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수학여행 (2)
비행기가 나는 원리는 날개 모양과 관련 있다.
공중에 뜬 비행기에는 엔진으로 인한 추력, 공기저항에 의한 항력, 중력, 양력이 발생한다.
이 가운데 가장 특이한 힘은 양력이며 이는 날개의 형상, 즉 익형 때문에 발생한다.
양력은 날개 주위를 흐르는 공기와 관련 있기에 비행기가 일정 속도 이하로 떨어지면 양력이 감소하고 실속한 비행기는 추락한다.
“익형, 즉 에어포일 주위를 흐르는 공기의 흐름은 베르누이 정리를 이용해 증명할 수 있습니다. 베르누이 정리는 동일한 유선상의 유체는 에너지의 합이 일정하다는 것으로…….”
어려운 용어가 고현성의 입에서 나왔다. 베르누이 정리는 물리 고교 과정, 유체역학에서 일부 다루기에 과학고 입시를 준비하면서 배운 내용이다.
베르누이는 18세기의 유명한 물리학자이자 수학자다. 과학사에서는 유명한 베르누이가 모두 세 사람이나 된다.
다니엘 베르누이, 요한 베르누이, 야곱 베르누이.
모두 같은 가문 출신으로 물리학과 수학에서 큰 업적을 남겼고 흥미로운 일화도 많다.
강우는 방학 때 변화구를 고민하면서 양력을 연구했었다. 이때 역시 베르누이 정리를 기본 원리로 상정하였다.
왠지 그날의 기분이 떠오르는 듯하여 강우는 흐뭇한 심정으로 고현성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얼핏 어려워 보이겠지만 정리하면 속도가 빠르면 압력이 하강하고 속도가 느려지면 압력이 상승한다는 뜻입니다. 에어포일에서 상부는 공기의 속도가 빨라 압력이 내려가고 하부는 공기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려 압력이 높기에 압력이 높은 쪽에서 낮은 쪽 즉, 위쪽으로 양력이 발생합니다. 이 때문에 비행기는 떨어지지 않고 날아갈 수 있습니다.”
꽤 깔끔하게 설명했다.
“하하, 잘 설명했습니다. 역시 과학고 학생답네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말이 있죠. 날개가 있으면 양력이 발생합니다. 잘 설명했으니 도착하면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마도환이 고현성을 칭찬했고 옆에서 차도도도 거들었다.
가장 고등학생다운 대답이었음을 강우도 안다. 그런데 괜히 딴지를 걸고 싶어졌다.
마도환과 그 옆에서 미소 짓고 있는 차도도를 보자니 괜히 열불이 났다. 마도환의 눈에 띄어서 좋을 일이 없는데도 괜히 주먹이 꽉 쥐어졌다.
어차피 한국대는 가지 않을 거고 마도환과도 당분간 엮일 일이 없으니까…….
“질문 있습니다!”
강우는 재빨리 손을 들었다.
마무리하려던 마도환의 안색이 싹 변했다. 옆에 있던 차도도도 난감한 표정으로 강우와 마도환을 번갈아 살폈다.
다행히 아직 비행기가 출발하지 않았기에 차도도는 질문을 허락했다.
강우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에어포일에 베르누이 정리를 적용하려면 에어포일 앞에서 접근한 유체가 익형의 윗면과 아랫면으로 경로가 나뉘어 동시에 통과한다는 가정이 성립해야 합니다. 즉 일반적으로 에어포일의 형상은 아랫면보다 윗면이 더 길고, 긴 경로를 동시에 통과하려면 속도가 더 빨라야 한다는, 그래서 압력이 내려간다는 가정이 성립해야 하는 거죠.”
“그렇지.”
마도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이 동시 통과 가정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즉 베르누이 정리를 에어포일에 적용할 수 없다는 거죠. 방금 설명한 양력 발생 원리는 직관적이며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만 엄밀하게는 잘못된 적용이라 봅니다.”
강우의 도전적인 발언에 마도환의 표정이 싹 변했다.
물론 마도환도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는 고등학생 수준이라면 이 정도로 충분하다는 생각에 고현성의 대답을 옳다고 인정했을 뿐이다.
대수롭지 않게 냈던 문제 때문에 난감해졌다.
“흐음, 그러면…… 학생은 어떻게 설명하겠나?”
“실제로는 익형의 윗면 아랫면을 유체가 동시에 통과하지 않습니다.”
예상외의 지적에 마도환이 나지막이 쓰게 웃었다. 이론의 잘잘못을 떠나 자신의 말을 반박하는 어린 학생이 좋게 보일 리가 없다.
“그러면 양력이 왜 발생하지?”
“에어포일을 만나 공기의 흐름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공기의 속도가 변하려면 힘이 작용해야 하죠.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따르면 흐름 방향을 변화시킨 만큼 에어포일도 힘을 받게 됩니다. 에어포일 주위를 흐르는 공기는 이동하면서 아래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이로 인해 에어포일 위쪽으로 힘이 작용하게 되죠. 이것이 양력 발생의 주된 원리입니다.”
그림 없이 말로 설명하기에 학생들은 이해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들은 고현성과 강우의 주장이 미묘하게 다르고 한국대 교수인 마도환이 곤란에 빠졌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일순간 침묵에 잠겼던 마도환이 가벼운 기침을 터트렸다.
“흠흠, 대단한 학생이군. 그래, 딱히 틀린 점은 없으니…… 둘 다 맞는 것으로 하지.”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차도도도 재빨리 거들었다.
“수고했어요. 고현성과 강우는 나중에 준비된 상품을 받으러 와요. 그럼 이만…….”
“강우요?”
마도환이 놀란 표정으로 강우를 살폈다.
강우는 그제야 마도환이 자신을 알아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전에 도와주겠다며 병원을 방문했던 학생을 마도환은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 강우는 다소 도발적인 표정으로 마도환을 노려봤다.
마도환의 입가에 실소가 머금어졌다.
“강우를 아세요?”
차도도가 이상한 낌새를 금방 눈치챘다.
“아, 안다기보다는…… 조금 인연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강우 학생의 가정 형편이 어렵다기에 과학 꿈나무를 도울 생각에 만난 적이 있었어요. 과학고 입학 전에요.”
“아, 그러시군요. 또 그런 인연이 있었네요.”
차도도와 마도환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다시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전벨트를 매라는 경고등이 켜졌다.
강우는 창밖으로 보이는 비행기 날개를 바라보면서 마도환과의 악연을 떠올렸다.
마도환을 볼 때마다 마음의 안정을 잃는 기분이었다. 원한을 잊을 순 없지만, 그래도 평정심을 유지해야 했다.
오늘은 다소 충동적인 만남이었으나 원수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켜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마도환과의 경쟁과 복수는 긴 인생 후반부에서 벌어질 일이다. 벌써 앞서서 고민할 이유는 없었다.
* * *
태풍이 온다는데도 하늘은 푸르렀다.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는 흰 구름 띠가 다소 거슬리긴 했지만. 산들산들 부는 바람이 평화로웠다. 제주도에 바람이 많이 분다는 속설이 거짓처럼 느껴졌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올랐다.
첫날에는 숙소인 서귀포로 이동하면서 만장굴과 성산 일출봉을 돌아보는 일정이었다.
다행히 제주공항에 내린 후에는 마도환과 헤어졌기에 강우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둠에 싸인 넓은 굴과 작은 화산 봉우리인 일출봉은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을 선사했다.
앞서가던 지구과학 선생님이 잡다한 과학 지식을 설명했다.
“제주도는 화산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화산섬이야. 하와이라고 알지? 하와이와 비슷하다고 보면 돼. 한라산은 대표적인 순상화산인데…… 신생대 3기 말부터 4기 초에 분출했고 현무암과 안산암 이외에도 꽤 다양한 화산암으로 구성되어 있어.”
선생님의 설명은 강우의 오른쪽 귀로 들어와서 왼쪽 귀로 빠져나갔다. 같은 과학이라지만 물리와 달리 지구과학은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학문이었고 지구과학 내에서도 지질 분야는 더더욱 낯선 분야였다.
적어도 그에게 지질학은 사회과목인 한국지리와 똑같았다.
옆을 힐끔 보니 최대우마저 하품을 하고 있었다.
‘저 자식 지구과학 재능이…… S 아니었나?’
잠시나마 강우는 눈앞에 보이는 S라는 글자를 의심했다. 따지고 보면 최대우의 S는 지구과학에서 천문을 뜻했다. 또 천문은 물리학과 가장 가까운 학문이다. 그렇다 보니 최대우가 지질학을 지겨워하는 것이 한편으론 이해가 가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최대우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강우는 지구과학 교사인 김선호의 난감한 표정을 발견했다.
“선생님은…… 지구과학이시잖아요?”
“응? 그런데?”
“제주도 지질에 전혀 관심이 없으신 거 같으셔서…….”
저쪽에서 설명하는 다른 지구과학 선생님처럼 지구과학 담당이면서도 완전 딴판이다.
“난 전공이 지질학이 아니야. 그러니 내가 알 리가 있나? 게다가 여기에 한두 번 오는 게 아니라서 별 재미도 없고…….”
이 선생님도 최대우처럼 천문학이 전공인 모양이다.
열심히 변명하던 김선호가 강우를 힐끔 보면서 물었다.
“그러는 너는 왜 관심이 없어 보이냐?”
“저요? 저도 돌과는 안 친해서…….”
“돌과 친하면 머리가 돌이 되는 기분이지?”
제주도라면 지난 생에 학술대회 때문에 자주 왔던 기억이 있었다. 다만 그게 손강우 시절이라 강우에겐 해당하지 않았다. 가난한 시골 소년 강우라면…….
“그, 그건 아니고요.”
“그래도 열심히 봐둬. 나중에 수능 칠 때 뼈가 되고 살이 된다.”
“눼.”
강우는 풀이 죽어서 시선을 돌렸다.
그나마 손차희와 윤수아는 눈빛이 또렷또렷하다. 제주도에 자주 와봤을 텐데도 선생님의 설명에 연신 호응하면서 공부에 열중하는 분위기였다. 역시 모범생은 달랐다.
괜히 신경질이 난 강우는 발로 돌멩이를 걷어차면서 최대우에게 말했다.
“대우야, 오징어 있어?”
이럴 때는 오징어라도 씹으면서 무료함을 달래야 했다.
* * *
숙박지인 한라 리조트는 수학여행 숙소치고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나지막한 5층 건물 몇 동이 바닷가에 쭉 늘어서 있고 군데군데 넓은 잔디밭을 끼고 있어서 산책하기도 좋았다.
다만 한라 리조트 바로 옆에 세워진 고층 건물인 한라호텔의 존재가 강우의 눈에는 거슬렸다.
한라호텔은 지금 물리학회가 주최하는 학술대회가 열리는 장소였다. 학생인 그와 전혀 관계없는 행사임에도 괜히 자꾸 신경이 쓰였다.
“저 호텔 멋있지 않냐? 나중에 놀러 오기 좋아 보여.”
최대우의 감탄에 강우는 괜히 신경질을 냈다.
“숙소 배정은 조 단위로 합니다.”
차도도가 수학여행 일정과 숙박 요령 및 주의사항을 안내했다.
다른 조는 전혀 문제가 없었으나 강우네 조는 달랐다. 여학생 둘이 여학생 숙소에 따로 배정되면서 두 사람만 붕 떠버린 탓이다. 강우와 최대우는 갈 곳이 사라졌다.
학생들이 배정된 숙소로 이동하는 동안 강우와 최대우는 차도도의 눈치를 살폈다.
“저희는요?”
“기다려. 길거리에서 자라고 하진 않을 거니까.”
“설마 4인실에 추가로 둘을 밀어 넣진 않겠죠?”
“대우 체격을 보고도 그 소리가 나오니?”
차도도가 최대우를 향해 미안하다며 눈웃음을 날렸다. 물론 최대우는 그런 농담에 상처받을 정도로 섬세하진 않았다.
이 리조트 객실은 2인용 방 두 개가 붙은 4인실이라 단둘이서만 사용하기에는 애매했다.
다른 조에 끼기에도
눈치를 보고 있자니 학생들을 모두 들여보낸 차도도가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너희는 날 따라와.”
“네?”
“그 짐 들고.”
강우는 차도도의 짐까지 짊어졌다.
차도도가 옆 동으로 데려갔다. 그 동은 인솔 선생님들이 묶는 숙소였고 모두 2인실이었다.
3층의 복도 구석까지 데려간 차도도가 문을 열었다.
“여긴 나랑 신새벽 선생님이 쓰는 곳이고…….”
강우는 조용히 가져온 차도도의 짐을 내려놓았다.
차도도가 복도를 건너 반대편 객실을 가리켰다.
“너희 둘은 건너편 객실에서 자면 돼. 학생들이 머무는 객실보다는 조금 좋으니까 불만 없지?”
“예?”
“불만 있으면 다른 학생들 틈에 끼어 쓰든가.”
불만이 있을 리 있나? 4인실보다는 2인실이 훨씬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