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기말고사 (4)
“우아아아!”
“뭐야? 이 난이도에서 그런 점수가 나온다고?”
“독보적이네.”
윤수아를 비롯한 친구들이 입을 쩍 벌렸다.
강우는 수학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
강우가 수학 시험 시간에 자다가 걸려 교장 선생님에게 혼쭐이 났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에 대다수는 이번 시험 성적을 기대할 수 없다고 추측했다.
그런 상황에서 만점이라니! 이것은 9회 말 투아웃에서 터진 역전 끝내기 홈런과 비슷한 쾌거였다.
정작 같은 장소에서 시험 쳤던 손차희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강우가 엎드려 자려다 지적받은 시점이 시험 시간이 대략 절반 남았을 때였다. 그 때문에 학생들은 강우가 모두 풀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감독이었던 교장 선생님도 같은 생각이었겠지.
그런데 다 풀고 잤다니? 얼마나 수학을 잘하면 그럴 수 있을까?
손차희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강우의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 저런 괴물과 경쟁하려 했었다니! 그랬으니 저번 중간고사를 망칠 수밖에.
멍한 그녀의 상념을 윤수아가 깨웠다.
“어쨌든 기말고사에서 우리 조 성적이 나쁘지 않아. 지난 중간고사보다 좋아진 것 같아. 특히 차희 넌…….”
“난 그저 그런 것 같은데?”
“아냐, 전 과목에서 그때보다 훨씬 어렵게 출제됐잖아? 게다가 이민찬 성적도 이번에는 별로래.”
윤수아가 넓은 발을 자랑하듯 전교권 학생인 이민찬과 주영식의 성적을 읊었다. 적어도 주요 과목에서 손차희의 성적이 더 나았다.
손차희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이민찬만은 꼭 이기고 싶었으니까. 몇 년 동안 학원에서 항상 이민찬에게 밀렸었다. 그리고 과학고 입시에서도, 또 중간고사에서도 이민찬에게 뒤졌다. 그런데 지금 이민찬을 앞설지도 모르는 순간이 왔다. 윤수아의 말대로라면 기말고사 결과를 기대할 만했다.
“차희야, 나도 학원 때려치울까? 넌 학원 그만두니 성적이 팍팍 오르잖아?”
윤수아는 진지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손차희를 따라 해온 그녀이기에 손차희가 없는 학원을 계속 다니기는 싫었다.
“이제 곧 방학이잖아? 천천히 생각해도 되지.”
강우는 바로 윤수아를 말렸다. 손차희와 윤수아는 사정이 다르기에 학원도 다른 영향을 미친다. 그가 볼 때 윤수아는 학원에 다녀야 한다. 아니면 노트북을 끼고 살 테니까.
“으음.”
안면을 찡그리던 윤수아는 책상 위로 손을 뻗었다. 당연히 잡혀야 할 과자가 손에 닿지 않았다.
“어?”
윤수아의 눈이 커지고 과자의 행방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찾던 과자는 발이 달린 듯 봉지째 최대우 앞으로 옮겨가 있었다.
최대우는 노트북에 머리를 처박은 채 해답을 올리느라 정신없었다.
“으아! 대우야! 혼자 먹기 있어?”
“어? 이게 언제 이쪽으로 기어 왔지?”
최대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과자를 한 움큼 집었다.
강우는 웃으며 콜라를 마셨다.
친구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뜻대로 기말고사가 풀려 한시름 덜었다. 그에게 필요 없는 여러 과목 성적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
기말고사가 끝났으니 여름방학이 다가왔다. 당분간 홀로 핵융합 연구를 재개할 시간이 주어진다. 강우는 벌써 가슴이 뛰었다.
* * *
급히 집으로 돌아온 이민찬은 기말고사 시험지를 펴놓고 침묵에 빠졌다. 펼쳐놓은 시험지의 절반은 왕창 구겨져 있었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기말고사를 치기 직전까지만 해도 자신감이 넘쳤었다. 중간고사 성적 수성은 당연하고 1등이 되어 2등과의 격차를 얼마나 벌릴지를 고민했었다.
그런데 결과는 최악이었다. 중학교 이후 이런 성적을 받은 기억이 없었다.
굳이 원인을 따져보니 여러 가지가 집혔다.
“강우 이 자식이 화근덩어리였어!”
강우의 소문을 듣고도 한 수 아래라 여기고 경쟁자로 보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권유성과 경시대회 문제를 다툼하던 때부터 돌변했다. 그가 풀지 못하는 문제를 강우가 단숨에 풀면서 자존심이 확 상했다.
1차 대회에서 탈락했다는 소문이 돌던 녀석이 어떻게 그 어려운 문제를 쉽게 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만 해도 긴가민가했었다.
정작 그를 더 당황하게 만든 것은 일전의 기숙사 야식 시간이었다.
친구들이 모른다고 가져온 문제를 강우는 거침없이 풀어주었다. 학생들은 줄을 서서 강우에게 질문했고 강우를 향한 찬사가 이어졌다.
문제풀이는 놀랍지 않다. 친구들이 질문하는 문제는 대부분 프린트물이나 고난도 문제집에서 볼 수 있으니까. 그도 어렵지 않게 풀어줄 수 있다.
“그 자식은 자기 공부를 안 하나?”
하지만 그는 강우처럼 친구에게 가르쳐줄 수 없다. 내일이 시험이면 마지막 정리를 해야 하므로 질문을 받을 수 없다. 이것이 지난 십 년간 그가 지켜왔던 시험 패턴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방식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그것을 강우가 여지없이 깨버렸다. 시험이 임박했을 때도 다른 학생의 질문을 받아줬다.
“보살도 아니고…… 정말 천재였나?”
그 장면을 본 이후 급격히 흔들렸다. 그러잖아도 어려운 시험이 더 힘들어졌다.
그래도 수학 시험은 적당한 선에서 방어했다. 꽤 어려워서 다른 학생들도 못 쳤으니까.
“하필이면 과학시험을 그 자식이랑 같은 장소에서 보는 바람에…….”
결론은 멘탈이 완전히 나가버렸다. 강우의 기행에 강우를 주시하면서 시험을 치던 그도 제대로 시험에 임할 수 없었다. 끝나고 채점해보니 점수가 엉망이었다.
강우 때문에 흔들린 물리와 화학은 최악이었고 다른 두 과목도 한숨만 나오는 점수였다. 다행히 다음날부터는 본래의 성적으로 돌아갔지만, 이 기말고사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결과로 끝났다.
다른 학생들이 완전히 망치지 않는 이상에야 절대 중간고사 때만큼의 성과를 얻을 수 없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후우!”
이를 갈아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민찬은 앞으로도 강우 때문에 피곤해지리란 직감이 들었다.
* * *
기말고사 후 여름방학 시작까지 일주일간은 학생들을 통제하기 힘든 기간이다.
힘든 시험이 끝나 해방감에 물들고 방학이 임박해서 공부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는다.
고려 과학고에서는 이 시기를 과제연구 집중기간으로 설정했다. 2학년 이상 고학년은 R&E 집중기간이었다.
자연스럽게 강우는 윤수아, 최대우와 함께 움직였다.
모두 과제연구 때문에 머리가 아픈 시점이었건만 강우네 팀은 정말 한가했다. 사이언스 페스타에 냈던 작품을 과제연구 리포트 형식에 맞춰 변경하기만 하면 끝이었으니까.
불과 몇 시간이면 다할 일을 무려 일주일에 걸쳐서 하려니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연구에 매진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기에 그들은 천문대에 모여 잡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으흐, 미리 해놓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어!”
윤수아가 뿌듯한 표정으로 감탄사를 연발했고 최대우는 그 옆에서 노트북으로 블로그를 살피고 있었다.
“최종 마무리는 누가 해?”
물론 입학 직전 때처럼 강우가 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해도 문제가 없다. 이미 작성된 리포트를 형식만 변경하는 것이니까.
강우의 질문에 윤수아가 바로 자청했다.
“아무렴 대우보다는 내가 꼼꼼하니까. 내가 할게.”
할 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는 이런 분위기가 좋다. 강우는 흡족한 마음으로 리포트 작성 때 유의할 점을 일러주었다.
“그래, 수아가 해. 대우는 지금 물리 문제를 푸느라 정신없어.”
아직 시험이 끝나지 않은 학교가 있어서 여전히 블로그에 질문이 많이 올라왔다. 이제는 꽤 어려운 문제를 최대우도 곧잘 풀었다. 가끔 대학교재를 펴놓고 고심하는 최대우는 물리에 푹 빠진 과학자였다.
강우는 즐거운 마음으로 최대우의 머리 위에 표시된 잠재력을 확인했다.
‘물리 재능이 개화하고 있는 거겠지…….’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윤수아가 누구냐고 눈짓으로 물었고 강우는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담임!’
전화기를 켠 강우는 얼른 인사했다.
“쌤! 어쩐 일이세요? 저 지금 과제연구 하느라 바쁜데요?”
- 천문대에서 놀고 있는 거 다 알아.
“헉! 들켰다.”
- 네 성적 나왔어. 이야기해주려고.
“전혀 안 궁금한데요?”
- 뭔 소리야? 지금 옆에서 신새벽 선생님이 이를 갈고 있어.
그 문제를 잊고 있었다. 화학 성적이 중간고사 대비 엉망이었으니 그 분노가 짐작도 안 갔다.
“아, 그…… 그건 페스타 때문에 공부한 양이 줄어서라고 대답해주세요.”
- 그렇다면 수학과 물리는 왜 이래? 하필이면 그 두 과목만 만점이야?
“저도 이유를 몰라요. 그냥 열심히 풀었더니…….”
- 너…… 고의로 그런 건 아니지? 일부러 수학과 물리 빼고는 망친 거 아니야?
차도도의 눈썰미가 대단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비교해서 그 부분을 눈치채다니. 물론 인정할 강우가 아니다.
“에이, 그럴 리가요. 저 지금 다른 과목 못 쳐서 울고 있다고요. 특히 중요 과목인 화학 성적이 나빠서 시름에 잠겼다니까요.”
- 옆에서 신 선생님이 웃는다. 나중에 만나면 죽여 버리겠대.
“허억!”
- 이번에 성적 보니까 너희 고곽천재 조가 모두 잘 봤어. 너만 빼고. 특히 차희는…… 많이 잘 봤더라. 네가 차희에게 도움 줬니?
“아뇨, 제가 반대로 도움받았는데요.”
예상대로 손차희의 성적이 발군인가 보다. 차도도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예전처럼 최소 세 손가락 이내로 복귀했다는 뜻이다. 강우에게는 무엇보다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조만간 시간 날 때 상담실에서 보자는 인사말로 차도도가 전화를 끊었다.
“젠장, 상담실이라니…….”
강우는 난감한 표정으로 투덜댔다. 상담실로 오라는 말은 신새벽과 함께 혼내겠다는 말과 상통하니까. 설마 방학 중에도 매일 공부한 내용을 보고하라고 하진 않겠지?
고민에 잠겨 있을 때 한 녀석이 후다닥 뛰어들어왔다.
천문대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녀석은…… 권유성뿐이다.
분위기를 쓱 살핀 권유성이 윤수아에게 매달렸다.
“누나! KMO 시험 발표 났어.”
“어? 유성이 넌 어떻게 됐어?”
“나? 당연히 통과했지.”
세계 수학 올림피아드 국가대표를 뽑는 한국 수학 올림피아드 시험 과정은 몇 단계를 거친다. 1차 시험, 여름학교, 2차 시험, 겨울학교, 최종 시험 및 국가대표 선발전. 이번에 강우는 1차 시험을 쳤고 권유성은 최종 시험을 쳤다.
최종 시험을 통과했다는 것은 국가대표 상비군에 뽑혔다는 뜻이다. 국가대표가 총 6명인데 상비군까지 합쳐 모두 12명을 뽑는다. 물론 그 수는 해마다 조금씩 다르다.
“이제 국가대표가 되는 거야?”
“아직 마지막 관문이 남았지.”
어깨를 으쓱하며 뽐내던 권유성이 강우를 향해 자랑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 봤냐? 넌 어떻게 됐어?”
그 사이 윤수아가 재빨리 친구들의 성적을 인터넷으로 확인했다.
시험을 치지 않은 강우와 윤수아는 당연히 통과할 수 없었고 최대우도 떨어졌다.
“차희만 1차를 통과했어.”
“차희 누나야 기본 실력이 있으니까. 크흐흐! 누나! 나, 이러다가 정말 국가대표 되면 어떡하지?”
“이 자식이 김칫국 마시기는…….”
난데없이 끼어든 강우의 빈정거림에 권유성이 눈에 불을 켰다.
“1차도 떨어진 주제에!”
강우와 권유성의 으르릉대는 소리가 높아지자 윤수아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유성아, 그래도 강우는 이번 기말고사 수학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어!”
권유성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렵고 어려운 과학고 수학 시험에서 만점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시험을 중간고사에 이어 기말고사마저 다 맞히다니.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지만 두 번은 필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