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82화 (82/325)

제82화 KTX (2)

강우가 짐작하건대 옆 남자가 말을 건 이유는 노트북에 올려져 있는 논문 때문으로 보였다. 외모는 고등학생인데 논문 내용은 대학생을 아득히 넘어섰으니까. 하긴 고등학생이 홀로 열차를 타는 경우도 흔치 않았다.

“아뇨, 고등학생인데요.”

“아!”

놀란 중년인이 탄성을 터트렸다. 그는 다시 강우의 노트북을 살피고는 말을 걸었다.

“고등학생이었군요. 그런데 고등학생이 영어로 된 논문을 보나요?”

“저희 학교에서는 다 이렇게 합니다.”

강우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과제연구나 R&E를 수행하면서 영어로 된 논문을 읽을 일이 꽤 많다. 물론 지금 강우가 읽는 논문은 과제연구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지만.

“……학교가?”

“고려 과학영재고입니다.”

“아! 영재고!”

과학고를 다니니 좋은 점이 있다. 이럴 때 굳이 세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과학고란 단어 하나로 어려운 논문을 읽는 이유가 설명된다.

다만 중년인의 눈치를 보니 과학고나 영재고에 대해 잘 아는 듯하다.

“R&E를 하나 보군요. 그런데 R&E치고는 내용이 대단히 어려운데……. 분야가 물리학인가요? 공학인가요?”

“네, 물리학입니다.”

강우는 상대방 노트북에 올려진 연구 자료를 힐끔 확인했다. 주제로 보아 이 사람 역시 물리학이 전공으로 보였다.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다.

“고속전철 개발 사업 과제 하세요?”

“국책연구과제 프로젝트죠.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KTX가 세계 수준 대비 속도가 느리고 소음 진동이 심한 편이잖아요? 이를 개선하려고 코레일과 대학이 국가의 지원을 받아 공동 연구를 해왔거든요.”

강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강우 시절 관련 국가사업에 대해 들었던 기억이 났다. 금액이 꽤 큰 국가사업이고 여러 대학이 각 분야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평균 연구비가 수억에서 수십억 단위였었다.

물론 같은 물리학이라도 손강우가 연구하는 핵융합과는 완전히 다른 분야이긴 하다. 그래서 강우는 해당 사업의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문득 강우는 새로운 발상이 떠올랐다. 지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서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테스트했었다. 그가 손강우 시절에 배우지 않았던 내용에 대해서도 천재성이 발휘되는지 궁금했었다. 테스트 결과는 천재성이 훌륭하게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과정이 아닌 더 전문적인 분야에서는 어떨까? 무척 궁금했다.

“제가 잠시 볼 수 있을까요?”

강우는 자신의 노트북을 덮으며 물었다.

예상외로 중년인이 흔쾌히 허락하며 노트북을 보여주었다. 노트북에 뜬 자료는 연구 프로젝트 제안서였다.

강우가 제안서를 넘기면서 살펴보는 동안 중년인이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 연구 제안서의 핵심은 고속전철의 속도와 에너지 효율을 동시에 올리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탄 고속철도의 운행 최고속도는 대략 시속 300km 정도인데. 이것을 최소 400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게 목표이거든요. 현재 시험용으로 개발되는 고속전철이 그 정도 수준이긴 한데…… 문제가 많아요.”

강우는 중년인의 말뜻을 금방 알아챘다.

현재 개발된 엔진이나 동력 장치의 성능으로 목표 속도를 달성할 수 있다. 다만 속도가 올라갈수록 에너지 소모가 급격히 늘어나고 차량의 안정성이 떨어진다. 저항이 커져 급격히 떨어지는 에너지 효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지금 이 중년인은 어찌 보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었다.

강우는 상대의 설명을 다시 풀며 아는 척했다.

“움직이는 물체는 필연적으로 저항을 받게 되죠. 공기와의 마찰저항도 문제지만 속도가 증가할수록 물체의 모양에 따른 형상저항이 더 크게 영향을 미치잖아요? 고속전철이라면 열차의 모양을 어떻게 개선할지가 가장 큰 문제이겠는데요?”

일전에 차도도의 차를 탔을 때 나눴던 대화와 유사한 주제였다. 물체의 모양에 따른 형상 저항은 속도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그때는 기어가는 자동차였지만 지금은 거의 날아다니는 고속열차이기에 형상저항의 영향이 대단히 커졌다.

“오! 잘 아는데요? 핵심을 이해했군요.”

중년인이 칭찬했다.

강우는 양해를 구하고 연구 제안서를 세세히 살폈다. 남의 연구 제안서를 이런 식으로 살피는 것은 무척 실례되는 행동이지만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이것도 고등학생의 특권 아닌가. 상대방도 그가 이 제안서 내용을 따로 이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제안서의 문구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사이 강우의 머릿속에 다양한 물리 공식과 방안이 떠올랐다. 관련 내용이 머릿속을 부유하면서 점차 자리를 잡는 기분이 들었다. 물리나 미적분이 아닌 다른 분야를 공부할 때 얼핏 느꼈던 증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서서히 이 분야의 핵심지식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강우가 연구 제안서를 제대로 이해하자 중년인이 말을 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제안하려니 아이디어가 부족해요. 형상저항을 일단 최대한 줄여야 하는데…….”

강우는 중년인의 고충을 이해했다.

형상저항을 줄이려면 차체를 유선형으로 개발하면 된다. 문제는 현재의 KTX도 수많은 연구를 통해 최대한 형상저항을 줄였다는 점이다. 이미 앞과 뒤가 뾰족한 미사일 형태를 이루는 유선형 설계를 적용하여 저항을 줄이는 방식에는 한계에 직면했다.

물리학 측면에서 추가로 개선할 부분이 마땅하지 않아 난감해하는 상태였다.

강우는 열차의 외형 사진을 놓고 조심스럽게 하나씩 짚었다.

“열차 사이의 연결 부위에서 발생하는 저항이 꽤 될 텐데요, 또 열차의 하부면, 레일과 몸통 사이도 큰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고요.”

강우가 하나씩 짚어가자 중년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치 그동안 이 연구를 수행한 사람처럼 핵심을 짚어서였다.

중년인이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학생이야. 대학원생도 자네처럼 단번에 과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지는 못할 걸세. 다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해. 지적한 부분의 개선은 한계가 있어서 연구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지.”

강우도 충분히 동감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제안서를 뒤적이며 차량 외형 사진을 유심히 관찰했다. 머릿속에서 그가 기억하는 여러 물리학적 지식과 고속전철의 구조가 재조립되는 기분이다.

“……혹시 다른 아이디어는 없나?”

사실 중년인도 큰 기대를 품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보여준 강우의 이해력은 대단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지금 이 문제는 새로운 시각의 접근이 필요하기에 천재의 창조성이 필요한 단계. 단순히 관련 책이나 논문을 뒤져 얻어낼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강우는 씨익 웃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혹시…… 골프 치세요?”

뜬금없이 골프 이야기가 나왔다. 골프가 대중화되긴 했지만, 고등학생이 골프 취미를 가진 경우는 선수가 아니라면 거의 없다.

“조금 치긴 하네만…….”

중년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강우가 설명을 계속했다.

“야구공이나 배구공 축구공은 표면이 밋밋하죠. 이것은 공기와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서죠. 하지만 골프공은 표면이 움푹움푹 파여 있습니다. 그 이유는…….”

중간에 말을 끊고 강우는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당연히 전문가인 중년인이 모를 리 없다. 그는 금방 강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했다.

골프공은 순간 속도가 다른 공에 비해 훨씬 빠르다. 그래서 골프공이 빠르게 날아갈 때는 주변에 와류가 발생한다. 이 와류가 심각한 저항을 유발하여 골프공의 비거리를 줄어들게 한다.

이 와류를 제어하면 골프공의 비거리를 늘릴 수 있다. 이를 위해 골프공은 표면이 울퉁불퉁하게 진화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네. 하지만 열차와 골프공은 엄연히 다르지 않나?”

“그렇습니다.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죠. 하지만 자연계에도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그게 뭔가?”

중년인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강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강우는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했다.

“바로 상어죠.”

“상어?”

무심코 반문하던 중년인이 한 차례 몸을 떨었다. 얼핏 기억이 난 듯 입에서 감탄이 새어 나왔다.

강우는 간략하게 설명을 추가했다.

“상어는 일반 물고기와 약간 다른 특징이 있어요. 먹이를 공격할 때 순간 속도가 대단히 빨라야 하거든요. 즉 물의 저항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합니다. 상어의 표면은 주 유동 방향으로 홈이 파진 리블렛 패턴이 형성되어 있어, 물속에서 와류 현상을 줄여 저항을 대폭 감소시키죠.”

“그렇지. 그 원리를 이용해서 수영복을 개발하고 비행기 동체에도 적용했는데…….”

“고속전철의 속도가 빨라지면 비행기와 비슷한 역학적 원리가 작용하죠. 상어의 표면을 연구해서 고속전철의 표면에 적용하는 아이디어는 어떨지요?”

강우는 빙그레 웃으며 중년인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중년인은 멍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노트북 모니터를 쳐다봤다. 물론 이 중년인도 전문가이기에 유체역학이 적용되는 골프공이나 상어 표면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현상을 고속전철에 응용하겠다는 발상은 하지 못했다.

“하하! 이거 오늘 내가 학생한테 한 수 배우는구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그런데 그런 이론들은 또 어디서 배웠고?”

“물리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공부하다 보니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종단속도나 형상저항 같은 문제는 실생활에서도 자주 만나잖아요? 고교 과정에서 일부 나오기도 하고요.”

“그래, 그렇지. 하지만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떠올리기 쉽지 않아.”

중년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강우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강우는 들고 있던 노트북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중년인은 노트북을 챙기면서 지갑에서 명함을 꺼냈다.

“난 이런 사람이네. 덕분에 큰 난제를 극복하게 되었어. 어쩌면 자네 덕분에 수억짜리 프로젝트를 확보할 기회를 얻었을지도 모르겠네. 고맙네.”

명함을 받은 강우의 눈이 반짝였다.

- 카이스트 물리학과 교수 한태규.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연구 프로젝트로 봐서 대학교수라고 짐작하긴 했었다. 그런데 한국대와 쌍벽을 이루는 유명 대학교의 교수였다. 다만 같은 물리학자였어도 세부 전공이 달라 전생에도 전혀 친분이 없었다.

하긴 예전의 손강우는 대학원생이었고 교수가 된 후에도 시골의 이름 없는 한설대학교 교수였기에 국내 물리학계의 주류가 아니었다.

오늘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 물리학과 교수가 카이스트 교수여서 강우는 만족했다.

“그런데 학생 이름이?”

“전 고려 과학영재고 1학년 강우입니다.”

“아, 1학년?”

다시 놀랍다는 듯 한태규가 강우를 훑어봤다.

이후 두 사람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물리학에서 시작하여 과학고와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 이르기까지.

담담하게 대화하는 강우와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한태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회 전반에 걸친 통찰력이 평범한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특히 물리학에 관련해서는 사실상 전문가를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열심히 달리던 KTX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난 대전에서 내려야 하네. 더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없어서 너무 아쉽군.”

“저도 그렇습니다.”

강우는 예의 바르게 꾸벅 인사했다.

“언제 기회 되면 다시 보세.”

한태규가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강우는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확실히 천재성이 향상되었다. 방금 대화한 유체역학 분야는 물리학일지라도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그런데 프로젝트 제안서만 읽고도 전문가와 대등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는 예전의 손강우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지 알 수 없지만, 오히려 좋았다. 이제는 자신이 정말 천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천재성으로 상온 핵융합 연구를 재개하면 과거와는 비할 수 없는 훌륭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기다려라! 마도환!”

강우는 주먹을 불끈 쥐고 나지막이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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