 바람에 공부에서 활력이나 능동성이 떨어진다고 봐야 하나? 하여튼 주도적으로 학습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집에서는 학원이라도 다녀야 모르는 것을 물어보지 않겠냐고 하던데?”
“질문이야…… 학교 선생님도 있고 아니면 친구들도 있고…… 우리는 서로 잘 대답해주는 분위기잖아?”
“그렇긴 하지. 너한테 물어도 되고.”
손차희가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강우는 그녀의 결심을 엿볼 수 있었다. 아마 손차희는 기말고사를 준비하며 학원을 그만두게 될 것이다.
갑자기 윤수아가 걱정됐다. 윤수아는 손차희랑 같은 학원에 다녔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려나? 윤수아도 손차희를 따라 학원을 그만둘까?
“오늘 우리 담임 쌤 강연도 있는데 보고 갈 거야?”
“학원 째면 강연을 들을 수 있어.”
이곳 전시장에서 담임의 강연을 듣게 되다니! 강우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평소 수업하는 차도도를 많이 봤지만 많은 학생 앞에 선 그녀의 강연은 처음이다. 연단에 선 그녀는 꽤 멋있을 것만 같았다.
예전 손강우 시절 수없이 강연을 보거나 직접 했던 과거를 추억하고 있을 때였다.
“강우?”
“응? 아! 동훈이구나.”
“어? 차희도 있었네?”
남동훈이 커피를 마시러 다가왔다. 놀랍게도 남동훈과 손차희는 아는 눈치였다.
“둘이 아는 사이야?”
“아, 중학교 경시에서.”
대충 중학교 때 친한 사이는 아니어도 안면은 있는 사이라 했다.
“오늘 우리 담임 쌤 강연해. 들으러 와라.”
남동훈마저 탁자에 앉아 세 사람은 잡담하며 시간을 보냈다. 학생 때는 학교를 벗어난 장소라면 어디라도 즐거웠다.
* * *
차도도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대로에서 차가 막혀 꼼짝을 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일산 방향으로 강변북로를 타고 가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주차장이 됐다. 원래 통행량이 많은 도로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더 심해 보였다.
“사고가 났나?”
슬금슬금 가는 것도 아니고 이처럼 아예 멈춘 상황은 사고가 아니라면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냥 지하철을 타고 가는 건데…….”
갑자기 왜 차를 가지고 갈 생각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차도도도 그 이유를 안다. 이건 순전히 강우 때문이었다.
예전에 강우와 옷을 사러 갔다가 운전을 못 한다고 핀잔을 들은 뒤로 다음에는 제대로 운전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었다.
멀리 갈 일이 없어 차를 계속 처박아 두었다가 오늘 드디어 멀리 갈 일이 생겼다. 장소를 보니 지하철역에서 내린 후에도 어중간하게 걸어야 하는 위치다. 그래서 자신 있게 차를 몰고 나온 게 실책이었다. 이렇게 막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아, 미치겠네.”
차도도는 시계를 들여다봤다. 아직은 여유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막히면 방법이 없다. 강변북로 한가운데에 차를 놓고 갈 수도 없으니 꼼짝없이 지금 이대로 킨텍스까지 갈 수밖에 없다.
오늘 맡은 강연을 펑크낼 수는 없었다. 신뢰도 문제도 있고 강연을 들으러 온 학생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기 싫었다.
그녀 인생에 이렇게 곤란한 상황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어떻게 하지?”
시계를 볼수록 점점 초조해졌다.
약속 시각까지 도착하기 쉽지 않겠다고 생각한 차도도는 비상대책을 떠올렸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신새벽에게 전화했다.
“신 선생님!”
반가운 신새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전시장에 계시죠?”
대답이 들려온 순간 차도도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필이면 신새벽도 지금 전시장에 있지 않았다. 오늘 외부에 볼일이 있어서 잠시 나왔다나. 신새벽에게 부탁하려고 했더니 어렵게 됐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차도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굴려봐도 강연을 급히 부탁할 사람이 없다. 주최 측에 시간 내로 도착하기 어렵다고 연락해야 하는데…….
주최 측도 급하게 대체자를 찾기 어려울 테니 강연이 취소될 확률이 높았다.
차도도는 신경질적으로 차를 툭툭 쳤다. 재수가 없으려니…….
강연 시각이 점차 다가왔다. 이제는 날아가도 정시에 도착하기 어려워졌다. 그녀는 조수석에 던져둔 노트북에 시선을 던졌다. 저 노트북에 오늘 강연할 내용이 담겨 있는데…….
문득 노트북에서 한 사람이 떠올랐다. 어쩌면 해결책이 될지도 모르겠다.
* * *
강우는 갑작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네? 대신 강연하라고요?”
이건 대체 무슨 날벼락인지. 전화로 꼭 부탁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꼼꼼해 보이던 차도도가 어떡하다 이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하긴 차가 막히는 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고 때로는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물론 전생에서 수많은 강연을 경험했던 강우이기에 딱히 어려울 건 없었다. 다만 주최 측에서 허락해줄까? 고등학생이, 1학년이 하는 강연을 받아들여 줄까?
이것은 그의 능력과 상관없는 부분이다. 주최 측에서 허락해줄 리가 없다.
- 그건 선생님이 어떻게든 허락을 받아줄 테니까…….
전화기로 차도도의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도도는 강연을 대신할 다른 사람을 찾았다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부탁하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미 차도도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봐야 했다.
강우도 이런 일 때문에 차도도에게 문제가 생기기를 바라진 않았다.
“강연은 상관없는데…….”
- 이메일로 강연 ppt 보내줄 테니까 그거 살펴보고 모르는 거 있으면 연락해.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차도도의 목소리에서 다급함과 그를 향한 신뢰가 느껴졌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남이 제작한 자료를 보고 바로 강연하는 게 쉬울까. 이 난해한 일을 그가 할 수 있다고 확신한 차도도가 더 놀라웠다.
대체 얼마나 자신을 믿고 있는 건지……. 강우는 의외로 차도도가 그를 보는 시각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단순히 뛰어난 학생이라고 여겼다면 절대로 이런 부탁을 할 리가 없다.
그가 고민에 잠겨 있자니 다급한 차도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강우야, 꼭 해야 해. 다음에 내가 꼭 보답해줄게.
보답이라고 해봐야 기껏 데이트 한번 해준다는 말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