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80화 (80/325)

제80화 기말고사 (5)

강우는 떨리는 권유성의 눈동자를 확인하고는 피식 웃었다.

“이제 슬슬 형님이라 부를 때가 되지 않았어? 페스타에서는 내가 완승했는데?”

“아직 학교 평가 전이야!”

“선생님들의 과제연구 평가는…… 페스타 결과를 엎기 힘들걸?”

과제연구 성적은 P/F로 표시된다. 대부분 통과인 P를 받기에 그것만으로는 두 과제의 우열을 비교할 수 없다.

지금 강우와 권유성이 노리는 것은 과제연구 시상. 학교에서는 독창적이고 우수한 과제연구를 뽑아 금상, 은상, 동상을 발표한다. 권유성은 작년 2학기에 과제연구 금상을 받았다.

그동안 권유성이 강우와의 내기를 자신했던 이유였는데 지난 페스타에서 강우가 최우수상을 받는 바람에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도 난 우리 학교 선생님들을 믿어!”

권유성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씩씩대던 권유성이 사라지고 윤수아가 재차 사과했다.

“강우야, 나 때문에 KMO 시험을 못 봐서 정말 1년을 더 기다리게 됐네. 어떡해?”

“어쩔 수 없지. 너 때문이 아니니까 괜찮아. 어머니께선 이제 괜찮아지셨어?”

“조금 후유증이 있긴 하지만…… 특별한 문제는 없으셔.”

“다행이네.”

“그래도 차희가 통과했으니…… 차희는 여름학교에 가려나?”

1차 시험 합격자를 대상으로 한국대 수학과에서는 여름방학 동안 국제 올림피아드를 대비한 강의를 열었다. 2주간 진행되는 이 여름학교에서는 유명 교수와 대학원생이 고난도 수학 이론을 강의했다. 여름학교에서 배운 후 2차 시험을 통과하면 겨울방학 때 개설되는 겨울학교를 수강할 수 있다.

이번에 최종 시험을 친 권유성은 지난 겨울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었었다.

“가겠지?”

“그럼 여름방학 때 같이 못 놀잖아?”

윤수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툴툴댔다.

곧 여름방학이다. 여름방학에는 기숙사 문을 닫기 때문에 고향에 가야 한다. 친구들과 헤어질 시간이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강우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 * *

강우와 친구들이 여유롭게 과제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그 시각에 손차희는 이민찬과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그녀는 친구들과 떨어지기 싫었지만 과제연구 시간만은 어쩔 수 없었다. 모두 김윤택을 지도교사로 선택한 그녀의 잘못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면서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과제연구 활동을 시작했다. 김윤택이 던져준 주제를 이민찬이 학원의 힘을 빌려서 자료를 얻어왔고 손차희는 이 자료를 정리하면서 연구 활동을 수행했다.

물론 그녀도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기말고사란 큰 벽이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다만 지금은 달라졌다. 주어진 일주일 동안 오로지 과제연구에 충실해야 했다.

“그래서 딱 여기까지 한 거야?”

“여기까지라니? 난 많이 했거든!”

반박하는 손차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민찬도 실제로 과제연구에 투입한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기에 그녀는 자신 있게 주장했다. 그래도 그녀는 시험공부를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했었다.

“이거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당연히 부족하지. 더 채워 넣어야지.”

“그러니까…… 하던 네가 계속하라고.”

“그걸 왜 나 혼자 해?”

손차희가 눈썹을 치켜뜨고 이민찬을 노려봤다.

말문이 막힌 이민찬이 빨대로 아이스 음료를 쭉쭉 빨았다. 짜증이 난 듯 이민찬이 음료 컵을 책상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이래서 파트너를 잘 만나야 한다니까.”

“내가 할 말이야.”

이민찬과 손차희는 예전부터 경쟁한 라이벌인 데다 서로 성격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이민찬은 다른 사람을 시키기를 좋아했고 손차희는 스스로 나서서 주도적으로 해결하기를 좋아했다. 그렇다 보니 이민찬이 시키는 일을 손차희가 고분고분 따라 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경쟁자였던 두 사람을 한 팀으로 몰아넣었던 것이 실수였다. 지도교사인 김윤택이 이런 점을 세세하게 챙기지 않은 이상, 이 팀의 미래는 예정된 결과를 벗어날 수 없었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손차희를 노려보면서 이민찬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공부도 못 하는 게…… 저러니 반 일등도 이상한 녀석에게 뺏기지.”

“뭐야? 너는 달라? 강우한테 진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기말고사 결과가 언급되자 이민찬은 안면을 부들부들 떨었다. 며칠 전에 친 기말고사의 악몽이 다시 몰려왔다.

결과적으로 이번 시험을 완전히 망쳤는데……. 그는 손차희를 불안한 눈초리로 훑었다. 그녀도 시험을 망쳤겠지? 그나마 이 마음을 보상받으려면 그녀도 망쳐야만 한다.

“그렇게 소리쳐봐야 내가 낫잖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네가 나를 이긴 적 없지? 그렇지?”

이민찬이 빈정거리며 다시 놀렸다.

화가 폭발한 손차희가 결국 성적을 언급했다.

“그러는 넌 이번에 수학 몇 점 받았어?”

수학 이야기가 나오자 이민찬은 몸을 움찔했다. 그가 받은 수학 점수는 목표와 비교하면 상당히 나쁘다. 하지만 그는 당연히 손차희보다 잘했으리라고 믿었다.

이민찬은 으스대며 대답했다.

“나? 4개밖에 안 틀렸어. 우리 반에서는 내가 제일 잘했고 주변에도 나보다 잘한 사람은 없어.”

“4개? 난 2개 틀렸는데? 심지어 강우는 만점이야. 그 성적이면 우리 반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어!”

이민찬의 안면이 얼어붙었다.

수학 점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주변 다른 학생의 성적도 고만고만했기에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손차희는 당연히 비교할 일 없으리라 여겼고. 그런데 손차희의 성적이 그를 능가하자 이민찬은 패닉에 빠졌다.

당황한 이민찬이 음료 컵을 찾는 사이 손차희가 다시 약점을 제대로 파고들었다.

“물리 성적은?”

이번 시험에서 이민찬의 물리 점수는 최악이었다. 시험 때 강우에게 휘둘린 탓이다.

이민찬은 입만 벌린 채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손차희가 낌새를 눈치채고는 더욱 기가 살아서 소리쳤다.

“난 물리도 2개 틀렸어. 넌 몇 개야? 얼른 말해!”

“여…… 열한 개…….”

이민찬은 나라를 잃은 표정이 됐다.

이민찬이 시험을 망쳤다는 소문이 돌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졌을 줄은 손차희도 뜻밖이었다. 기세를 탄 손차희가 다시 물었다.

“화학은? 평소에도 화학은 나보다 못했으니까 잘 쳤을 리가 없겠네. 난 화학 1개 틀렸는데 넌 몇 개야?”

“여…… 여덟 개…….”

“넌 기말고사…… 거의 망했네.”

지금 손차희는 이민찬에게 연민을 느꼈다. 지난 중간고사 때 시험을 망쳤던 그녀는 시험을 망한 기분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나머지 과목은 굳이 비교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국어와 영어는 그녀가 자신 있던 과목이다. 설사 이민찬이 정상적으로 봤다고 해도 그녀가 크게 밀릴 일이 없다.

그래도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이고 서로 선의의 경쟁을 펼쳐왔던 녀석이기에 손차희는 조용히 위로하려 했다.

그런데 이민찬의 한 마디가 그녀를 뒤집어 놓았다.

“그렇다고 내 실력이 너보다 못한 게 아니야. 실력이 하루아침에 늘었다 줄겠어? 어차피 1학기 성적은 중간, 기말에 수행까지 합산이잖아? 내가 무조건 나을걸?”

손차희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네가 더 잘하니까 과제연구도 네가 알아서 다 해. 지난번에 네가 시켰던 것까진 다해두었으니까 앞으로는 알아서 하라고!”

그녀는 매섭게 이민찬을 쏘아본 후 물리 실험실을 떠났다.

* * *

그동안 열심히 피해 다녔지만, 오늘은 운이 따르지 않았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다가 곧바로 신새벽에게 딱 걸렸다.

“강우! 따라와!”

“저, 바빠요! 과제연구 해야 하는데요?”

“너! 과제연구 지난 페스타 때 이미 다 해둔 거 알거든! 그냥 올래? 맞고 올래?”

“가…… 갈게요.”

오늘처럼 무시무시한 눈빛을 발산하는 신새벽은 처음이다.

강우는 신새벽을 따라가면서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차도도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청했다. 안타깝게도 차도도는 그를 모른 척했다.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담임이었다.

상담실로 들어간 신새벽이 의자에 척 걸터앉았다. 그 포스가 남달랐다.

쭈뼛쭈뼛 따라 들어간 강우를 향해 신새벽이 빽 소리 질렀다.

“문 닫아!”

“저…… 요즘은 남녀가 밀폐된 공간에 같이 있으면 안 되는데요? 특히 위계를 이용한 성희롱은 밀폐된 공간에서 많이 발생하거든요.”

“너 죽을래?”

강우는 군말 없이 문을 닫았다. 신새벽뿐만 아니라 차도도마저 표정이 심상찮다.

“좋아, 강우! 화학 몇 점 맞았어?”

“유…… 육십 점요.”

“평균이 얼마지?”

“육십일 점요.”

“그래, 너 평균 아래거든? 할 말 있어?”

강우는 신새벽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할 말이야 많다. 다만 진실을 꺼내면 정말 신새벽에게 얻어맞을 분위기다.

“어, 없는데요.”

“내가 딱 두 가지에서 화가 났거든? 하나는 지난 중간고사 만점이 어떻게 60점으로 바뀔 수 있냐는 거야. 다른 하나는 하필이면 물리는 왜 100점이냐고!”

강우는 차도도를 힐끔 살폈다. 차도도는 도무지 그를 도와줄 기색이 없었다.

“그,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물리는 운이 좋았는지 찍어도 맞았는데…… 화학은 찍으니까 다 틀렸던데요?”

“그래서 찍는답시고 2번에 줄을 쫙 그었니?”

“헉!”

분노가 폭발한 신새벽이 가슴 위로 팔짱을 끼고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너 상습범이잖아? 예전에 진단 고사 때도 그래놓고선 놀란 척은!”

정곡을 찔리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변명하고 싶다. 모르는 문제를 같은 번호로 찍으나 다른 번호로 찍으나 확률상으로는 점수가 같다. 제대로 출제했다면 각 문제는 확률에서 독립시행이니까.

“그게…… 제가 화학보다 물리를 더 좋아하다 보니…….”

“그래? 이젠 대놓고 나보다 차 선생님을 더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거야?”

“네? 그게 왜 그렇게 해석되나요…….”

강우는 자신도 모르게 차도도와 신새벽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웃는 차도도와 달리 신새벽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어쭈? 이게 이제는 면전에서 선생님들을 놓고 비교하네?”

대체 오늘따라 신새벽이 왜 억지를 부리는지 강우는 알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차도도가 나섰다.

“강우야, 신 선생님은 그냥 재밌으라고 하는 이야기고…… 어쨌든 네 성적이 중간고사 대비 많이 떨어져서 실망하신 거야.”

차도도의 말도 이해가 되지 않긴 마찬가지였지만 강우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어휴, 그래. 시험이야 못 칠 때도 있으니까. 하여간 화학은 재미없다 이거지?”

“재미없다기보단 물리가 재밌어요.”

“알았어.”

신새벽의 표정을 살펴보니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차도도가 탁자에 기말고사 성적표를 올렸다.

곧 복도에 게시될, 기말고사 전교 20등까지 이름이 나열된 순위표다. 지난 중간고사에서는 강우의 이름이 당당하게 맨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놀랍게도 손차희가 전교 1등이었다. 강우는 내심 자기 일처럼 환영했다.

“이번에는 차희가 1등이야. 강우 네가 떨어진 것은 솔직히 별로 놀랍지 않은데…… 놀랍게도 이민찬이 확 떨어졌어.”

강우가 확인한 이민찬의 성적은 전교 18등이었다. 윤수아는 14등으로 중간고사보다 올랐다. 윤수아가 이민찬보다 잘한 날이 오다니!

“저는 왜 없어요?”

차도도가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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