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마구 개발 (2)
- 차도도 쌤 : 어제는 왜 안 보냈어? 화남(이모티콘).
- 강우 : 그게…… 피곤해서요. 도망(이모티콘).
- 차도도 쌤 : 방학이라고 게으름 피우지 말랬지?
- 강우 : 제가 어디 게으름 피울 사람처럼 보이세요?
- 차도도 쌤 : 응. 게으름 하면 너잖아! 신 선생님한테는 보냈어?
- 강우 : 네.
- 차도도 쌤 : 강우야! 너 왜 사람 차별해?
차별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톡을 보내지 않으면 신새벽은 칼같이 전화를 거니까. 2학기 중간고사 때도 화학 점수가 엉망이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겠다나. 온갖 협박이 난무하니 어쩔 수 없다.
반면 차도도는 아직까지 전화한 적은 없었다.
- 강우 : 요즘은 그…… 핵융합 그거 공부하고 있어요.
- 차도도 쌤 : 너무 무리하지 마. 그거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아! 넌 고등학생 수준이 아니었지.
물리 기말고사까지 확실하게 만점을 받은 이후로 차도도가 그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어쩌면 그날 페스타 강연 이후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차도도를 한편으로 끌어들였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 차도도 쌤 : 그래도 화학을 공부한다니까 다행이다. 다음 학기엔 전 과목에서 다시 성적이 좋아지겠네.
- 강우 : 쌤, 그거 아세요? 전 물리를 공부했는데 신 쌤은 화학이라며 좋아하시더라고요.
- 차도도 쌤 : 무슨 말이야?
- 강우 : 핵융합 공부하면서 수소 원자론 공부한다고 보냈거든요.
수소 원자의 구조는 물리와 화학 양쪽에서 다룬다. 수소와 헬륨 원자의 연구는 핵융합의 핵심이다. 보어의 수소 원자론은 20세기 초에 확립된 가장 기초적인 내용이다. 강우는 상온 핵융합 연구를 진행하면서 적당히 신새벽에게 화학 공부를 하고 있다고 우겼다.
- 차도도 쌤 : 음흉하긴.
- 강우 : 신 쌤한테 이르지 마세요.
- 차도도 쌤 : 알았다. 잘 자렴. 잠(이모티콘).
- 강우 : 안녕히 주무세요.
톡을 마치고 나니 차도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적극적으로 반 학생을 보살피는 그녀의 성격과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는 그녀의 외모를 떠올리니 새삼 그녀가 그리워졌다.
“손강우였다면…… 그녀와 사귈 기회가 있었으려나…….”
과학에 그것도 물리학에 관심 있는 여자는 정말 드물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차도도는 정말 독특한 존재였다. 손강우 시절에는 그 나이가 되도록 연예를 해보지 않았었고 결혼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다. 박사 학위를 따느라, 또 학계에서 자리 잡느라 정신이 없었던 때문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마음이 통하는 여자를 만나지 못한 탓이다.
과학을 이해해주는, 또 과학에 몰두하는 남자를 좋아하는 그런 여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차도도와 만날 기회가 있었으면 사귈 수 있었을까?
현재 강우와 차도도의 극복할 수 없는 나이 차를 생각하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손강우를 떠올리게 됐다. 하지만 곧 그는 실소를 머금었다.
신기하게도 손강우와 강우의 나이 차는 정확히 20년이다. 그리고 강우와 차도도의 나이 차는 10년. 차도도는 정확히 그 중간이었다. 우연이라 하기엔 뭔가 필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에이, 내가 뭔 생각을…….”
괜히 머릿속을 어른거리는 상상들을 지우려고 강우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쉽긴 하네. 5년 정도였으면 정말 노력해봤을 텐데.”
문득 핵융합의 선구자였던 한 과학자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오래전, 과학자들은 태양이 빛나는 이유를 고민했다.
그 과학적인 가능성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이고 이를 바탕으로 핵융합이 태양 에너지의 원천임을 확립한 사람이 바로 영국의 과학자인 에딩턴이다.
에딩턴은 빛이 중력에 의해 휘어진다는 상대성이론을 실험적으로 처음 증명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핵융합 원리를 밤낮으로 고민하던 젊은 시절의 에딩턴이 멋진 아가씨와 데이트를 하게 됐다. 야밤에 공원 벤치에 앉아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던 에딩턴은 문득 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보았다. 그 별을 보는 순간 그는 핵융합으로 저 별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늘에 찬란히 빛나는 별이 보이죠? 저 별이 왜 빛나는지 아세요?”
아가씨가 하늘을 올려다보자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낭만적인 감성에 사로잡힌 여자는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이라든가 ‘내 마음이 별빛이 되어 당신의 가슴에 닿고 있어요.’라는 식의 다정한 말이 이어지리라 예상하고 행복에 사로잡혔다.
정작 에딩턴의 다음 말이 분위기를 깼다.
“저 별은 수소 원자가 합쳐져 헬륨 원자가 되면서 빛을 내는 거예요. 그 에너지양은 아인슈타인의 에너지 식에 따르면…….”
순간 분노한 아가씨에게 뺨을 얻어맞고 에딩턴은 절교를 당했다.
당연히 골수 과학자였던 에딩턴은 아가씨가 왜 화를 내는지 알지 못했다.
오래전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손강우는 웃고 넘어갔다. 그런데 정말 과학자를 이해하는 여자를 찾기 어려웠다. 덕분에 그의 인생에서 결혼이나 연애 또한 완전히 지워버렸었다.
차도도였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과학자의 삶을 이해해주지 않았을까. 그 반응이 솔직히 너무 궁금했다.
데이트할 때 문과생은 여자와 정신적인 교감을 하고 이과생은 육체적인 교감을 나눈다고 한다. 육체적인 교감이라 하여 모두가 생각하는 그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서의 육체적인 교감이란 머리카락 굵기와 반도체 나노 공정을 비교하거나 몸무게에서 물의 함량을 계산하는 식이다.
키스할 때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는 원인을 문과생은 정신적인 교감에서 찾지만, 이과생은 세포의 산소 부족에서 찾는다.
차도도라면 그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있지 않을까.
강우는 다시 휴대폰을 열어 톡을 보냈다.
- 강우 : 고마워요. 쌤.
- 차도도 쌤 : ???
- 강우 : ㅋㅋㅋ.
- 차도도 쌤 : 자라, 자. 잠(이모티콘).
차도도를 떠올리며 흐뭇한 웃음을 지을 때였다. 단체톡방에 알림이 들어왔다.
- 최대우 : 보냈다!!
- 손차희 : ???
- 윤수아 : 뭐래?
- 최대우 : 오징어.
- 윤수아 : 오징어 겜 봤냐고?
- 최대우 : ???
- 손차희 : 오징어 겜 동영상 그만 보고 공부해라 공부.
- 강우 : 흐아암(이모티콘).
고곽천재도 하루에 한 번씩은 톡방이 활발해진다. 대충 유추해보니 최대우가 말린 오징어를 택배로 보냈다는 뜻이다. 울릉도에서 보내려면 택배비가 더 비쌀 것 같긴 한데. 어쨌든 조만간 입이 심심하진 않을 것 같다.
강우는 차도도와 고곽천재 친구들을 떠올리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교수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던, 마도환의 흉계에 분노하던 손강우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은 그들이 있기에 더 행복했다. 그때보다 더 긴 시간이 남았기에, 그래서 미래가 더 밝다고 믿기에 그는 행복했다.
* * *
오랜만에 강우는 중학교 운동장을 찾아갔다.
그때와 비슷한 시각,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점차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그때처럼 운동장 한쪽 구석에서 열심히 공을 던지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열심이네. 정말 절박한가 보다.”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최후의 도전을 앞둔 공정혁은 필사적이었다. 아마 그동안 빠지지 않고 매일 나와서 혼자서 열심히 공을 던졌을 것이다.
다른 운동 종목도 마찬가지이듯 운동에서는 신체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 공정혁이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구속이 획기적으로 증가할 일은 없었다. 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에 프로야구 구단에서도 그를 잡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간 강우는 틈틈이 그를 도울 방법을 찾았다. 그가 운동선수가 아니기에 또 야구 지식이 일천하기에 그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는 공의 변화 원리를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스포츠에 과학이 도입되었고 야구도 다르지 않다. 과학 덕분에 기존에 믿던 야구 개념이 상당히 합리적으로 바뀌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강우는 노력하는 자를 좋아한다. 그는 자신의 천재성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 했다. 인생에서 노력이 항상 보상받는 것은 아니지만 노력하는 자라면 도울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그가 고곽천재 친구들을 은연중에 돕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다.
“오늘도 나오셨네요?”
강우는 공정혁에게 다가가서 인사했다.
마침 쉴 시간이 된 공정혁이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야구 좋아하나 봐?”
“보는 건 좋아하죠. 또 이론적으로 파고드는 것도 좋아하고요.”
그때와 달리 이론이 더 붙었다.
“흐음, 이론이라…….”
공정혁이 실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공정혁 또래의 선수들은 야구 이론을 공부할 여가가 없었다. 일단은 감독이나 코치의 지도를 맹신하고 선배들로부터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거창한 이론은 선수 생활을 은퇴한 후 코치가 되면서 비로소 배운다. 지금은 연습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지난번에 가르쳐 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강우는 일단 감사를 표했다. 공정혁이 별것 아니란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 보니 우투수는 우타자에게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가 효과적이라 하더라고요.”
“그렇지. 대개 주무기인 변화구를 장착할 때 커브냐 슬라이더냐로 고민을 많이 해. 둘 다 잘 던지기는 어렵거든.”
이제는 강우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다.
“그런데 우타자에게 몸쪽으로 흐르는 커브는 어때요? 또는 좌타자에게 몸쪽으로 휘는 커브요. 정확하게는 커브와 슬라이더의 중간이지만요.”
“그렇게 흐르면 그건 마구지. 좌투수가 주무기로 삼는 변화구니까. 그건 쉽지 않아. 쉬우면 이미 많이 던지겠지.”
지금까지 새로운 변화구를 개발하려고 많은 사람이 고심하고 노력했다. 덕분에 수많은 변화구 구종이 탄생했다. 하지만 강우가 말한 변화구는 기존의 상식을 다소 벗어나는 것이었다.
몸쪽으로 휘는 변화구는 대단히 효과적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몸으로 날아오는 공에 두려움을 느껴 방망이를 휘두르지 못하고 피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투심이나 서클 체인지업이 그런 변화를 보이죠.”
“잘 아네.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투수인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서클 체인지업으로 타자를 농락했었지.”
“그런 구종은 던지기 힘든가요?”
“당연히 그렇겠지? 쉬울 리가 없잖아?”
변화구를 익히는 것은 재능의 영역에 속한다. 체격 요건에 의해 좌우되는 투수의 구속과 다양한 구종을 익히는 능력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제가 볼 때 형은 변화구에 재능이 있어요.”
“재능은 무슨.”
공정혁은 내심 쓰게 웃었다. 직구가 별 볼 일 없으니 다른 투수 대비 변화구를 열심히 연습한 것은 사실이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변화구를 잘 던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프로에서 살아남기에는 그의 재능은 턱없이 부족했다.
“커브와 서클 체인지업의 중간 정도의 궤적을 가지는 변화구를 개발해봤는데요, 생각 있으세요?”
“네가 어떻게? 넌 야구 선수도 아니잖아?”
“그게……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눈에 딱 보이거든요.”
공정혁의 눈이 크게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