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마구 개발 (1)
“아들! 또 방에만 처박혀 있니? 조금이라도 움직여야지. 그러다 몸 상해!”
밖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내려온 후 발생한 가장 귀찮은 문제가 바로 저 잔소리였다.
그렇다고 방에 처박혀서 잠을 자거나 딴짓을 하지는 않았다. 핵융합 연구를 다시 시작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었을 뿐이다.
물론 어머니도 그가 뭔가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예전과 달리 노트북을 쳐다보고 있어도 게임에 열중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은 순수하게 그의 건강을 염려한 잔소리였다.
강우는 기지개를 켰다. 어깨가 뻐근했다.
“네! 알겠습니다! 곧 산책이라도 할게요!”
그도 건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작업을 마무리했다. 어차피 서두른다고 해결할 과제가 아니니까. 인생이 긴 만큼 연구도 길다.
노트북을 끄고 주섬주섬 일어났다.
방을 나서니 어머니의 매서운 눈초리가 느껴졌다.
“학교 한 바퀴 돌고 올게요.”
“그래라. 쉬엄쉬엄 쉬면서 해야지.”
강우는 행복한 기분 속에 집을 나섰다. 이제는 이 집도 익숙해졌다.
마을 길이 한적했다. 곳곳에서 머리를 늘어트린 버드나무가 그를 환영하는 듯했다.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새소리가 노래처럼 들렸다.
복잡한 서울에서 살다가 이곳에 내려오니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외침이 들리고 멀리 푸르른 논과 밭이 보였다.
멀지 않은 곳에 강우가 다녔던 중학교가 있었다. 물론 실제로 그가 다닌 학교는 아니었기에 강우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때때로 가끔 산책하느라 학교 운동장을 둘러보는 정도였다. 지나치다 어쩌다 만난 학생이 친구랍시고 아는 척할 때는 조금 곤란했지만, 이제는 그런 친구도 대충 눈에 익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마주하면서 학교 운동장에 들어섰을 때였다.
팡-
낯선 소음이 들려왔다.
강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운동장 한쪽 구석에 표적을 매달아 놓고 야구공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다. 나이는 대충 대학생 정도? 키도 제법 크고 몸이 건장했다.
“운동선수?”
이 시골에는 야구부가 있는 학교가 없다. 그래서 야구 선수를 볼 일이 없었기에 강우는 호기심이 일었다.
팡-
비전문가인 강우의 눈에는 대단히 그럴싸한 폼으로 공을 던지고 있었다. 현직 야구 선수이거나 적어도 한때 야구를 제대로 배웠던 사람이 확실했다. 그것도 투수였다.
강우는 한쪽에서 조용히 연습 장면을 지켜봤다. 야구를 해본 적은 없으나 구경은 좋아한다. 적어도 지금 어떤 팀이 프로야구에서 선두권에 있는지는 안다.
그가 보기에는 공이 엄청 빨라 보이는데 실제 야구 선수로서는 어떨지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투수가 던지는 공을 가까이에서 본 경험이 처음이니까.
날씨가 더워서일까.
공을 던지던 남자가 잠시 그늘에서 휴식을 취했다.
강우는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야구 선수세요?”
“어…… 그, 그런가…… 이제는 아니네요.”
돌아오는 답변이 모호했다. 어딘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이는 목소리. 방금까지 힘차게 공을 던지는 모습과 대비됐다.
“이 마을에 사세요?”
“이 학교를 나왔어요.”
“아, 선배시구나.”
좁은 동네라 건너 건너 물어보면 누군지 다 알았다. 어쨌든 같은 학교 출신이라니 반가웠다.
강우는 남자의 옆에 주저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금방 상대에 대해 대충 감을 잡았다.
남자의 이름은 공정혁. 이 마을에서 중학교에 다니고 고등학교를 인근 도시로 전학을 갔다. 그 이유는 바로 야구였다.
야구가 좋아서, 또 야구를 잘했기에 고등학교에서 금방 자리를 잡았고 비록 후 순위였지만 졸업하면서 프로팀에 지명받았다. 야구에 매진한 시간이 길지 않아 가능성을 보고 입단시킨 경우였다.
하지만 프로팀은 쉽지 않았다. 1군에서 몇 경기 출전하지 못했고 2년 만에 2군에서도 자리가 없어서 쫓겨났다.
물론 그 이유를 공정혁 본인도 안다. 건장한 체구를 가졌기에 투수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입단했는데 예상처럼 구속이 따라주지 않았다. 컨트롤은 나쁘지 않았으나 구속은 시속 130대였고 140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러니 프로에서는 전혀 경쟁력이 없었다.
“2년 만에 포기할 수 없어서 아직 손을 놓지는 못하고 있지만…….”
이렇게 혼자서 연습해봐야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공정혁도 알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꿈나무가 그처럼 허무하게 사라졌다는 것도. 본인도 그 전철을 밟고 있다는 것까지.
중학교 후배라는 인연 덕분에 의외로 깊은 사정까지 듣게 됐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프로에 입단한 경력도 있으니 재능이 없지는 않잖아요?”
강우의 희망적인 말에 공정혁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구속은 노력한다고 증가하지 않더라. 연습을 반복하면 컨트롤은 좋아지지만.”
자신의 구속으로는 프로에서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공정혁은 뼈저리게 경험했다.
“흠, 비슷한 구속으로 잘하는 프로선수는 없나요?”
“있긴 있어. 몇 명 있긴 한데…… 그들은 다양한 변화구와 정확한 컨트롤을 갖고 있어. 구속의 단점을 보완하기 충분하지. 그런데 나는 기껏 직구와 커브…… 투 피치 투수거든. 그러니 장래성이 없는 거지.”
“그럼 변화구를 연습하면 되잖아요?”
“그게 쉽지가 않네.”
이게 쉽다면 야구 선수로 성공 못 할 사람이 없었다.
강우는 남의 일이 아닌 것 같아 같이 고민에 휩싸였다.
그러고 보면 공부의 세계는 운동에 비하면 비교적 경쟁이 덜하다. 운동은 극소수 상위 몇 명만 성공하지만, 공부는 열심히 한 만큼 적당한 자리가 있다. 흔히 말하는 의사나 판사부터 그 아래로도 다양한 직군이 있다. 그 숫자가 엄청 많으니까.
그동안 과학에만 몰두하던 그에게 공정혁의 고민은 색달랐다.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않았을 나이에 벌써 이 사회의 패배자가 되어 버린 현실이 안쓰럽기도 했고.
“그래도 바로 주저앉을 수 없어서 올해 말까지 연습을 계속하며 입단 테스트를 지원해보고…… 그마저 안되면 때려치우고 다른 살길을 찾아야겠지.”
공정혁이 말을 하면서도 연신 한숨을 쉬었다.
도와줄 방법이 없을지 고민하던 강우의 눈에 공정혁이 손에서 떼지 못하는 야구공이 들어왔다.
“직구는 어떻게 던져요?”
“야구에 관심 있니? 직구는 말이야…….”
공정혁이 직구를 던지는 방식대로 야구공을 손에 쥐고 던지는 시늉을 했다.
“공을 쥐는 그립에 따라 공의 궤적이 달라지거든. 이렇게 던지면 직구, 이렇게 던지면…… 커브.”
강우는 물리책에서 보았던 내용을 떠올렸다.
던지는 방식에 따라 공의 궤적이 달라지는 이유는 공의 회전과 주변 공기의 작용 때문이다. 공이 회전하면 양력이 발생하고 이 힘이 공의 궤적을 바꾼다. 만일 회전이 전혀 없다면 공은 일직선에서 중력이 작용한 형태로 곡선을 그리면서 포수의 미트에 꽂힐 것이다.
공이 회전하면 공의 위쪽과 아래쪽의 공기 흐름이 달라진다. 회전 방향에 따라 좌측과 우측의 흐름이 달라지기도 한다. 공기 흐름이 빨라지면 압력이 낮아지고 흐름이 느리면 상대적으로 압력이 높아진다. 이 압력 차가 공에 힘을 작용하여 궤적을 바꾼다. 물리학에서는 흔히 베르누이 원리로 알려져 있다.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원리도 비슷하다. 날개 위쪽과 아래쪽의 공기 흐름으로 발생한 압력 차이가 양력을 일으킨다.
물리 법칙에서는 명쾌한 내용이긴 하지만 막상 공을 눈앞에 두니 생소하다.
“포크볼이라고 들어봤는데…… 그건 어떻게 던지는 거예요?”
“그건 이렇게. 그러면 공이 이쪽으로 회전하니까. 물론 나는 잘 던지진 못해.”
야구공에는 다양한 회전을 줄 수 있도록 표면에 실밥이 나 있다. 이 실밥을 어떻게 잡고 채어 던지느냐에 따라 회전에 변화를 줄 수 있다.
투수라면 기본적인 변화구의 그립을 한 번씩은 배운다. 그 가운데 자신에게 잘 맞는 것을 집중적으로 연습해서 익히기 마련이었다. 특별한 재능이 없다면 실전에서 쓸 수 있는 변화구는 한두 개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컨트롤이 잡히지 않고 위력이 떨어져 쓸모가 없다.
여러 변화구를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야구 천재이고 한두 개를 던지더라도 위력적인 직구가 뒷받침되면 그 변화구를 충분히 살릴 수 있어 대단한 투수로 성장한다.
다만 공정혁은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강우는 야구공을 받아 알려주는 대로 공을 쥐었다. 변화구를 던져본 적이 없기에 어색했으나 몇 번 하다 보니 기본 원리를 터득했다.
“흐음, 변화구 궤적을 보여줄 수 있어요?”
“표적 뒤에 서서 구경해봐.”
공정혁이 직구와 변화구를 번갈아 가며 던졌다.
강우는 뒤에 서서 공의 궤적을 관찰했다. 공정혁의 직구는 속도가 느리다고 했음에도 그에게는 무척 빠르게 느껴졌다. 저 공에 맞으면 뼈가 부러질 것 같다. 역시 야구 선수는 달랐다.
그는 공정혁이 알려준 손가락의 위치, 팔의 운동, 공의 회전과 최종적으로 표현되는 공의 궤적을 머릿속에서 연결했다. 뭔가 감이 온다. 직접 던질 수는 없지만,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 그의 천재성이 발휘된 결과였다.
몇 차례 시범을 보인 공정혁이 투구를 마치고 그에게 다가왔다.
“볼만했니?”
“공의 변화가 확연하게 나타나네요.”
“난 미숙한 편이야. 커브를 제대로 던지는 투수는 확확 꺾이지.”
“매일 여기서 연습하세요?”
“최근에는. 당분간 그럴 것 같아.”
강우는 잘 배웠다며 꾸벅 인사하고 운동장을 떠났다. 물리학으로 접근해보면 공정혁을 도울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천재성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 * *
외국으로 유학 갈 생각이라면, 그것도 장학금을 받으면서 다니겠다면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그중에 강우에게 최적의 수단은 바로 외국 교수에게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하는 방법이었다.
이를 위해 강우는 올림피아드 성적이 필요했다. 천재임을 증명하는 데에는 수학 올림피아드나 물리 올림피아드 성적이 유리했다. 하지만 국내 올림피아드 시험을 치르지 못하게 되어 지금 당장은 좌절된 상황.
“내년을 기약하자.”
다른 방법은 외국 교수에게 자신의 관심사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해당 교수가 연구 중인 프로젝트에 필요한 인재임을 강조함으로써 유학의 길이 열리기도 했다. 보통 대학원 과정 진학에서 많이 쓰이는 방법인데 학부 과정에서도 응용할 여지가 있다.
강우는 학기 초에 있었던 강연을 떠올렸다.
MIT 물리학과 교수인 프리드 요셉. 전공 분야도 상온 핵융합으로 강우와 같다. 현재 그에게 징검다리를 놓아줄 가장 강력한 후보였다.
“요셉 교수와 친분을 터야 하는데…….”
과거 그가 연구했던 자료를 일부 풀어놓으면 친분을 맺기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얼마나 자연스럽게 관계를 발전시키느냐다. 지금의 그는 일개 고등학생에 불과하기에 최대한 의심 받을 만한 행동을 자제해야 했다.
강우는 과거 손강우 시절 이메일로 친분을 나누었던 유명 외국 교수들을 떠올렸다. 이들 가운데 적합한 대학을 고르면 된다.
“MIT 정도면 나쁘지 않아.”
강우는 노트북을 열고 첫 후보인 요셉 교수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다. 그날 강연에서 확실한 인상을 심어줬기에 이 부분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관련 분야에서 어떤 관심이 있는지 더 세부적으로 언급했다.
마지막으로 최종 목적을 밝혔다. 최근 발표된 유명 학술지 논문이 고등학생 신분인 자신으로서는 구하기 어려워 대신 구해주기를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오래전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논문을 구하기 어려웠고 그때는 우편을 통해 외국에서 직접 자료를 받는 일이 흔했기에 요셉 교수도 이런 접근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다운받은 PDF 파일을 보내주겠지만.
작성한 이 메일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있을 때 톡이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