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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77화 (77/325)

제77화 기말고사 (2)

강우는 참담한 기분 속에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오늘 시험이 끝났으니 바로 내일 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오후에는 세미나실에서 모여 과학 공부에 매진할 예정이었다.

“하아!”

강우는 긴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이, 아니 학교가 무너진 기분이다.

“왜 그래? 시험 못 쳤어?”

손차희가 옆에 따라붙었다.

“그건 아닌데…… 교장 선생님께 찍혔으니 앞으로 어떡하지? 왜 하필 교장 선생님이 감독으로 들어와? 솔직히 교장 선생님이면 교장실에서 무게 잡고 계셔야 하는 거 아니야?”

손차희의 공감을 얻어보려 했더니 그녀의 표정이 영 아니었다.

“왜? 내 말이 잘못됐어?”

“열성적인 교장 선생님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런가? 어쨌든 왜 하필이면 우리 반이냐고!”

사실 백두섭 교장이 강우네 교실을 방문한 이유는 단순했다. 이번 신입생 가운데 놀라운 학생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다. 입학시험에서 평균 이하였고, 예비 입학 기간의 진단 평가에서도 그저 그런 성적이었던 학생이 지난 중간고사에서 전교 1등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학생을 직접 눈으로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알 리 없는 강우는 교장 선생님의 행보에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무리 불평해도 시험 시간에 자다가 찍힌 현실은 변치 않았다.

“……그런데 정말 몰랐어? 교장 선생님인 줄?”

“내가 교장 선생님을 본 적이 있어야…….”

“입학식 날 봤잖아?”

“그땐 잤는데…….”

입학식 때 졸았던 스노우볼이 이렇게 굴러갈 줄은 전혀 몰랐다. 반쯤 벗은 흰머리에 나이 지긋한 인자한 인상이니 평범한 선생님이 아니란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씩씩대며 길가의 돌멩이를 걷어차던 강우는 식당이 보일 때쯤에야 제정신을 차렸다.

문득 수학 시험에서 마음을 졸였을 손차희의 결과가 궁금해졌다. 지난 중간고사에서 수학을 망친 후 그 뒤로 다른 시험까지 줄줄이 망친 그녀가 아니었던가.

이번 기말고사에서는 절치부심하여 열심히 했으니 반드시 성과가 있어야 했다. 만일 이번 시험에서도 망가지면 그녀는 제자리를 찾기가 더 힘들어질 테니까.

차마 물어보기 쉽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표정이 어둡지 않아 최악이 아니란 추측은 가능했지만.

물끄러미 쳐다보며 주저하는 강우의 심정을 손차희가 먼저 눈치챘다.

“나도 이번에는 그럭저럭 봤어.”

“그래? 정말 다행이다.”

“강우야, 난이도가 어땠어?”

“지난번보다 조금 어려웠지. 아무래도 범위가 늘었으니까.”

“난…… 대충 다 풀긴 했어. 주관식 하나는 확실하게 틀렸고 나머지 두 문제 정도가 조금 이상하긴 한데…… 중간고사에 비하면 엄청 잘한 거야.”

“잘했네!”

강우는 진심으로 축하했다. 마음의 짐을 덜어낸 기분이다.

저쪽에서 윤수아와 최대우가 나타났다. 시험 때는 절반이 반 이동을 하기에 윤수아와 최대우는 다른 교실에서 시험을 쳤다.

“강우야, 강우야아! 시험 잘 쳤어?”

밝은 윤수아의 표정으로 그녀의 결과가 나쁘지 않다고 추측했다.

강우는 지구가 멸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시험이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젠데?”

“교장 쌤한테 찍혔어. 나 내일 쫓겨날지도 몰라.”

“어? 퇴학? 어떡해?”

윤수아가 방방 뛰고 옆에서 최대우가 위로했다.

강우는 긴 한숨을 뱉으며 신발을 질질 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그들을 유심히 쳐다보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이민찬이었다.

이민찬은 어두운 표정으로 강우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시험이 어렵긴 했는데…… 강우 녀석도 많이 못 쳤나 보지? 완전 죽을상이네.”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걸어가는 강우와 그 옆에서 위로하는 윤수아와 손차희를 보니 시험을 망친 게 확실했다.

“못 친 게 아니라 실력이 뽀록 난 거지. 지난번 시험은 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은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의 위로가 됐다.

이민찬은 오늘 시험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최근에 강우를 신경 쓰다 보니 시험지를 받고도 강우가 자꾸 떠올랐다. 평소와 달리 집중력이 떨어져서 계산도 느리고 풀이도 매끄럽지 않았다. 학생들의 질문을 척척 풀던 강우가 눈앞에 어른거려 방해됐다.

그는 이것이 문제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정신 승리했다. 중간고사와 비교해서 점수가 내려갔지만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라고 위안했다. 그 혼자 점수가 내려가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강우가 못 쳤다면 대만족이었다.

위안을 얻은 이민찬은 주먹을 굳게 쥐었다. 내일 과학시험에서는 반드시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고.

* * *

둘째 날 과학시험에서는 강우가 반을 옮겼다.

이동하는 다른 학생을 대충 따라갔더니 그 교실에서 익숙한 한 녀석이 보였다. 바로 이민찬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의욕 없이 털썩 주저앉는 강우에게 이민찬이 말을 걸어왔다.

“어제 보니 죽을상이던데…… 아직도 헤매냐?”

“어.”

강우는 한숨을 내쉬며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이민찬이 위로한답시고 살살 긁기 시작했다.

“시험이야 잘 칠 수도 있고 못 칠 수도 있는 거야. 남은 시험에 집중해야지.”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서 그래.”

“엄청 못 쳤구나?”

“하아, 교장실에 불려갈 것 같아.”

세상이 꺼지라고 한숨만 내뱉는 강우의 태도에 이민찬은 바로 입을 닫았다.

시험을 못 쳤다고 교장실에 불려가진 않는다. 하지만 저렇게 처참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거의 백지로 냈다고 확신했다. 얼마나 못 쳤으면 저렇게 생각할까.

새삼 연민이 일다가도 상대가 적수란 생각에 이민찬은 마음을 단단히 잡았다.

‘오늘 과학시험에서만 저 녀석을 뛰어넘으면 내가 이긴다!’

물리 시험이 시작됐다.

강우는 감독으로 들어온 선생님을 확인했다. 정말 처음 보는 선생님이었다. 하긴 어제도 모르는 선생님이라고 안심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이럴 때는 확인이 필수다.

시험지를 나눠주기 직전에 강우는 손을 들고 물었다.

“저…… 선생님! 혹시 교감 선생님은 아니죠?”

“응? 무슨 소리야? 난 3학년 담임이야.”

“다행이네요.”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모두 책 집어넣어! 시험 시작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미친놈 봤다고 낄낄대는 표정이다. 강우는 얼굴을 두껍게 깔았다.

수학과 마찬가지로 물리도 난이도가 대폭 올랐다. 지난 중간고사는 신입생들이 과학고에 익숙해지도록 적당히 쉽게 낸 게 확실했다. 여기저기에서 문제가 풀리지 않아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우는 문제를 쭉 훑어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문제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원시원한 문제가 아니라 더럽고 치사한 문제다. 여기저기 함정을 파고 꼬아놓았다. 쉽게 풀린 답이 정답이 아닌 경우가 속출했다. 당연히 강우의 눈엔 그런 부분이 모두 보였다.

‘이거 김윤택 쌤이 낸 거야? 아니면 차도도 쌤이 낸 거야? 성격이 완전 배배 꼬였네.’

이 문제를 낸 사람이 차도도라면 조금 충격이다. 차갑지만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하긴 시험 문제 유형과 성격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긴 하다.

이런 식의 문제를 좋아하지 않는 강우였지만, 그가 못 풀 일은 없었다.

짜증이 난 강우는 빠르게 문제를 풀었다. 얼른 풀고 잠이나 자는 게 낫다. 감독관이 교장 선생님이 아니니 오늘은 찍힐 일도 없고.

1시간짜리 시험을 정확히 30분 만에 끝냈다.

강우는 옆자리를 슬쩍 쳐다봤다. 이민찬이 고민에 빠져 끙끙대고 있었다.

오늘 시험은 계산량이 많은 문제가 다수 있어서 저런 모습이 정상이다. 대부분의 수식 전개와 계산을 머릿속에서 해치운 강우가 비정상일 뿐.

어쨌든 강우가 이민찬까지 걱정해줄 이유는 없었다. 주관식까지 깔끔하게 끝낸 강우는 일찌감치 책상 위에 엎어졌다.

열심히 문제를 풀던 이민찬은 기분이 팍 상했다.

문제를 풀던 강우가 잠을 자기 시작한 다음부터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대충 시험을 쳐본 적이 없었던 이민찬은 강우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시간에 벌써 문제를 다 풀었을 리 없으니 시험을 치다가 포기한 것이 확실했다.

“어제 수학을 망쳐서 포기했나…….”

생각해보니 이번 학기에 강우가 꽤 바빴다. 얼마 전까지 사이언스 페스타에 출전하느라 고생했다고 들었다. 페스타 출전은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다. 당연히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을 거고…….

강우의 지금 행동을 이해했다. 자신 있던 수학을 망치고 짜증이 난 게 확실하다. 원래 인간이란 게 그렇지 않던가.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목표로 노력하다가 금메달이 무산되면 은메달도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난 끝까지 열심히 시험 쳐야지.”

마음을 다잡던 이민찬의 눈에 얼핏 강우의 답지가 들어왔다. 물론 세세한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답지에 가득 적힌 글자는 분명하게 느껴졌다. 백지라고 생각했는데 백지가 아니었다.

‘뭐야? 정말 다 풀고 자는 거야? 설마?’

이민찬은 다시 합리적인 추론을 시작했다. 이런 순간에도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마음가짐이 자신의 장점이니까.

오늘 시험은 어렵고 계산량도 많다. 물리 선생님이라도 이 짧은 시간에 다 풀 수 없다. 그렇기에 그는 강우의 답지에 적힌 글씨는 정답이 아니란 결론을 얻었다.

‘대충 막 풀었겠지.’

그제야 강우가 지금 자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가슴이 뿌듯해졌다. 중간고사 때 빼앗긴 1등 자리가 벌써 눈앞에 어른거린다.

‘이럴수록 더 열심히 풀어야지.’

심장이 뛰고 피가 빨리 도는 기분이다. 덩달아 문제도 매우 잘 풀린다.

‘나는 물리의 신이다!’

이민찬은 희희낙락하면서 흥분한 채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풀리지 않던 문제에서 예쁜 숫자의 답이 구해졌다. 이건 정답일 수밖에 없다.

정상이라면 시간이 부족했을 시험이었는데도 이민찬은 거침없이 문제를 다 풀었다. 강우를 따돌렸다고 생각하니 아드레날린이 팍팍 솟았다.

토끼와 거북이 우화가 생각났다. 토끼가 잠잘 때 거북이는 끊임없이 노력해서 토끼를 앞지른다.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강우가 자는 동안 그는 문제를 정복했다. 거북이인 그는 바람직한 인간이다.

이민찬이 문제를 모두 풀고 검토를 시작할 때 종이 울렸다. 물리 시험이 끝났다.

* * *

“하아암……. 잘 자고 있었는데.”

강우는 긴 하품을 내지르며 기지개를 켰다.

자다가 일어났더니 환경이 낯설다. 그를 쳐다보는 학생들의 눈빛도 수상쩍다. 모두가 불쌍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남의 눈을 신경 쓸 강우가 아니었다. 오늘따라 이 시험장에는 같이 온 조원이 아무도 없었다. 쉬는 시간이어도 대화할 친구가 없기에 강우는 다시 책상에 엎어지려 했다.

“어이, 브라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번 무시했더니 이제는 등을 누르며 몸을 흔든다. 견디다 못한 강우는 벌떡 일어났다.

“왜애애?”

“물리 잘 봤냐?”

“잘 봤지.”

“하기야 문제는 잘 봤겠지. 답이 안 보여서 그렇지.”

빈정대는 고현성의 태도에 강우는 한숨을 쉬었다.

“뭐가 불만인데?”

“불만은 무슨. 수학을 망하더니 물리도 망했구나.”

“무슨 소리야? 내가 망했다고 누가 그래?”

“척 보면 알아. 어제 온종일 네가 죽을상이었다고 소문까지 났다고.”

교장 선생님에게 찍히는 바람에 기분이 나빴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오해를 살 줄 몰랐던 강우는 인상을 팍 쓰고 주변을 둘러봤다.

고현성 외에 이민찬 패거리도 그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거 헛소문이야. 그리고 난 물리도 잘 봤으니까 그만 꺼져 줄래?”

손을 내저으며 다시 드러눕는 강우를 고현성이 바로 붙잡았다.

“잘 봤다고? 네 녀석이 문제도 안 풀고 엎어지는 거 봤거든! 하긴 쪽팔려서 인정하기 싫겠지. 그럼 대답해봐. 마지막 주관식 답이 뭐야?”

“5.6”

“뭔 소리야? 찍었지? 그거 답이 8이라고! 8.0!”

고현성이 버럭 소리치며 주변의 동의를 구했다. 이민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학생들도 그렇다고 너도나도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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