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페스타 강연 (2)
강우는 전시장을 돌아다니는 관람객을 훑었다.
친구들과 놀러 온 학생들이 무척 많았다. 저들 중에는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은 학생도 꽤 있을 것이다. 예전 손강우 시절에는 어린 꿈나무를 키우려고 강연회를 자청하기도 했었다.
한국대학교 박사라는 타이틀과 한설대학교 교수라는 직책은 자연스럽게 그를 여러 강연으로 이끌었다. 그만큼 보람도 있었다.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자 강우는 오늘 강연이 도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일이 그의 미래에 도움이 되는지 따지기보다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이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학생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야 한다. 오늘 강연을 계기로 과학자의 꿈을 한 사람이라도 품게 된다면 그만큼 뜻깊은 일이다.
“알았어요. 하는 데까지 해볼게요.”
- 고마워.
그의 승낙에 차도도의 음성이 한결 편안해졌다.
시작은 이메일 확인부터.
강우는 핸드폰으로 이메일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차도도의 ppt 파일이 도착해 있었다.
현재 전시장에는 윤수아가 노트북을 가져온 상황이다.
강우는 그녀의 노트북을 빌려 강연 자료를 확인했다.
- 물리학에 숨은 시계의 역사
다소 생소한 제목의 자료화면이 떴다.
해시계 물시계 이야기일까? 고대 시계 이야기인 줄 알았더니 근대 과학 이야기였다. 뉴턴과 핼리, 호이겐스를 비롯하여 익숙한 과학자들의 이름이 나왔다. 자료를 살피던 강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놀랍게도 이 내용은 예전 손강우 시절 과학전람회에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강연했던 내용과 비슷했다. 그때도 사이언스 페스타였었나? 기억이 가물거렸다.
우연의 일치일까? 차도도가 어떻게 이 내용을 선택했는지 모르지만 그에게 이 강연 내용은 너무나 익숙했다. 오래전의 강연이었으나 그 내용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이거라면 자료화면을 보지 않고도 할 수 있다.
“강우야? 이건 왜?”
“오늘 페스타 강연을 내가 해야 해서.”
“선생님 못 오신데?”
“늦으시나 봐.”
윤수아와 최대우는 놀라움 속에 우려를 표했다. 과연 강우가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그들은 강우를 믿고 돕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래도 넌 잘할 거야.”
손차희가 주먹을 흔들며 응원했다.
* * *
대략 오백 명이 수용되는 강연장은 학생들로 가득 찼다.
다행히 강우가 자료를 들고 주최 측을 찾았을 때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담당 실무자도 연사가 늦게 도착한다는 소식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덕분에 강우는 오히려 환대받았다.
다만 강우가 너무 어려 보이는 탓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하실 수 있죠? 강연 경험 있나요?”
“물론이죠. 학교에서 전교생 앞에서도 해봤습니다.”
강우 인생에서는 거짓말이지만 손강우 시절에서는 흔했다. 이런 강연은 그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학생이 대단하네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실무자가 ppt 자료를 강연장 스크린에 띄우며 부탁했다.
순식간에 준비를 마치고 시작 시각을 기다렸다. 그를 따라왔던 친구들도 청중석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되자 강우는 연단으로 나갔고 실무자가 그를 소개했다.
“이번 강연은 ‘물리학에 숨은 시계의 역사’라는 주제가 되겠습니다. 연사님은 고려 과학고의 강우 학생입니다.”
강우는 청중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예상외로 어린 강연자에 사람들의 반응이 제각각이었다. 어차피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강연의 질일 테니까.
오랜만에 청중 앞에 서니 가슴이 마구 뛰었다. 강우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강연을 시작했다.
“원래 고려 과학고의 차도도 선생님께서 강연하시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만 선생님의 사정으로 제가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강연 내용은 같으니까 재미있을 겁니다.”
실망한 관중의 표정이 느껴졌다. 강우는 관중석을 두리번거렸다. 중간쯤에 손차희를 비롯한 친구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권유성네 팀이 보였고 김선호 선생님마저 그들과 함께 있었다.
순간 강우는 차도도가 왜 김선호에게 부탁하지 않았는지 궁금했으나 지금은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니었다.
다른 쪽에는 이곳에서 사귄 친구, 남동훈과 중앙 과학고 학생들이 여럿 보였다.
예비 과학도인 그들의 모습이 똑똑히 눈에 들어오자 놀랍게도 긴장감이 사라지고 예전 손강우 시절의 기운이 넘쳤다.
“자, 여러분! 시계 아시죠? 손목시계든 핸드폰 시계든 하나씩은 들고 다니실 텐데요, 옛날에는 어떤 시계를 썼을까요? 해시계나 물시계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시계가 있었으나 근대에 접어들면서 주로 사용된 진자시계는 시계추의 움직임을 이용했습니다. 진자의 움직임이 진자의 무게와 무관하다는 원리를 발견한 사람은 갈릴레이였고 이를 시계에 응용했던 사람은 17세기 네덜란드의 유명한 과학자인 호이겐스였지요.”
강우는 흥미진진한 근대 과학사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크린에는 갈릴레이가 성당에서 발견했다는 진자의 원리 그림과 수식이 떴다.
“단진자의 주기는 길이와 중력가속도의 함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식이 나타나면 강연이 어려워진다. 하지만 강우는 쉽게 예를 들면서 수식을 말로 풀어냈다. 이 학생들은 초등학생이 아닌 중학생과 고등학생이고 과학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기에 대부분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는 난이도가 이들에게 적절하다고 확신했다. 이제는 더 재미있고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한다.
“이 진자시계에도 문제점이 있겠죠? 핼리는 남반구의 섬에서 하늘을 관측하다가 그곳의 진자 운동이 영국 런던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 원인이 중력가속도 차이 때문으로 지구 자전의 증거라고 해석한 사람이 바로 뉴턴이에요. 과연 천재답죠? 어쨌든 이때부터 사람들은 영국의 시계를 다른 나라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18세기 초, 유럽은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무역선이 대륙을 오가면서 거친 바다를 항해했다. 당시 뱃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지금 배가 항해하는 지점의 위치를 아는 방법이었다. 지금은 핸드폰에 장착된 GPS를 이용하여 누구나 쉽게 위치를 확인하지만 당시 이것은 아무도 해결하지 못하던 난제였다.
“……영국 왕실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자에게 현상금 2만 파운드를 겁니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수십억 원에 달하는 거금이죠. 이 심판을 당시 세계 최고의 과학자였던 뉴턴이 맡았습니다.”
돈을 탐낸 유럽 각지의 유명 과학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때는 바다에서 위치를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별을 관측하는 방법뿐이었다. 배 위에서 해와 별의 위치를 정밀하게 측정하면 위도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경도를 알아낼 방법은 없다. 시각을 모르기 때문이다.
“당시 최고의 천문학자가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죠. 독일의 천문학자 마이어는 자신이 고안한 달 위치 계산표로 배의 위도와 경도를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방법은…….”
강우는 당시 사람들이 활용하던 방법을 쉽게 설명했다. 배를 타고 대양을 쏘다니던 뱃사람들이 해와 별의 위치를 이용하여 배의 위치를 추정하던 원리를 세심하게 풀어냈다. 청중들은 어렵지 않게 그 원리를 이해했다.
“자, 느낌이 어떤가요? 조금 쎄하죠? 이 복잡한 방식을 뱃사람들이 쉽게 활용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게다가 당시의 뱃사람들은 노를 저어서 힘이 셌을지 몰라도 얼마나 무식했습니까? 사실상 적용이 어렵죠.”
스크린의 자료화면이 넘어갔다.
“……여러분은 똑똑하니 이해하셨죠? 이 방식의 열쇠가 바로 시간이란 것을요. 이 방식을 적용하려면 배가 영국을 떠나고 몇 시간 지났는지 알아야 했죠. 며칠이 아니라 시간, 분, 초까지 정확하게요. 그런데 이게 진자시계로 가능할까요? 폭풍이 불어 배가 뒤집힐 판에 추시계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잖아요?”
이때부터 세기의 대결이 시작된다. 세계 최고의 천문학자와 무식한 목수의 한판 대결이다.
천문학자 마이어는 2만 파운드를 벌기 위해 무려 10년 동안 영국과 인도를 오가며 자신의 방식을 검증했다. 뉴턴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동료인 마이어를 지지했다.
이때 다른 방식을 들고나온 사람이 있었다. 바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라고는 다녀본 적이 없는 해리슨이란 인물이다.
그는 이 문제의 핵심을 꿰뚫었다. 그리고 새로운 시계를 고안하게 된다. 그는 기존의 추시계를 대신해 용수철 진동을 이용한 시계를 만들었다. 정교한 부품을 깎고 만드는 자신만의 장점을 십분 활용했다. 바로 현대 회중시계의 발명이다.
이전까지 사용된 시계는 무게 50kg에 크기가 1m를 넘는 대형이었다. 이것을 해리슨은 무게 3kg에 크기 10cm로 바꿨다.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강연을 계속하면서 강우는 청중들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처음에 어린 그를 보고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금방 그의 연설에 빠져들었다. 차도도가 만들어준 ppt 영상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데 한몫했다.
학생들의 반짝이는 눈빛에서 강우는 미래의 과학도들이 가슴에 품은 꿈과 호기심을 읽었다. 저 학생들이야말로 이 나라를 빛낼 꿈나무였다. 비록 지금은 강우 본인도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한때 이 나라를 대표하던 과학자로서 그는 저들을 이끌 의무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훗날 이 나라의 발전은 바로 저 학생들에게 달려 있다.
그렇기에 강우는 그들의 눈빛에서 벅찬 공감을 확인했다.
천재 과학자들의 이야기는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인류의 문명이 발전했고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리며 윤택하게 살고 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물 가운데 과학이 적용되지 않은 것이 있을까.
강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저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오늘 이 강연 내용은 학생들을 과학으로 이끌 토대가 되어줄 것이다.
강우는 희열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강연을 계속했다.
“……당시의 과학자들은 천문학자가 아니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일개 목수에 불과했던 해리슨의 해법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요. 그래서 해리슨은 이 시계의 유용성을 항해를 통해 스스로 증명합니다.”
정부에서는 마이어와 해리슨 두 사람에게 각각 1만 파운드씩 상금을 나누어 주게 된다.
마이어의 방식에 비해 자신의 방법이 월등하다고 확신한 해리슨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해리슨은 영국 정부와 십여 년에 걸친 지루한 법정 다툼을 벌이게 된다.
해리슨은 이 다툼을 과학자로 대변된 지식인 집단과 일자무식인 비지식인과의 싸움으로 간주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후에 그는 약속된 상금 2만 파운드를 전액 받게 된다.
강우는 이 강연에서 과학과 기술의 위대함을 전했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기존의 관념에 매몰되어 진실을 외면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과학은 인류의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앞으로도 과학은 끝없이 발전할 것이고 그 영향으로 인류는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강우의 말 하나하나가 모두에게 울림을 줬다. 그의 몸짓 하나에 청중의 표정이 달라졌다. 과학에 관심 있던 학생들은 그의 강연에서 큰 감동을 얻었다.
그를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들이 초롱초롱 빛났다.
강우는 정말 오랜만에 예전 손강우가 느꼈던 벅찬 그 감동을 다시 접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은 그때의 손강우로 다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 강연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미래의 이 나라를 빛낼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 그들에게 한 줌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강연을 마친 강우는 청중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감동에 빠져 마무리를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학생들은 일순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강연장은 고요에 잠겼다.
다음 순간.
짝짝짝-
우레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마치 어두운 공간이 확 밝아진 것처럼 주위가 열기로 가득 찼다.
“와아!”
그 환호성을 들으며 강우는 연단을 내려왔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의 강연에 스스로가 몰입해버린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