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수학 올림피아드 1차 (5)
강우는 손차희의 의도를 금방 알아챘다.
이민찬과 권유성의 다툼에 굳이 그를 끌어들일 손차희가 아니다. 분명히 다른 뜻이 있었다. 역시 권유성이 강우를 비꼬았다.
“강우는 1차 시험도 망쳤잖아? 그런 녀석이 최종 시험 문제를 어떻게 풀어?”
주변을 둘러싼 모든 학생이 새삼 강우를 놀라운 눈으로 쳐다봤다. 강우는 중간고사에서 유일하게 수학을 만점 받은 학생이다. 그런 강우가 1차 시험에 도전했기에 모두 그 성적이 궁금했다. 그런데 1차 시험조차 통과하지 못했다니.
그러잖아도 갑자기 두각을 드러낸 강우였기에 학생들은 강우의 본 실력이 들통났다고 생각했다.
“호오, 그래? 1차 엄청 쉬웠는데? 1차를 떨어져?”
이민찬이 강우를 깔보는 눈으로 흘겨보며 물었다.
학생들은 강우가 1차 시험을 응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날 고사장 입실 때 봤고 퇴실 때 봤으니 당연히 시험을 쳤다고 생각했다. 강우가 윤수아 때문에 시험을 치지 못했다는 사실은 윤수아가 알려준 권유성이 유일했다.
그런 권유성이 내용을 쏙 빼고 결과만 언급하니 모두가 오해한 것이다.
윤수아가 나서서 해명하려 하자 강우가 서둘러 그녀의 팔을 잡았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1차 시험에 떨어졌는데 해명한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그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최종 시험 문제를 풀어 실력을 증명하는 게 유리하다. 강우는 판을 깔아준 손차희의 속셈을 이해했다.
“최종 문제였어? 그 문제 별로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강우가 이민찬과 권유성의 자존심을 확 건드렸다.
권유성이 바로 소리 질렀다.
“쉬우면 얼른 풀어봐! 너희 둘 다 절대 못 풀어!”
“내가 당장 풀어줄게. 이런 문제는 껌이야!”
이민찬도 씩씩대면서 백지를 건네받은 다음 문제를 풀려고 집중했다.
이런 녀석을 제풀에 넘어지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강우도 탁자에 앉아 여유롭게 백지 한 장을 받았다.
“흐음, 무슨 문제인데 그러지?”
그는 느긋하게 권유성이 제시한 문제를 읽었다. 마침 그가 좋아하는 대수학에서 n개의 근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문제였다. 이런 유형의 문제는 예전에 수학 시간에 다루었던, 방정식의 근의 존재 증명을 조금 비틀었을 뿐이다. 물론 그의 눈에는 조금이지만 다른 학생의 눈에는 완전히 다른 문제나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의 시선이 그와 이민찬에게 쏟아졌다.
이민찬은 문제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끙끙대고 있었고 권유성은 당연히 못 푼다는 표정으로 둘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뒤에 학생들 사이에 섞여 정명욱이 그들의 대결을 흥미롭게 주시했다.
강우는 피식 웃으며 펜을 잡았다.
“이건 말이지…….”
그가 입을 열자 이민찬과 권유성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거 아닌 문제처럼 보이지만…….”
쓱쓱-
강우는 손을 놀려 백지에 수식을 쫙 나열했다.
힐끔 이민찬을 쳐다보니 ‘이게 별거 아닌 문제라고?’ 하는 놀라움이 얼굴에 담겨 있다.
반면 권유성은 ‘거기까지는 나도 풀었어.’라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 문제의 진정한 묘미는 여기부터야. 일반적인 접근법으로는 증명이 안 되거든. 그래서 이 항을 변환하면…….”
쓱쓱-
강우는 거침없이 수식을 전개했다.
구경하던 학생들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당연히 대부분 학생은 지금 강우가 푼 수식이 맞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분위기에서 강우가 이 문제를 단번에 풀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알았다.
“변환된 항의 모양을 살펴보면…….”
강우가 간략하게 설명을 덧붙이면서 증명을 계속했다.
권유성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자신은 시험 시간 내내 고심하고도 해법을 찾아내지 못했는데 강우는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해결책을 찾아내서였다.
이민찬은 더 참담했다. 아직 문제의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강우가 문제를 보자마자 바로 풀어버렸으니 더는 문제를 풀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의 소음이 거슬리면서 허탈감과 패배감이 심신을 지배했다.
“으으…….”
신음을 토한 이민찬이 부들부들 떨다가 강우를 멍하니 쳐다봤다.
예상했던 반응을 목격한 강우는 반쯤 조롱 어린 미소를 보내면서 증명을 마무리했다.
“자, 이렇게 하면 깔끔하지? 아마 이 문제를 푼 학생은 거의 없을걸? 이렇게 풀면 국가대표에 바로 선출될 수준이니까.”
마치 자신은 국가대표와 동등한 실력을 지녔다고 과시하는 강우의 주장에 권유성이 이를 박박 갈았다.
놀라는 학생들의 표정을 즐기면서 강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로 어려운 문제도 아니네. 그만 간다.”
강우가 손차희를 비롯한 고곽천재를 끌고 저쪽으로 사라졌다.
“저 자식 뭐냐?”
“1차도 떨어졌다는데 최종을 어떻게 풀어?”
“근데 이거 맞게 푼 거야?”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이민찬은 아예 풀지도 못했고 권유성도 답을 제대로 몰랐기에 강우가 맞게 풀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학생들의 시선이 수학교사인 정명욱을 향했다.
지금까지 사태를 지켜만 보던 정명욱이 앞으로 나서서 강우가 쓴 답지를 훑었다.
“제대로 풀었군. 딱 핵심만 찍어서.”
정명욱의 선언에 학생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와아! 괴물이다!”
강우가 학생들 사이에서 수학 천재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권유성과 이민찬의 실력이 워낙 유명했기에 그들을 누른 강우의 실력은 더욱 높이 평가받았다.
학생들이 방금 본 장면을 이야기하며 식당에서 해산했다.
정명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확실히 괴물이 맞군. 그런데 1차에서 왜 떨어졌지?”
1차에서 떨어졌다면 도무지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였기 때문이다.
* * *
마지막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람은 이민찬뿐이었다.
그는 다른 학생이 떠난 후까지 자리에 앉아 거의 손을 대지 못한 백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살펴보다가 한숨을 쉬고 사라진 정명욱마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학생들이 모여 왁자지껄했던 식당 안은, 특히 그가 앉은 탁자 주위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가, 강우 그 자식이…….”
오늘 상황은 다소 복잡했다. 결과만 보면 강우는 문제를 풀었고 그는 못 풀었다. 강우에게 그가 패배했다. 그 와중에 권유성과 손차희가 개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태를 권유성과 손차희가 의도적으로 유도한 것 같았다. 덕분에 그는 모든 학생 앞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했다. 그가 실력이 있고 없고는 차후의 문제였다.
이제는 모두 강우가 그보다 더 천재라고 여길 것이다. 지금까지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항상 최고를 유지했던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차희가 일부러 강우를 끼워 넣었어.”
다시 상황을 머릿속으로 복기해보다 보니 분명하게 드러났다. 애초에 자신은 손차희를 엮을 생각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강우가 대신 문제를 풀고 있었다.
“게다가 강우 그 자식은 미리 문제를 풀어봤던 게 확실해. 아니면 그 자식 수준에서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보자마자 풀어? 이건 수학 천재라도 불가능해.”
이민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아! 차희에게 당했군.”
이민찬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편의점에서 산 커피를 쭉쭉 빨았다. 얼음이 들어 차가워야 할 커피는 얼음이 녹아 밍밍해져 있었다.
“아이씨! 커피는 또 왜 이래?”
그는 신경질적으로 커피를 내던졌다. 일회용 커피 컵이 식당 바닥에 떨어지며 커피가 바닥에 얼룩졌다.
이민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늘 받은 이 모욕을 갚는 방법은 기말고사에서 손차희는 물론이고 강우까지 이기는 것이었다.
“이번 시험에선 반드시 1등하고 만다!”
이민찬은 굳건하게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강우 때문에 흔들린 그의 자존감을 회복하기 쉽지 않았다.
* * *
고곽천재는 세미나실에 모여 평소처럼 공부를 계속했다.
손차희가 강우에게 감사를 표했다.
“강우야! 멋있더라! 이민찬이 당황하니까 속이 후련했어!”
“나도 그랬어!”
윤수아는 손차희와 같은 편이기에 당연히 그녀와 감정을 공유했다.
다만 최대우는 반응이 달랐다. 그는 조금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강우야, 그런데 그 문제를 어떻게 풀었어? 난 생각도 못 했는데.”
“예전에 다뤘잖아? 수업 시간에.”
강우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다룬 3차, 4차 방정식 근의 증명과 오늘 푼 문제는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문제는 교과 과정과 관련 없기에 강우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자! 오늘 강우가 수학 천재임을 증명했으니까 앞으로 이민찬도 강우를 다르게 보겠지. 우리는 기말고사나 준비하자. 중요한 건 기말고사니까.”
손차희가 상황을 정리했고 평소처럼 각자 공부할 교재를 꺼내 펼쳤다.
강우는 신새벽을 떠올리며 화학책을 꺼냈고 윤수아는 수학을, 최대우는 물리책을 꺼냈다.
정작 손차희는 긴 머리를 매만지며 다이어리를 펼쳤다.
“기말이 얼마 안 남았잖아?”
다이어리에는 날짜별로 공부할 과목과 범위가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역시 차희는 달라.”
윤수아는 완벽한 계획에 감탄을 연발했다.
강우는 손차희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도 무계획적으로 공부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처럼 완벽하게 계획을 세우고 공부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때로는 자세한 계획이 독이 된다지만 그래도 계획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편이 더 낫다.
“학원은?”
“지난 주말에 정리했어. 내 중간고사 성적이 워낙 안 좋아서 부모님도 허락하셨어. 물론 기말도 성적이 나쁘면 다시 다닌다는 조건이었지만.”
손차희의 얼굴에 자신감이 보였다. 중간고사 이후 볼 수 없던 자신감 어린 표정이었다. 이는 손차희가 다시 제 페이스를 찾았음을 의미했다.
강우는 손차희의 계획표를 찬찬히 참고했다. 과연 꼼꼼한 손차희다. 이렇게 공부해왔으니 중학교 시절 내내 최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 자신을 평가해보니까…… 나는 내신을 잘 받아서 대입을 노리는 게 맞겠더라고. 권유성이나 강우처럼 경시나 R&E 성과로 밀어붙이기엔 부담이 너무 많아. 그래서 이번 기말고사에 사활을 걸 생각이야.”
강우는 손차희의 머리 위에 뜬 잠재력을 다시 확인했다. 아쉬워도 미래의 결과를 생각하면 그녀의 방법이 옳다. 그녀는 S급 능력자가 아니니까. 전 과목을 골고루 잘하는 우등생이니까.
계획을 제대로 세우고 실천하는 데 도가 튼 손차희이기에 이번 기말에서는 확실하게 부활할 것이다.
“강우 넌?”
손차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강우에게 물었다. 예전에 강우가 내신에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한 것을 기억해서다.
강우는 지난 중간고사에서 놀라운 성과를 얻었고 한편으로는 페스타에서도 뛰어난 실적을 올렸다. 내신과 과제연구 양쪽 모두에 치중할 수 있는 상황이다. 물론 과학고에서의 치열한 경쟁을 생각하면 양쪽을 모두 잘할 수 있을 만큼 녹록지 않다는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난 기말고사에 연연하지 않을 생각이야.”
강우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기말고사를 왜?”
“포기는 아니고 지난 중간고사처럼 악착같이 하진 않으려고.”
중간고사 성적만 본다면 아쉽지만, 강우가 평소 보여준 천재성을 떠올리면 이해가 되긴 했다. 특히 유학을 준비한다면.
“그렇다면 KMO 1차 시험을 놓친 게 너무 타격이 큰데?”
“기회는 또 오니까 상관없어. 어쨌든 기말고사는 적당히 욕먹지 않을 정도로 칠 생각이야.”
KMO 1차 시험은 당장 길이 막혔어도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니까. 물론 최악의 경우에는 1년을 기다리면 된다. 어차피 국제 올림피아드를 염두에 두고 천천히 준비할 생각이었다.
기말고사에 치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모두의 얼굴이 밝아진 기분이 드는 것은 괜한 의심일까. 어쨌든 강우는 자신의 존재로 친구들의 앞길을 막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낄낄 웃는 강우의 핸드폰에 톡이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