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기말고사 (1)
다행히 윤수아로 인해 줄을 선 학생들이 잠시 물러났고, 강우도 햄버거를 먹을 수 있게 됐다.
햄버거를 한입 가득 베어 물고 콜라를 들이켜자 살 것 같았다. 야밤에 먹는 햄버거가 이렇게 맛있는 줄 처음 알았다.
주변 학생들의 부러운 눈초리가 꽂혔다. 대부분 항상 배달하는 치킨과 피자였기에 햄버거는 단연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아마 내일 밤에는 이 햄버거집이 대박 날 것이다.
햄버거를 입에 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순식간에 그것도 두 개나 먹어 치운 최대우가 자리를 정리했다.
“어? 벌써 들어가려고?”
“바빠서.”
“내일 수학인데 뭐가 바빠?”
“수학 때문이 아니고…….”
최대우가 말끝을 흐렸다.
강우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인지 눈치챘다.
“블로그 때문에?”
“응.”
시험 기간이 되자 물리 문제풀이 센터도 덩달아 바빠졌다. 시험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문제가 생긴 학생들이 올린 질문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문제를 핸드폰으로 찍어 올릴 수 있어 방문자가 넘쳐났다.
질문한 문제 대부분은 중고등학교 시험 문제로 매우 평이했다. 하지만 일일이 풀어서 답을 올려야 하는 최대우에게는 의외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최대우는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기초적인 문제에도 모두 답을 올려주고 있었다.
거기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방문객의 질문도 늘어났으니 그 부담이 상당했다.
강우가 대우를 붙잡았다.
“대우야, 그렇다고 네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잖아? 블로그는 어디까지나 여유 있을 때 운영하는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답을 기다리며 마음 졸이고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면 괜히 신경이 쓰여서…….”
질문을 올린 학생들도 시험이 임박한 시기라 다급하긴 마찬가지란 뜻이다.
“으이구, 착한 놈.”
강우는 한숨을 쉬며 블로그를 확인했다. 역시나 댓글에는 블로그 운영자를 찬양하는 댓글이 넘쳐났다.
- 물리싫어 : 이 블로그 덕분에 문제 해결했어요. 감사합니다.
- 마포중딩 : 숙제 잘했어요!
- 한주먹 : 작년 기말고사 문제 던진다. 내일까지 풀어줄 거지?
- 공부벌레 : 문제가 안 풀려요. 도와주세요!
- 한강가자 : 숙제 끝! 물리 센터 만쉐이! ㅋㅋㅋ.
- 맛있는수박 : 운영자는 시험 안 쳐요? 시험 치면 백점!
SNS는 중독성이 있다. 답변을 올리면 호응하는 댓글이 달리니까 신이 나서 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 최대우는 당장 내일 시험이 급한 상황이었다.
“대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래도 내일 수학 시험이 더 급해.”
“나도 알아.”
최대우가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사태의 책임이 강우에게도 있기에 외면할 수 없었다.
“시험 기간에는 내가 처리할게.”
“내가 해야 하는데…… 내가 맡은 일이니까.”
“괜찮아. 욕먹지 않을 정도로 처리할게. 넌 시험 끝나고 다시 신경 써.”
강우는 웃으며 최대우를 달랬다.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조금 늦게 알아챈 감이 있다.
일어서려던 최대우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강우는 자신의 몫으로 남은 감자튀김을 최대우에게 건넸다.
분위기가 좋아졌다.
강우는 마지막 햄버거 조각을 입에 물고 다음 질문을 받았다.
* * *
식당 구석의 다른 탁자에는 이민찬네 무리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앞에 푸짐한 피자를 놓고 각자 피자 한 조각을 들고 맛나게 먹었다.
한 녀석이 이민찬에게 노트를 내밀었다.
“이렇게 풀어주던데?”
이 녀석은 조금 전에 강우에게 가서 질문했던 학생이었다.
이민찬은 피자에 딸려온 콜라를 빨대로 쭉쭉 빨면서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신기하게 잘 풀었네. 이걸 보자마자 풀었다고?”
사실 강우에게 질문한 문제는 이민찬이 며칠째 고생하던 문제였다. 대충 풀기는 했는데 너무 계산이 복잡해서 더 간단한 풀이법이 있는지 고민했었다.
그가 생각해낸 계책은 바로 강우에게 물어보는 것. 강우가 풀어주면 간편 풀이 방법을 알아서 좋고 풀지 못하면 강우의 실력을 알아서 좋다. 다만 자신이 직접 묻기에는 껄끄러웠기에 친한 동료를 보냈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그가 며칠간 고민한 문제를 강우는 훨씬 쉬운 방법으로 금방 해결했다. 완벽한 그의 패배였다.
“정말 신기한 녀석이야…….”
강우는 중간고사에서 그를 앞섰다. 그렇기에 이번 기말고사의 목표를 자연스럽게 강우를 이기는 것으로 두었다. 수석 입학했기에 기말고사에서는 그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
내신은 학기 단위이고 중간고사 기말고사 합산이다. 수학과 물리 기말고사를 잘 쳐서 합산해서 1등을 한다면 완벽한 1등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번 시험에 임하는 이민찬의 각오도 남달랐다.
다만 지금 강우의 풀이법을 보니 알 수 없는 아득한 벽이 느껴졌다.
문득 며칠 전에 벌어졌던 소동도 생각났다. 권유성이 내민 올림피아드 최종 문제를 그는 손도 대지 못했다. 그런데 강우는 곧바로 풀었다.
‘어쩔 수 없는 실력 차인가…….’
태연한 척하면서도 허탈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을 이토록 압도하는 존재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같은 반이 아니니 얼굴 마주칠 일이 별로 없어서 견딜 만했다. 손차희처럼 같은 반이었다면 그는 진작 망가졌을 것이다.
‘어? 그렇다면 차희가?’
지난 중간고사 때 시험을 망친 손차희를 비웃었던 기억이 났다. 손차희의 시험결과가 강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두려움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손차희가 아니었다. 그는 지난 중간고사를 제외하면 학교에서건 학원에서건 1등을 빼앗겨본 기억이 없었다.
‘기말고사에선 반드시 이긴다. 학교 내신 문제에서 내가 질 리가 없어.’
내심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문제를 물어봤던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해? 풀이가 잘못됐어?”
이민찬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주변 학생들이 모두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공개된 자리에서 나약함을 보일 수는 없다.
이민찬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냐. 역시 수학을 제법 잘 하는 녀석이네.”
이민찬은 다시 음료를 쭉쭉 빨았다.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강우를 훔쳐보고 있었다.
* * *
첫 시험이 시작됐다.
강우는 받은 문제지를 쭉 훑었다.
처음 보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가 지긋한 선생님이 시험 감독으로 들어왔다. 누구지? 어디선가 본 듯한 선생님인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학생들은 그 선생님을 보는 순간 얼어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안면이 있는 선생님이면 신경이 쓰이기에 차라리 모르는 선생님이 더 낫다.
강우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시험지를 바라보았다.
수학 시험은 사실상 그의 전공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한 학기를 배워 범위가 조금 넓어지긴 했으나 전혀 문제 될 일이 아니다. 대충 쓱 훑어보니 예상한 문제가 나왔다. 난이도는 중간고사보다 조금 어려워졌다. 학교 측에서도 이제는 신입생들이 어려운 시험에 익숙해졌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일단 첫 번째 객관식 문제부터.
손쉽게 풀렸다. 강우는 얼른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갔다.
강우의 자리에서 비스듬히 몇 번째 앞에 손차희가 앉아 있었다. 지난 중간고사 때의 일이 생각나서 그는 손차희가 신경 쓰였다.
문제를 열심히 풀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별다른 동요는 없어 보인다. 아마 이번 시험은 지난 중간고사보다 훨씬 잘 치를 것이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문제를 푸는 강우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그의 옆으로 감독 선생님이 지나갔다. 그를 보는 선생님의 눈빛이 따스하다. 물론 강우는 신경 쓰지 않고 문제만 열심히 풀었다.
수학 문제를 푸는 강우의 스타일은 한 학기 동안 꽤 진화했다. 이제는 웬만한 수식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바로 정리한다. 얼핏 보면 암산을 엄청 잘하는 것 같은데 엄밀하게는 다르다. 암산이란 사칙연산을 머리로 빨리 계산하는 것이지만 강우가 지금 보이는 능력은 숫자 계산이 아닌 수식 전개였으니까.
남들은 연습장 한가득 풀어야 할 수식 전개를 그는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해치웠다. 그 바람에 그는 연습장에 써서 수식 전개를 거의 하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찍고 지나가는 줄 알 정도다.
과학고에는 수학 문제풀이로 쓰도록 문제지 뒤에 백지를 한 장 더 붙여준다. 다른 학생들은 이 백지에 가득 수식을 적으며 문제를 풀었지만 그의 시험지는 눈이 내린 듯 하얗고 한산했다. 아주 가끔 숫자 몇 개, 수식 한 두 개가 적힐 뿐이다.
주관식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학생들은 먼저 백지에 문제를 열심히 풀고 이를 정리하면서 답지에 풀이 과정을 썼다. 반면 강우는 곧바로 답지에 주관식 답을 썼다. 그러니 백지를 이용할 일이 없었다.
어쨌든 그는 그 어려운 수학 시험을 순식간에 다 풀었다. 마지막 한 문제가 조금 걸리적거리긴 했지만 말 그대로 걸리적 거릴 뿐이었다.
답지에 완벽하게 기입하고도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주어진 시험 시간은 두 시간인데 여전히 한 시간을 버텨야 하다니.
하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나? 하긴 옆에서 최대우가 막판 정리를 하겠다고 눈을 부릅뜨고 책을 들여다보는 바람에 그도 잠을 설치긴 했다.
수학 시험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긴장감이 확 떨어졌다. 벌써 기말고사가 막바지에 이른 기분이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강우는 시험장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쭉 둘러봤다. 모두 열심히 문제를 푸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음엔 감독 선생님을 확인했다. 시험장 이곳저곳을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학생들이 문제 푸는 모습을 인자한 미소를 띤 채 살피고 있었다.
‘그냥 편한 선생님이네.’
강우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에 엎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툭툭 건드린다.
시험 칠 때 그를 건드린 사람은…… 신새벽 선생님 외에는 없다. 감독이 신새벽으로 바뀌었나?
깨운다고 바로 일어날 그가 아니다.
강우는 한차례 몸을 뒤척였다. 다시 그의 등을 쿡쿡 찌른다.
“왜애애~ 나 자는데.”
자신도 모르게 작게 잠투정을 한 강우는 재차 등을 찌르는 공격에 어쩔 수 없이 벌떡 일어났다.
“아이씨, 잠 좀 자자고!”
“푸하하!”
학생들의 박장대소가 울리자 강우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의 옆에서 나이 많은 인자한 감독관이 노려보고 있었다.
“헙!”
놀란 강우는 곧바로 허리를 바로 세웠다.
“학생! 시험 시간에 자면 어떡하나? 다 풀었어?”
“옙! 다 풀었습니다!”
강우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감독 선생님이 그의 문제지와 답지를 쓱 훑었다. 연습장으로 준 유달리 하얀 백지가 존재감을 빛내고 있었다.
“거의 찍었군.”
“아, 아닌데요. 풀었습니다.”
괜히 억울해진 강우는 열심히 반박했다.
감독 선생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인자하던 인상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흐음, 그래? 그래서 학생 이름이…….”
답지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감독 선생님이 답지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강우? 학생이 강우였나?”
“제가 강우인데요?”
“지난 중간고사는 꽤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고 듣긴 했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성의 없이 시험을 치면 어떡하나?”
감독 선생님의 호통에 강우가 오히려 놀랐다. 수업을 들어오는 선생님이 아닌데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어딘지 기분이 싸늘했다.
어쨌든 억울함을 바로 잡아야 한다.
“‘성의 없이’가 아니라 ‘성의 있게’ 시험 쳤습니다. 정말 다 풀었거든요.”
“흐음, 그래?”
여전히 믿을 수 없는 듯 연신 그의 얼굴과 답지를 번갈아 쳐다봤다.
강우가 조금도 물러서지 않자 감독관이 한숨을 쉬며 경고했다.
“알았어. 다만 그렇게 자고 있으면 다른 학생에게 방해되니 잠은 자지 말게.”
조용히 자는 행동이 왜 방해되는지 알 수 없는 강우였지만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예.”
시간이 흘러 수학 시험이 끝났다.
손차희가 졸고 있는 그를 깨웠다.
“강우야, 배짱 대단하더라.”
“어? 무슨 말이야?”
“감독 들어오신 분…… 교장 선생님인데?”
강우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