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85화 (85/325)

제85화 마구 개발 (3)

당연히 공정혁은 믿지 않았다.

새로운 변화구를 개발하는 일은 메이저리그 선수도 쉽지 않다. 변화구를 남에게 지도하는 일도 은퇴를 앞둔 유명 선수나 코치가 되어서야 가능해진다. 그만큼 투구 지도는 섬세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엊그제 변화구 설명을 들은 고등학생이 새로운 변화구를 구상했다니? 그것도 야구 선수가 아닌, 과학자로서? 듣도 보도 못한 기현상이었다.

“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야구공의 실밥은 단순해 보이지만 무수히 많은 변화를 만들어내죠. 사람의 손가락은 다섯 개이고 이를 이용하여 야구공을 잡는 방법 또한 수만 가지가 있어요. 그 다섯 개의 손가락에 힘을 주는 방법을 달리하면 셀 수 없이 많은 궤적을 그리는 구종을 만들 수 있어요. 그것을 과학적으로 시뮬레이션하면…… 의외로 손쉽게 적합한 구종을 개발할 수 있죠.”

“무슨 말이야?”

공정혁은 열심히 설명하는 강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히 눈앞의 학생보다 야구를 훨씬 잘 알고 있음에도 지금은 한국말이 아닌 외계어를 듣는 기분이었다.

“제가 그날 봤는데요, 형은 커브를 잘 던져요. 그 커브를 조금 변형시킨 구종은 몸에 이미 익숙해서 쉽게 배울 수 있고 타자의 눈도 속이기 편해요. 그런 관점에서 개발해봤는데…… 가장 좋은 게 서클 체인지업과 비슷한 구종이었어요. 체인지업의 특징이 뭐죠?”

“직구보다 구속이 느리지.”

“이건 일반 체인지업보다 구속이 빨라요. 서클 커브라고 이름 붙이면 되려나? 아니면 고속 커브? 하여튼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익혀 보실래요?”

무심코 고개를 젓던 공정혁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강우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새로운 구종을 하나 장착한다고 상황이 크게 나아질까? 직구 구속이 엉망인데. 지금 그가 구사하는 직구와 커브는 프로 세계에서 모두 어중간했다. 타자를 전혀 압도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어중간한 구종 하나가 더 늘어봐야 게임 체인저가 되지 못한다.

“누구나 투수라면 선발투수를 하고 싶죠. 아니면 터프한 마무리라든가. 그런데 말이죠. 셋업맨, 아니 스페셜리스트라고 들어봤어요? 제가 알려드리는 구종을 연마하시면 우타자 스페셜리스트가 될 수 있어요. 적어도 한 타자만은 완벽하게 틀어막는. 우타자에게는 저승사자죠. 이걸 확실하게 인식시키면 다시 입단하실 수 있을 거예요.”

강우의 설명을 듣는 순간 공정혁은 지금까지 자신이 놓치고 있던 핵심을 깨달았다.

그동안 막연히 연습만 해왔다. 선발투수 재목이 아님에도 9회를 완투할 수 있는 체력과 힘, 구질을 길렀다. 그러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니었다. 답이 없었다.

지금부터 오로지 우타자 한 명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능력을 키운다면? 어쩌면 입단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미 퇴물 선수가 된 몸이 아닌가. 그는 눈앞의 고등학생을 믿어보기로 했다. 야구를 전혀 모를 것 같은 학생, 야구를 과학으로 해석하는 학생에게 몇 분간만 시간을 내기로 했다.

“그래, 그…… 서클 커브? 어떻게 하는 거냐?”

“고속 슬라이더라고 들어보셨죠? 일반 슬라이더와 조금 궤적이 다른. 이것도 비슷한 개념에서 출발했는데…….”

강우는 직접 야구공을 쥐는 그립을 보여줬다.

공정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커브 던질 때보다 검지와 중지를 조금 더 벌리고요, 엄지에는 힘을 더 가하고…….”

물론 강우는 공을 던질 줄 모른다. 다만 이론적으로 설명할 뿐이다.

공정혁은 자신이 알던 커브 그립과 새로운 구종의 그립의 차이점을 쉽게 이해했다.

“그게 가능할까?”

“처음엔 안 되겠지만 조금 연습하면 될 거예요. 크게 차이 나지 않거든요. 커브와 투구폼도 같아서 타자를 속이기도 쉽고요. 커브에 비해 낙차는 조금 줄어들지만 속도가 빠르고 타자 몸쪽으로 휘어서 훨씬 위력적이죠.”

들어본 적이 없는 구종이다. 하지만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가능하리란 기대감이 차올랐다.

“일단 던져볼게.”

공정혁은 강우가 알려준 대로 공을 잡고 몇 번 팔을 저었다. 몸의 움직임이 어색하지 않다. 처음 변화구를 배웠을 때보다 훨씬 편했다.

투구 지점에서 깊은숨을 들이마신 공정혁은 목표점을 노려봤다.

다시 그립을 확인한 다음 천천히 몸을 감았다. 그리고 크게 팔을 휘두르며 공을 던졌다.

퍽!

어이없게도 야구공이 지면을 향해 강하게 날았다.

“음……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죠.”

강우가 위로의 응원을 보냈다.

처음 커브를 배우던 날도 스트라이크존에 넣을 때까지 수백 번을 던졌었다. 공을 땅에 패대기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공정혁은 다시 몇 차례 공을 던져봤다. 슬슬 감이 온다. 기존에 알던, 익숙하던 상식에서 조금 벗어나긴 했지만 던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왔다.

그러기를 몇 차례. 어느 순간 공이 스트라이크존에 제대로 들어갔다.

“어? 되네?”

“다시 던져보세요.”

공정혁은 이번에는 조금 더 힘을 넣어 팔을 휘둘렀다. 야구공을 쥔 그의 손이 힘차게 허공을 갈랐다.

팡-

정확히 스트라이크존에 찔러넣었다.

순간 공정혁은 눈을 부릅떴다. 그의 손을 벗어난 야구공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직구는 당연히 아니었고 그렇다고 커브도 아니었다. 서클체인지업과도 달랐다.

“이건…… 마구다!”

물론 웹툰에서 보는, 지렁이 궤적의 마구와는 다르다. 마구라 칭한 이유는 기존에 볼 수 없던 궤적을 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당장에는 처음 보는 궤적을 그리는 이 공을 칠 타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마구가 아니라 서클 커브요!”

“그래, 서클 커브…….”

“이름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이름 붙여도 되고요.”

“아냐, 그 이름 좋아!”

무엇보다 커브를 던지던 자신이 쉽게 적응할 수 있어서 편했다. 몇 번 던져보니 꽤 위력적인 구종임을 간파할 수 있었다. 적어도 강우의 말처럼 우타자에게 승부수로 사용할 수 있는 구종이다.

이 서클 커브를 앞세워 입단 테스트를 받으면, 그를 우타자 스페셜리스트로 키우겠다는 안목을 가진 코칭 스태프라면 분명히 그를 뽑을 것이다.

감격한 공정혁이 다시 몇 차례 공을 던졌다. 점점 익숙해지면서 공이 힘차게 날아갔다. 또 궤적도 더욱 분명해졌다.

“어때요?”

“굿이다!”

공정혁은 자신이 귀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이 녀석은 그를 프로야구단으로 끌어주기 위해 나타난 귀인이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강우가 꾸벅 인사하고 몸을 돌리자 공정혁은 급히 불렀다.

“이름이 뭐야?”

“강우요.”

“학교는?”

“고려 과학고요.”

어쩐지 과학이 어쩌고 하면서 알 수 없는 이론을 늘어놓더라니. 이대로 인연을 마무리하기에는 염치가 없다. 정말 입단하게 되면 치맥이라도 사야…… 아, 미성년자니까 치킨이라도 사야 했다.

“전화번호 알려줄래?”

공정혁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 * *

“그게 되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강우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이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과학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음을 증명했다. 게다가 해당 분야의 기초 이론을 공부하면 그의 천재성으로 관련된 난제를 풀 수 있었다.

천재란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아는 사람이라더니 지금 그가 바로 그 천재의 정점을 달리고 있었다.

기초적인 야구 구종을 배우고 변화구의 기본 물리 이론을 터득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구종을 개발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이런 현상은 강우로 빙의한 초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능력이었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을 도왔어. 그것만으로도 뿌듯하네.”

만일 공정혁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야구단에서 쫓겨난 비참한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도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새로운 구종 하나만으로 공정혁의 인생이 바뀌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도움은 될 것이다. 지금부터 어떻게 일어서느냐는 순전히 공정혁의 몫이었다.

강우는 날마다 하던 연구를 시작하려고 노트북을 켰다.

반가운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MIT의 요셉 교수였다.

태평양 건너 멀리 있음에도 이렇게 빨리 회신을 받아볼 수 있는 것은 과학의 혜택이다.

- 강우 군, 연락 주어서 고맙네. 그날 강연 때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적잖게 놀랐었네. 바쁜 일정 때문에 대화를 나누지도 못하고 헤어져서 안타까운 심정이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하늘에 감사하네.

- 강우 군의 핵융합 지식은 평범한 물리학자 이상이라 생각하네. 고등학생이라는 여건으로 보면 혼자서 그 수준까지 노력했으리라 생각하는데 이는 정말 놀라운 일일세. 강우 군이 천재라 확신하네.

- 핵융합 자료를 요청하니 내가 오히려 반갑네. 자네 같은 천재가 핵융합에 뛰어든다면 이 분야의 앞날이 대단히 밝아지리라 생각하네. 알다시피 핵융합은 아직도 기술 난제가 겹겹이 가로막고 있지 않나. 기쁜 마음으로 요청한 논문 사본을 보내네. 앞으로 더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주저 말고 연락하게. 동료 연구자가 생긴 기분이라 정말 기쁘네. 프리드 요셉.

영어로 된 답신에는 짧지만 핵심이 잘 드러나 있었다.

자료를 요청하면서 요셉 교수에게 이름을 각인하는 효과를 충분히 달성했다. 지금은 시작일 뿐이지만 이렇게 자료를 요청하고 연구 결과를 주고받다 보면 3년 후에는 그의 유학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었기에 강우는 바로 감사하다는 답장을 썼다.

이메일 보내기를 눌렀을 때 밖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우야, 택배 왔다!”

택배? 딱히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한 기억이 없었다.

강우는 후다닥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께서 커다란 상자를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거 뭐예요?”

“내가 어케 아니? 보낸 사람이…… 어? 울릉도네?”

울릉도라면 연고자가 최대우밖에 없다.

상자를 뜯자 안에서 반건조 오징어가 잔뜩 나왔다. 울릉도라 택배비가 더 많이 들 것 같은데?

“이거 뭐니?”

“아, 제 친구가 울릉도 살거든요.”

강우는 입가에서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아쉽게도 이 집에는 술 마시는 사람이 없어 술안주로는 불필요하지만, 입이 심심할 때는 제맛이고 반찬으로 먹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그 친구에게 고맙다고 전해주렴.”

“네, 그럴게요.”

한 마리 구워 맛을 보면서 강우는 톡을 보냈다.

- 강우 : 받았다.

- 윤수아 : 나도 받았는데.

- 손차희 : 여름학교 숙제 중. 공부(이모티콘).

요즘 손차희는 수학 올림피아드 1차 시험을 통과하여 한국대에서 2주간 수학 수업을 받고 있었다. 즉 수학 올림피아드 여름학교 수강생이다. 매일 수학 숙제가 많다고 톡방에서 징징대는 중이었다.

정작 주인공인 최대우는 소식이 없었다.

- 윤수아 : 대우야! 뭐해?

- 윤수아 : 화남(이모티콘).

- 윤수아 : ???

- 최대우 : 흐아암.

- 강우 : 뭐야?

- 최대우 : 블로그 때문에 밤샘.

방학 기간에 최대우는 본격적으로 블로그에 매달렸다. 물리 문제풀이 센터를 방문하는 사람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이제는 최대우도 제법 유명한 블로거가 됐다. 물론 공부, 또는 물리라는 주제의 한계 때문에 그래 봐야 얼마 되지 않지만.

당연히 최대우가 주로 방문하는 걸그룹 블로그와는 비교 불가였다.

- 최대우 : 강우야, 이상한 문제 질문하는 사람 또 왔어. 해결해줘.

강우는 재빨리 블로그를 확인했다.

예전에 두 번이나 고등학교 과정을 벗어난, 대학교 일반 물리 과정도 벗어난 질문을 던졌던 사람이 또 질문을 올려두고 있었다. 그들의 실력을 테스트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였다. 슬슬 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어쨌든 이 사람에게 질 생각은 없다.

“어떤 문제든 다 풀어주마! 덤벼!”

강우는 호승심을 불태우며 질문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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