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68화 (68/325)

제68화 페스타 강연 (4)

킨텍스 전시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호수가 보이는 공원이 있다.

강우는 차도도와 함께 호숫가를 걸었다. 주말이라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가 즐거운 표정이다.

“강연은 어땠어?”

“할만했어요.”

강우는 차도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탁 트인 정경이 가슴의 답답함을 풀어주었다.

“곤란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는데…… 내 예상보다 훨씬 잘해줘서 고마워.”

“뭘요, 덕분에 저도 재밌었는데요.”

다소 의례적인 대화가 오갔다.

처음 차도도에게서 부탁받았을 때는 조금 짜증이 났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예전의 강연 경험을 살려 학생들에게 좋은 경험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했다.

후반부에는 스스로 강연에 취해 조금 무리했던 것 같지만. 어쨌든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언제 오셨어요?”

“중간쯤에.”

“별로 못 들으셨겠네요.”

“다 들은 거나 마찬가지야. 네 모습을 보니 저절로 막 연상되더라.”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았다. 주변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강우는 그동안 머릿속을 간지럽히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쌤. 그 강연 주제…… 어떻게 고르신 거예요?”

“왜? 특별한 내용은 아니잖아? 특별한 주제였다면 맡길 수 없었겠지.”

“그냥…… 궁금해서요.”

차도도는 과거를 떠올리는 듯 먼 곳을 바라봤다.

“내가 딱 너만 했을 때…… 고등학생 때 이 내용으로 강연을 들었던 적이 있었어. 그때 무척 감명을 받았거든. 그 강연이 나를 과학의 세계로 이끌었고 나도 그렇게 학생들에게 과학의 꿈을 키워주고 싶어서 과학 선생님이 됐어. 그 강연을 잊을 수가 없어서 오늘 같은 주제로 강연할 생각이었는데…… 네가 잘 해줬어.”

“음, 그때 그 강연자가 누구였는지 기억하세요?”

“아니, 이름은 잊었고 얼굴도…… 이젠 모르겠어. 단지 무척 잘생긴 사람이었다는 기억만. 한동안 그 사람이 무척 좋았었는데…… 내가 과학의 길을 걸으면 그 사람을 다시 만나리라 생각했었는데……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만나겠어?”

강우는 차도도의 경험과 손강우의 경험이 일부 겹치는 기분을 느꼈다.

‘설마 그 내용을 강연한 사람이 한둘이겠어?’

차마 더 자세하게 물어볼 수 없었다. 그때의 강연자가 손강우였어도 달라질 게 없고 아니라고 해도 달라질 게 없었다. 그냥 조그만 가능성이 남았다고 홀로 간직하며 가슴 속에 묻었다.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는 듯 차도도는 호수에 시선을 고정했다.

강우는 그런 차도도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때 그 강연자가 손강우였다면 좋을 텐데. 대학생이었던 차도도와 만날 수 있었다면 그 인연이 남달랐을 텐데.

지금도 어리게 보이는 그녀이니까 대학생 시절의 모습도 지금처럼 예뻤을 것이다.

“어쨌든…… 고마웠어. 오늘 내 부탁을 들어줬으니까 다음에 나도 네 부탁 하나는 꼭 들어줄게.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하렴.”

“알았어요.”

소원 하나를 남겼으니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또 걸을까?”

차도도가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전에 영화를 보고 밥을 먹던 시간도 즐거웠지만, 오늘처럼 차분하게 호숫가를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 * *

전시장은 마지막 날인 일요일에도 붐볐다.

마감 예정 시간은 오후 5시. 그날은 전시품을 다시 철거해야 하기에 관계자들마저 북적였다.

이날 마지막 시간에는 과학동아리에서 출품한 작품 가운데 최우수상을 비롯한 우수상 10작품을 선정하여 상금을 수여하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주최 측에서 선정한 심사단과 방문객들의 투표를 합쳐서 순위를 결정했다. 이를 위해 첫날부터 방문객은 전시장을 나가면서 쪽지에 좋았던 작품을 복수로 선정해서 투표함에 넣었다.

당연히 전시일 동안 매일 출근했던 강우도 투표에 참여했다. 그때마다 고려 과학고에서 출품한 작품에 투표했다. 팔은 안으로 굽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오늘도 투표했어?”

5시가 되어 가자 윤수아가 물었다.

“당연히 했지. 너는?”

“나도 했어.”

윤수아가 피식 웃으며 자신이 투표한 내용을 공개했다. 물론 그녀가 찍은 작품도 강우와 다르지 않았다.

“우리 거 찍으면 반칙 아니야?”

“반칙은 무슨. 모두가 다 그러는데.”

강우는 윤수아와 함께 깔깔 웃었다. 이 즐거운 시간도 잠시 후면 막을 내린다.

“강우야, 유성이네 것도 투표해줬어?”

여러 작품을 찍을 수 있기에 윤수아에게 가장 궁금한 점이었다. 강우와 권유성은 출품작으로 경쟁 중이어서 정상이라면 강우가 권유성의 작품을 밀어줄 리 없었다.

“찍었어. 내가 투표한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과연 넌 특이해.”

윤수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강우가 권유성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둘이서 노닥거리고 있자니 방송이 나왔다.

- 잠시 후 관람객이 투표한 인기 순위를 발표하겠습니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연구 작품은 모두 321개로 전년보다 5% 증가하였고…….

긴장한 가운데 잡다한 설명이 이어졌다. 전국에는 고등학교가 대략 3천 개가량 있고 중학교 동아리에서도 출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러 작품을 출품한 학교도 있기에 딱히 많다고 볼 수 없었다.

고려 과학고에서는 모두 다섯 작품을 냈고 경쟁학교인 중앙 과학고에서도 네 작품이 나왔다. 지방의 어떤 과학고는 열 작품을 내기도 했다.

- 인기 순위 30위부터 발표하겠습니다. 30위 한돌 고등학교의 ‘생명체 항원 항체 반응 연구’, 29위 김해제일 고등학교의…….

여러 학교가 쭉 호명됐다. 18위에서 처음으로 고려 과학고가 걸렸다. 신새벽이 지도를 맡은 팀이었다. 10위까지 발표했음에도 강우네 출품작은 호명되지 않았다.

- 5위에는 중앙 과학영재고의…….

남동훈네 팀이 호명됐다. 중앙 과학고에서는 가장 높은 성적이었다.

이어서 4위와 3위를 다른 과학고에서 차지했다.

윤수아가 달달 떨며 물었다.

“둘 남았는데…… 우리도 유성이네도 안 불렀지?”

“아직. 아마 우리가 1등일 거야.”

“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떨리지도 않아?”

“3일 전시하는 내내 우리 부스에 사람이 제일 많이 왔다 갔잖아?”

사실 강우네 작품이 볼거리가 제일 많았다. 월면 모형 전시가 사람들의 관심을 직관적으로 끌었고 달에서 해가 뜨고 지면서 음영이 지고 사라지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만들었기에 볼거리도 많았다.

그들에 비하면 다른 부스에서는 어려운 과학 이론을 설명한 작품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강우는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 인기투표 2위 작품은 고려 과학영재고의 ‘하늘에 그려지는 태양의 춤’입니다.

역시 권유성 팀이 2위였다.

그 순간 윤수아와 최대우는 자신들의 작품이 30위 이내에도 들지 못한 게 아닌가 걱정했으나 강우는 1등을 확신했다.

- 인기투표 1위 작품은 고려 과학영재고의 ‘코페르니쿠스 크레이터의 새벽’이 되겠습니다.

“와아!”

여기저기에서 함성이 일었다.

그 순간 강우는 윤수아, 최대우와 함께 뒤엉켰다. 1위를 예상하긴 했으나 실제 발표를 들으니 더 감격스러웠다.

그들의 옆에서 손차희가 축하했고 차도도와 김선호도 환호성을 지르며 격려했다.

- 인기투표 순위를 발표했습니다. 최종 순위는 인기투표 점수에 심사단 평가 점수를 반영하여 선정합니다. 최우수상에 한 작품, 우수상에 아홉 작품입니다. 이번에는 최우수상부터 먼저 발표하겠습니다.

심사단은 전시 첫날에 전시장을 돌아다녔던 VIP 무리를 뜻했다. 교육부 차관이 점수를 매겼는지 아니면 함께 돌아다녔던 대학교수들이 평가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그날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기에 강우는 수상을 자신했다.

“으아! 너무 긴장돼!”

최대우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간신히 긴장을 풀었고 윤수아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부스 앞을 왔다 갔다 했다.

정작 강우는 부스 앞 안내 의자에 차분히 앉아 조용히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강우는 긴장도 안 되나 봐?”

차도도의 목소리에 강우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고 빙그레 미소를 보냈다.

“이럴 때 보면 완전히 애늙은이라니까.”

차도도가 못 말리겠다는 듯 손을 저었다.

- 올해 사이언스 페스타 최우수 작품은 고려 과학영재고에서 출품한…….

잠시 방송이 멈췄다. 고려 과학고 작품이 인기 순위에서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기에 쉽사리 예상하기 어려웠다.

강우는 저쪽에서 자신을 탐색하는 권유성에게 미소를 던졌다. 찔끔한 권유성이 시선을 홱 돌렸다.

그렇게 시선 싸움을 하고 있을 때 방송이 이어졌다.

- 최우수 작품은 ‘코페르니쿠스 크레이터의 새벽’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와아!”

강우네 부스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이것으로 몇 달에 걸친 노력을 보상받았다. 강우와 윤수아, 최대우는 이 과제연구를 위해 상당히 많은 시간을 투입했다. 월면 사진을 찍으려고 해당 시각에 천문대에서 대기했고 새벽에도 관측을 나가야 했다.

관측 결과를 정리하고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자투리 시간을 과제연구에 투입했다. 또 학교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았던 월면 모형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강우는 이 모든 연구를 이끌어준 지도교사 김선호에게 가장 먼저 머리를 숙였다.

“고생했다.”

김선호가 팀원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격려했다.

방송에서는 우수상 아홉 작품이 순서 없이 호명됐다. 권유성네 출품작도 당연히 들어갔고 중앙 과학고의 남동훈 팀도 상을 받았다. 신새벽이 지도한 팀은 아쉽게도 수상 명단에 없었다.

- 수상작을 출품한 학생들은 주최 본부로 오시기 바랍니다.

“강우야! 가자!”

윤수아가 환한 미소를 짓고 모두를 재촉했다.

최대우와 함께 강우가 그녀의 뒤를 따랐을 때 권유성이 옆에 붙었다.

“으아! 분하다!”

“이제 형이라 부르지?”

“아직 아니야! 학교에서 평가가 남았어!”

“학교에서 이 결과를 뒤집기 쉽지 않을걸?”

강우와 권유성은 가는 길에도 서로 으르릉댔다. 윤수아가 중간에서 나선 뒤에야 두 사람의 유치한 말다툼이 사그라들었다.

한 작품당 서너 명이었기에 꽤 많은 학생이 주최 본부 앞에서 북적였다.

“우와! 트로피다!”

본부 앞 탁자에 쭉 늘어선 트로피를 보며 최대우가 환호성을 질렀다. 종이로 된 상장 하나보다는 트로피 쪽이 더 있어 보이긴 했다.

“호명하면 대표가 나와 트로피를 받아 가세요. 또 상금이 지급될 계좌번호를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상금은 제세공과금을 제외하고…….”

“젠장! 이런 데서도 세금을 떼는구나!”

강우는 이를 벅벅 갈았다.

“대표는 내가 나갈게.”

윤수아가 자원했다. 사실 윤수아가 프로그램을 작성하느라 가장 고생했으니 그녀가 받는 게 옳다고 강우는 생각했다.

이번에도 최우수상이 제일 먼저 호명됐다. 윤수아가 트로피를 들고 활짝 웃는 모습을 강우는 사진으로 남겼다. 나중에 부스로 돌아가서 셋이 함께 트로피를 들고 기념촬영을 할 생각이었다.

강우는 권유성이 트로피를 받을 때도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모든 수상이 끝난 후 주최 본부 대표가 앞으로 나왔다.

“원래 계획된 상은 여기까지입니다만 관람객의 추천으로 긴급하게 새로운 상을 추가했습니다. 관람객이 남긴 후기에 무척 자주 언급된 한 분이 있습니다. 주최 측에서는 그분에게 사이언스 페스타 특별상을 수여하기로 했습니다.”

예정치 않은 발표에 모두의 궁금증이 더해졌다. 이렇게 학생들을 모은 후 특별상을 공표하는 것은 이 가운데 그 상을 받을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후기에 이런 방문 소감이 많았습니다. ‘이번 페스타 방문이 인생의 전환기를 마련해 주었다.’, ‘과학이 이렇게 흥미로운 줄 처음 알았어요.’, ‘과학의 꿈을 키워준 그 사람이 너무 고맙습니다.’ 이런 반응이었습니다. 그분은…….”

대표의 시선이 학생들을 쭉 살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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