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81화 (81/325)

제81화 KTX (1)

20등까지 순위에는 없었다.

솔직히 강우의 이번 기말고사 목표는 20등 밖이었다. 그가 20등 안에 들면 내신을 포함한 학생부 성적으로 대학을 갈 가능성이 큰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나마 20등 밖이라면 수능이라든가 R&E 실적이라든가 또는 다른 재능이라든가…… 본인의 능력에 좌우되기에 그나마 심리적 부담이 적었다.

애초에 출발선이 다른 강우가 전교 1등을 해서 다른 학생의 앞길을 막을 순 없었다. 적어도 그것은 열심히 한 학생들에게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없는 것을 보며 강우는 내심 마음의 짐을 던 기분이 들었다.

신새벽이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차 선생님, 이 녀석 웃는데요?”

차마 선생님 체면에 영화에서처럼 욕설을 뱉지는 못한 모양이다.

“어째…… 강우가…… 좋아하는 것 같죠?”

“아, 아닙니다!”

강우는 정색하고 차도도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1등이었던 네 등수는…… 기억도 나지 않아. 한참 밑이라서. 아마 48등이었나 그럴걸? 수학과 물리에서 만점 받고 총합 등수가 그 수준이면…… 다른 과목은 대체 얼마나 못 친 거야?”

전교생이 124명이다. 그래도 중간보다는 위였다. 강우는 등수가 마음에 들었다. 딱 원하는 만큼 나왔다.

계속 웃을 수는 없어서 나름 심각한 척했다.

신새벽이 옆에서 그의 옆구리를 쿡쿡 쑤셨다.

“연기하지 마. 어떻게 된 녀석이 성적이 떨어졌다고 좋아하니?”

“전 항상 긍정적으로 삽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그의 너스레에 두 선생님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튼, 강우! 넌 앞으로도 톡으로 매일 보고 계속해. 알았어?”

“허억!”

화학 점수를 생각하면 차마 안 하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슬그머니 차도도의 눈치를 봤다.

“물리도 마찬가지!”

완전히 망했다. 인생에서 자유가 사라졌다.

“그런데 이민찬 이 녀석은 왜 이래? 차희가 잘한 거는 이해가 되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이 녀석이 떨어졌네?”

“나도 모르겠는데?”

신새벽과 차도도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민찬의 성적을 주고받았다. 물리 점수도 화학 점수도 완전 엉망이었다. 이민찬의 실력에 어울리지 않는 점수가 나왔다고 투덜댔다.

강우도 이민찬이 왜 흔들렸는지 알 도리가 없다. 자신이 영향을 주었을 거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나마 그가 떠올린 원인은…….

‘그 녀석 저녁에 피자 엄청 먹더니…… 배탈이 났나?’

* * *

무려 1주일에 걸친 과제연구 집중기간에 강우네 팀은 페스타 보고서를 적당히 손봐서 제출했다. 가장 여유롭게 과제연구를 완수한 팀이다.

반면 손차희는 막판까지 고생했다.

이민찬과 의견이 대립하여 과제연구 자체가 삐걱거렸고 이민찬의 불성실한 참여 덕분에 그녀가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특히 손차희는 성격이 적극적이라 대충 해치우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이민찬과 달리 꼼꼼하게 보고서를 정리했다.

물론 두 사람이 수행한 과제연구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평범한 학생이라면 꽤 잘한 축에 속했다. 두 사람의 명성을 고려하면 사실상 엉망이었지만.

학기를 마무리하는 기간에 해야 할 일이 또 있다.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잡다한 숙제를 마무리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독서록과 강연 소감 보고서다.

“하아! 끝이 없네.”

윤수아가 테이블에 놓인 과자를 손으로 집으며 투덜댔다.

윤수아는 지금 독서록을 쓰느라 고생이었다. 어제부터 노트북으로 무려 10편에 가까운 독후감을 쓰고 있다.

게으른 성격이 아님에도 막판에 몰리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자꾸 군것질에 의존하게 되었다.

무심코 다시 과자로 손을 뻗던 윤수아는 최대우와 손이 마주치자 손을 꽉 잡았다.

“내가 적당히 먹으랬지?”

“헉! 마지막 남은 걸 어떻게 알고…….”

남은 비스켓에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뻗은 결과였다.

최대우에게 강력한 경고를 눈빛으로 날린 윤수아는 마지막 비스켓을 차지한 후 희희낙락하며 손차희를 돌아봤다.

손차희는 여전히 과제연구 때문에 인상을 팍 구기고 있었다. 역시 이민찬과 같은 팀을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 중이었다.

이민찬을 떠올리면 짜증이 나는 손차희와 달리 윤수아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동안 손차희도 못 이기던 이민찬을 무려 그녀가 눌렀으니까. 그녀 인생에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모든 게 고곽천재 때문이다. 아니 그동안 열심히 질문을 받아준 강우 덕분인가.

윤수아는 흐뭇한 표정으로 강우를 쳐다봤다.

정작 강우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독서록이고 강연 소감 보고서고 모두 안중에 없다는 듯이.

“강우야, 강우야아! 독서록 다 했어?”

“으으…… 어? 아! 다 썼어.”

“언제? 무려 10편인데…… 너 책 읽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윤수아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강우를 노려봤다.

“지, 진짜야. 볼래?”

강우가 자신의 노트북 화면을 윤수아에게 내밀었다.

클래스룸에 올린 독서록이 좌르륵 나타났다. 윤수아는 하나를 클릭하여 강우가 쓴 독후감을 읽어보았다.

“우와, 강우 글 잘 썼어! 어떻게 이렇게 썼지? 으음, 이거 읽어본 책 맞아? 너 이런 인문과학도서 싫어하잖아?”

“학교 권장도서 목록에 있어서 썼지.”

“책을 언제 읽었어?”

“꼭 읽어야 쓸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지.”

윤수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책을 읽지 않고 독후감을 어떻게 써?

그녀는 강우가 쓴 감상문을 세세히 살폈다. 대단히 훌륭해서 완전히 작가 수준이다. 강우에게 이런 글재주가 있었나 감탄할 정도다.

“강우! 어떻게 쓴 건지 제대로 말해!”

“아…… 그거? 인터넷 서점 들어갔더니 구매자들 서적 평 있더라. 그거 복사해서 붙였는데?”

강우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윤수아는 곧바로 좌절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별다른 일은 아니다. 이 녀석은 예전에도 신새벽 선생님이 낸 숙제를 복사해서 제출했으니까. 독후감 복붙하는 정도야 그 연장선일 뿐이니…….

“학교에서 카피하면 단속한다고 했는데?”

“설마 선생님들이 할 일 없이 그거 찾고 있을까? 그리고 걸린다고 퇴학처리 하겠어?”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강우를 보면서 윤수아는 머리를 싸맸다. 하긴 저런 모습이 강우답긴 하다.

* * *

드디어 여름방학.

방학식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간 강우는 재빨리 짐을 챙겼다. 짐 일부는 택배로 보내고 필요한 짐 일부는 커다란 가방에 넣었다.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면 한 달 후에 다시 기숙사로 복귀한다. 그리고 방학이 끝나는 날, 제주도로 수학여행 겸 체험 학습을 떠나게 되고 다시 기숙사로 돌아오면 2학기가 시작된다.

대부분 학생은 방학 중에 학원을 다닌다.

물론 강우나 최대우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다. 강우는 애초에 학원 다닐 생각이 없고 최대우는 다닐 학원이 없다.

윤수아는 기존에 다니던 학원을 계속 다닐 예정이고 손차희도 방학 때만 다시 합류한다고 했다. 물론 손차희는 한국대 여름학교에도 출석해야 했다.

어쨌든 커다란 가방을 둘러메고 기숙사를 나서니 고향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곳곳에서 인사하고 있다. 모두의 얼굴에 즐거움과 후련함이 가득했다.

“고곽천재 톡방에 매일 연락하기. 알았어?”

손차희가 조원 모두에게 고지했다.

강우의 안색이 순식간에 썩어들어갔다. 차도도와 신새벽에게 매일 보고하는 것만으로도 미칠 지경인데 친구들에게까지 알려야 한다니.

먹구름이 가득한 강우의 표정을 본 손차희가 재차 경고했다.

“특히 강우, 너! 담임 쌤한테만 보고하고 우리 단톡방에서는 읽씹하면 죽을 줄 알아.”

“크윽. 알았어.”

그 선생님에 그 제자일까. 왜 이리 극성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강우는 친구들과 작별을 고했다.

적잖은 변화가 있었던 반년이었지만 강우는 나름대로 잘 적응했다고 평가했다. 처음 강우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을 때는 막막했었는데 지금은 진짜 고등학생이 된 것 같았다.

오히려 과거 손강우의 삶보다 지금이 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남은 미래가 더 길기에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는 점을 떠올리니 더 그랬다. 과거보다 한결 향상된 그의 천재성이 그의 미래와 이 나라를 바꿀 것이다.

가방을 짊어진 강우는 조원들과 함께 기숙사를 떠났다.

교문 앞에서 차도도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선생님, 방학 잘 보내세요.”

손차희가 대표로 꾸벅 인사했다.

차도도가 미소로 배웅했다.

“너희들 못 보면 섭섭해서 어떡하지?”

“이참에 애인이라도 만드세요.”

“내 애인은 너희들이야.”

가볍게 응수한 차도도의 시선이 강우를 향했다.

“강우는 매일 잊지 말고 보고해.”

“허억!”

후다닥 꽁무니를 빼는 강우 때문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차도도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던 강우는 저쪽에서 다가오는 권유성을 발견했다.

“유성아! 형님한테 인사해야지?”

“이익!”

기겁한 권유성이 방향을 전환해서 빙 돌아갔다.

과제연구 결과가 어제 발표됐다. 당연히 강우네 팀이 제출한 ‘코페르니쿠스 크레이터의 새벽’이 최고상인 금상을 탔다. 반면 권유성의 ‘하늘에 그려지는 태양의 춤’은 동상을 수상했다.

강우의 완승이었고 이것으로 두 사람 사이의 서열이 정해졌다. 연령대로 강우는 형이고 권유성은 동생이다. 이 서열을 제일 좋아한 사람은 다름 아닌 윤수아였다. 족보가 꼬이지 않아서다.

그런데 녀석이 쑥스러워해서 그런지 아직도 강우는 그에게서 형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딱 잡아 와서 들어야 속이 풀리겠지만 녀석 상태를 보니…….

물론 강우는 권유성을 갈굴 생각이 없다. 권유성은 무려 S급 천재니까 잘 달래서 훗날 동료나 지원군으로 만들어야 한다.

한 달 동안 학교와 선생님, 친구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섭섭했다. 한 달 후가 되면 그들은 많이 변해있을 것이다.

* * *

우우우웅-

은은한 진동과 소음이 전달됐다.

지금 강우는 KTX를 타고 고향에 내려가는 중이었다. 물론 KTX가 고향까지 바로 데려다주지는 않았다. 강우의 고향은 시골이기에 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한참 들어가야 한다.

주중이어서일까. 열차 내에 승객이 가득했다.

대부분 직장인이거나 대학생으로 보였다. 그 또래의 고등학생은 당연히 없다.

창문 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보니 눈이 시원해졌다. 잠을 자려고 몸을 뒤척이던 강우는 포기하고 노트북을 꺼냈다.

‘시간을 낭비할 수 없지.’

마침 옆에 앉은 사람도 노트북을 꺼내 뭔가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학교를 벗어나서 좋은 점이라면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학교에서는 핵융합 자료를 꺼내놓고 살펴볼 수 없으니까.

예전에 읽었던 논문을 올려놓고 공부하고 있자니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가 멈췄던 반년 동안 세계 유수의 과학자들은 계속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제 방학이 되었으니 슬슬 따라잡아 볼 여유가 생겼다.

논문에 집중하던 강우는 타인의 시선을 감지했다. 옆에 앉은 사람이 그의 노트북 화면을 힐끔거리는 눈치다.

‘음?’

강우도 질세라 흘낏 상대를 살폈다.

대충 40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안경을 쓰고 열심히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는 중년인이었다.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전형적인 화이트칼라 직군이다.

강우가 쳐다보자 상대방도 찔끔하며 놀라는 표정이다.

저절로 강우의 눈도 상대방 노트북 화면으로 돌아갔다.

- 고속전철의 외형이 공기저항에 미치는 영향.

연구 개발 과제를 수행하는 과학자? 분위기로 보아 국가연구소의 연구원이거나 아니면 대학교수다.

잠시 내용을 훑어본 강우가 다시 자신의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대학생인가요?”

옆자리의 중년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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