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86화 (86/325)

제86화 수학여행 (1)

질문은 한결같았다.

물리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면 풀기 갑갑한 그런 문제였다. 이번에는 광학. 다소 고전적이면서도 산업에서 응용되는 분야이다.

굴절률이 다른 유리 재질을 배치해서 색수차와 구면수차를 최소화하는 문제였다. 최근에는 비구면 설계 기법이 도입되고 전문적인 광학 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 손으로 직접 계산할 일은 거의 없어졌지만.

“질문자의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데?”

처음에는 물리학과 대학생이 장난삼아 질문하는 게 아닐까 의심했었다. 그런데 오늘 질문을 보는 순간 이미 대학을 졸업한 전문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유형의 질문은 산업 현장이나 관련 프로젝트의 담당자가 아니라면 하기 어려웠다.

강우는 예전에 배웠던 광학 지식을 떠올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문제를 풀어냈다. 최근 휴대폰 다군 렌즈 설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이너포커스 아이디어를 차용했다.

아마 질문한 상대도 이 해답을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이 블로그는 엄연히 고곽천재라고, 과학고 학생이 운영한다고 밝히고 있다. 지난번 질문까지는 물리학과 대학생이라면 어찌어찌 대답할 문제였지만 오늘은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저쪽에서도 고등학생일 리가 없다고 의심하겠지.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일이었다.

강우는 블로그에 답을 올렸다. 이렇게 미지의 대상과 물리를 소통할 수 있어서, 서로 지식을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러고 보니 요즘 이 시간쯤 되면 꼭 연락 오는 사람이 있었다.

- 신새벽 쌤 : 강우! 화학 공부했어?

- 강우 : 당연히 열심히 공부했죠.

- 신새벽 쌤 : 증거를 보여라. 사진 올려봐.

화학책이라고는 펴본 적이 없는 강우는 급히 화학 참고서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책상을 찍어 톡으로 전송했다.

- 강우 : 봐요, 화학 공부하고 있잖아요.

잠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강우는 확실하게 입증했다고 희희낙락했다.

다음 순간 다시 신새벽에게서 톡이 날아왔다.

- 신새벽 쌤 : 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야동을 봐? 화남(이모티콘).

- 강우 : 네?

갑자기 어리둥절해진 강우는 눈을 비비며 노트북 화면을 쳐다봤다. 하필이면 사진 귀퉁이에 노트북 모니터가 일부 찍혀 있었다.

- 신새벽 쌤 : 노트북 화면에 그거 뭔데!

- 강우 : 그, 그건 대우 때문에……. 그리고 이거 야동 아닌데요.

- 신새벽 쌤 : 학교에서 만나면 넌 죽었어!

젠장, 방금 최대우가 요즘 열심히 덕질하는 그룹이라며 전송해준 파일을 닫지 않은 게 실수였다.

* * *

여름방학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2학기의 시작은 체험 학습을 겸한 수학여행으로 문을 열었다.

방학 마지막 날 강우는 학교 기숙사에 돌아왔고 다음 날 아침 친구들과 함께 제주행 비행기를 타러 김포공항으로 나갔다.

3박 4일의 제주도 여행이었는데 이름도 거창하게 제주도 탐사 연구였다. 여행목적은 제주도 자연환경 탐구. 만장굴, 천지연 폭포, 성산 일출봉 등 화산지형인 제주도의 지질을 직접 탐사해야 했다. 대미는 한라산 등반. 화구호란 무엇인가를 체험하는 대장정이다. 일정을 살펴보는 강우와 최대우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하아! 설마 한라산 꼭대기까지 올라가진 않겠지?”

“작년 선배들은 정상까지 등반했었대.”

“한라산 높이가 얼만데?”

“해발 1950미터.”

“으악! 울릉도 최고봉의 몇 배야?”

“두 배 정도 될걸? 너, 거기 꼭대기는 올라가 봤냐?”

“아니, 내 몸을 봐. 올라가면 죽지. 아니면 무너지거나.”

강우는 최대우와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공항 로비를 둘러봤다. 곳곳에 고려 과학고 학생들이 보였다. 손차희와 윤수아는 어디에 있을까? 서울 거주 학생들은 어제 기숙사로 오지 않고 아침에 바로 공항으로 왔다.

그들의 눈에 확 띄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기 있네.”

강우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방학 동안 못 봐서 그런지 너무 반가웠다.

차도도, 신새벽, 손차희, 윤수아. 네 사람은 누가 봐도 여행 중임을 드러내는 패션이었다. 가벼운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 거기에 신새벽은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여름이라 어쩔 수 없는 차림새라지만 네 여인이 늘씬한 다리를 고스란히 내놓고 있으니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쌤! 안녕하세요.”

“강우야, 오랜만이네. 방학 잘 보냈니?”

차도도가 반갑게 인사를 받았다.

“당연히 잘 보냈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럼요.”

의례적인 안부 인사가 오가는 사이 신새벽이 끼어들었다.

“공부는 무슨! 맨날 걸그룹 동영상만 봤잖아?”

그때만 실수로 잘못 올라간 건데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다. 아니라고 반박하려는 순간 최대우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강우야! 너도 걸그룹 팬이냐? 어느 그룹이야? 나랑 같냐?”

모두 이 녀석 때문인데 이 자식을 때릴 수도 없고. 강우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자자, 줄 서봐! 탑승 수속 밟아야 하니까!”

차도도가 학생들을 줄 세우자 신새벽도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저 선생님은 왜 남의 반에 와서 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 * *

유리창 너머로 관제탑을 바라보며 강우는 반 친구들과 함께 탑승대기실에 있었다. 뜨고 내리는 비행기가 시선을 끌고 요란한 엔진 소음이 귀를 어지럽혔다.

“날씨 좋은데?”

햇살이 비치는 오전의 공항 풍경은 놀러 가기에 딱 적합해 보였다.

“태풍 온다더라.”

난데없는 윤수아의 말에 강우는 화들짝 놀랐다.

“어? 이 좋은 날에?”

“제주도 남쪽에서 북상 중이래. 어쩌면 우린 다시 못 돌아올지도 몰라.”

맑은 하늘이라 태풍 예보를 믿기 어렵지만, 요즘의 일기예보는 안타깝게도 그리 틀리지 않는 편이었다.

강우의 옆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최대우가 투덜댔다.

“하아! 그럼 한라산 등반은 어떡하냐?”

최대우의 최고 관심사는 한라산 등반이었다.

“태풍 오면 안 가겠지?”

“하아, 태풍 오면 좋겠다.”

산에 오르기 싫은 최대우의 희망 사항에 모두가 도끼눈이 되어 그를 노려봤다.

다행히 제주도로 가는 날과 오는 날에는 태풍을 피할 수 있어 전체적인 수학여행 일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현지에서 태풍을 만나면 제주도 지질 탐사가 대거 취소되겠지만.

친구들이 태풍의 현재 위치와 예보를 휴대폰으로 찾고 있을 때 강우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익숙한 사람의 등장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여름이라 재킷 없이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 미남형 얼굴에 당당한 걸음걸이. 바로 그의 원수인 한국대 마도환 교수였다.

‘저놈이 여기 웬일이야?’

공항에서 이곳까지 들어왔으니 저 녀석도 비행기를 탄다는 뜻이다. 그것도 같은 비행기를 탈 가능성이 컸다.

‘하느님, 제발 저놈과 같은 비행기는 아니라고 해주세요.’

걸어오던 마도환이 웅성대는 학생들을 발견하고는 살짝 찌푸린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이어진 마도환의 움직임은 적어도 강우에게는 최악이었다.

차도도를 발견한 마도환이 그녀에게 접근했다.

“차 선생님?”

“어? 마도환 교수님! 안녕하세요!”

마도환을 발견한 차도도가 반갑게 인사했다.

그 모습에 강우는 기운이 쭉 빠졌다.

“여기서 뵙다니! 인연이네요. 제주도 가세요?”

“수학여행요. 학생들과 함께.”

“아하! 저도 제주도 갑니다.”

“무슨 일로요?”

“물리학회가 있거든요.”

그 말에 강우는 과거의 기억이 났다. 한국물리학회에서는 보통 일 년에 두 번, 춘계, 추계 학술대회를 열었다. 올해는 제주도로 장소로 정하면서 추계 학술대회 일정을 앞당겼다. 그 바람에 여름 끝자락에 걸리게 됐다.

하필이면 수학여행과 물리학회 학술대회 일정이 겹치다니. 정말 묘한 인연이었다.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가 강우를 좌절에 빠트렸다.

“어디에 머무르시나요?”

“서귀포 한라 리조트에서 지낼 예정이에요.”

“아! 이런 인연이! 학술대회장이 한라호텔 컨벤션센터입니다. 바로 옆이네요!”

“아, 정말요?”

“시간 나시면 호텔로 찾아오세요. 제가 식사 대접이라도 하겠습니다.”

마도환의 입 모양이 미소로 확 벌어졌고 강우의 입 모양은 정반대로 축 처졌다.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원수인 마도환이 차도도와 대화를 나누는 자체만으로도 거슬렀으니까. 아무래도 수학여행 내내 기분이 별로일 것 같다.

옆에 가서 방해하고 싶지만……. 예전에 강우로 빙의했을 때 병원에서 마도환을 만나 사고 친 경험이 있어 괜히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마도환과 모르는 사이인 것이 더 낫다.

강우가 침울한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리자 윤수아가 옆구리를 툭 쳤다.

“왜 그래?”

“태풍 때문에. 날려갈까 봐.”

“대우 다리만 붙잡고 있으면 될걸?”

역시 천하태평인 윤수아의 위로를 받으며 강우는 애써 차도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 * *

비행기에 탑승한 후에도 강우는 기분이 별로였다.

자리를 바꿨는지 저 앞에 차도도와 마도환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제는 그 옆에 김윤택까지 붙어서 열심히 대화 중이었다.

약간 거리가 있어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는 않지만, 강우가 보기에 쓸데없는 대화가 분명했다.

물론 강우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활주로 앞에 섰다.

곧 이륙할 시간. 언제 하늘로 날아오를지 기대하면서 강우는 창밖을 쳐다봤다. 비행기 날개와 그 아래 붙은 엔진이 눈에 띄었다.

이 비행기가 날다가 추락하여 마도환만 딱 죽으면 안될까. 차도도와 나란히 앉은 마도환을 보면 괜히 저주를 퍼붓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비행기 타봤어?”

최대우가 잔뜩 기대감에 부푼 모습으로 질문했다.

“난 유럽에도 갔다 왔어.”

“난 아빠 따라 미국에.”

손차희와 윤수아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들의 시선이 강우에게 모였다.

당연히 손강우 시절 비행기를 꽤 탔었다. 그때 그도 국내, 국외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 참석하느라 수도 없이 다녔으니까. 그런데 시골에서 자란 강우를 생각하니 차마 타봤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비행기는 처음이야.”

“나도 처음인데. 여기 엄청 신기하다, 그지?”

최대우가 바로 맞장구쳤다.

나란히 앉아서 대화하고 있자니 방송이 들렸다.

- 관제탑 신호를 기다리는 관계로 이륙이 잠시 늦어지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그때 맨 앞에 앉은 차도도가 승무원과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벌떡 일어나 학생들을 향해 소리쳤다.

“자, 명색이 과학고 학생인데 그냥 갈 수 없겠죠? 한국대 물리학과 교수님께서 퀴즈를 내시겠답니다. 맞춘 학생에게 상품도 주신대요!”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한국대란 말에 학생들이 환호했고 마도환이 일어나 기침하면서 학생들을 둘러봤다.

“반갑습니다. 한국대 교수 마도환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가 오늘 제주도에 가는 비행기를 타고 있죠? 비행기가 어떻게 하늘을 나는지 아는 학생?”

퀴즈는 간단했다. 적어도 과학고 학생이라면 비행기 원리 정도는 안다. 여러 학생이 손을 들었다.

“역시 과학고답네요. 자, 누가 답해볼까…….”

“저요! 저요! 저요!”

꼭 상품을 타겠다고 발광하는 녀석이 있었다. 바로 고현성이다.

마도환의 눈에도 유달리 눈에 띄었는지 바로 지명했다.

“거기, 파란 셔츠 학생? 말해보게.”

“양력 때문입니다.”

“그렇지! 양력! 양력이 어떻게 발생할까? 설명해보게.”

고현성이 의기양양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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