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수학여행 (3)
고곽천재 단톡방이 울렸다.
- 윤수아 : 강우야, 강우야아!
- 강우 : 왜?
- 윤수아 : 어딨어?
- 강우 : H동.
- 손차희 : 헉! 담임한테 잡혀 일하러 갔구나. 불쌍해.
- 윤수아 : 토닥토닥(이모티콘).
음.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하여튼 강우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학생들 틈에 끼어 있으면 수학여행의 밤이 얼마나 귀찮은지 잘 알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고라서 술을 마시거나 소란을 일으키는 학생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솔직히 정신연령이 맞지 않으면 피곤하니까.
옆을 돌아보니 최대우는 벌써 퍼져 자고 있었다. 어째 톡방에서 조용하더라니.
- 윤수아 : 대우는?
- 강우 : 잔다.
- 윤수아 : 대우는 착실하네.
- 강우 : 너희는 뭐하는데?
- 윤수아 : 노는 중.
- 강우 : 누구랑?
- 윤수아 : 여학생들끼리 뭉쳤어.
- 손차희 : 아자아자(이모티콘)!
고려 과학고에서 여학생들이 많지 않았다. 1학년 중 여학생은 모두 10명이었고 각 반에 흩어져 있었다. 그렇다 보니 여학생들끼리 모일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수학여행 때 모여 한바탕 놀기로 했나 보다.
물론 강우는 관심이 없어서 손차희와 윤수아를 제외한 다른 여학생들 얼굴도 잘 몰랐다. 고현성은 여학생 생일까지 꿰고 있는 것 같고 최대우는 그래도 얼굴과 이름은 구별하는 것 같지만.
손강우 시절의 기억 때문일까. 그들을 보면 그저 어린 애처럼만 보이고 이성이라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 윤수아 : 으악!
- 강우 : 왜?
- 윤수아 : 점호 중. 놀다가 걸려 혼남. 흑흑(이모티콘).
강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밤 11시. 수학여행을 와서도 기숙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점호 시간이 있다니. 설마 아침 점호도 같으려나? 아침 6시가 되면 리조트 풀밭에 모여 아침체조라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려나?
다른 학생들 방은 선생님들이 돌아다니며 점호를 하고 있다지만 그가 있는 이곳은 고요하기만 했다. 역시 학생 숙소에서 떨어져서 선생님들 숙소에 배치되니 이런 점은 편하다.
똑똑-
젠장! 여기도 점호를 왔나 보다. 노크 소리에 문을 여니 차도도가 쓱 들어왔다. 말끔한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두 사람. 맞지?”
“예.”
최대우는 잠이 들었고 강우 혼자 차도도를 맞이했다.
“여분 없어?”
“여분이 뭔데요?”
“다른 방 애들 숨겨놓지 않았냐고.”
“여기까지 올 만큼 부지런한 애들은 없겠죠?”
내부까지 들어온 차도도가 주위를 꼼꼼히 둘러봤다.
“흠, 여기도 괜찮네. 내일은 일정대로 움직일 거야. 많이 돌아다닐 거니까 푹 쉬어두고…… 일찍 자렴. 떠들지 말고.”
“태풍 안 온대요?”
“내일은 괜찮다더라. 모레 오전에 중국 쪽으로 가거나 일본 쪽으로 꺾이면 좋은데…… 그대로 직진해서 남해안에 상륙하면 우리도 같이 망하는 거지.”
자칫 비행기가 안 뜨고 제주도에 갇힐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녀석들은 환호성을 지를 만한 뉴스였다.
“알았어요. 쌤도 안녕히 주무세요.”
강우는 꾸벅 인사하고 차도도를 밖으로 몰아냈다.
문을 닫으려는데 복도 저쪽에서 신새벽이 오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녀도 반 학생들 점호를 마치고 돌아오는 듯했다.
차도도를 발견한 신새벽이 손에 쥔 비닐봉지를 흔들었다.
“차 쌤! 맥주 구했어! 맥주!”
저 맥주는 학생들에게 뺏은 게 분명했다. 강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두 사람을 째려봤다.
뒤늦게 강우를 발견한 신새벽이 피식 웃었다.
“어쭈! 이 녀석이 술 마시고 싶은가 보네?”
지금까지 술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신새벽의 손에 들린 맥주캔을 보니 술 한잔이 그리워졌다. 손강우 때도 술꾼은 아니었지만 가끔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강우로 빙의한 후부터는 당연히 술이라고는 마신 적이 없다.
신새벽이 강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강우야, 그래도 참아. 우리가 너를 데리고 술판 벌이면 그거 뉴스에 날 일이거든? 과학영재고 선생들이 수학여행에서 제자를 데리고 술판 벌이다 적발! 이런 기사 뜨면 좋겠니? 네가 졸업하고 찾아오면 어련히 알아서 사줄 테니까…… 학생은 학생답게.”
술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별 말을 다 하더니 숙소 문을 열고 쑥 들어갔다.
차도도가 웃으며 강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자렴.”
“많이 마시지 마세요.”
“알아. 난 술 잘 못 마셔. 딱 한 캔. 그것도 과하지.”
방으로 돌아온 강우는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이럴 때는 맥주 한 병이 아쉬웠다.
낮에 만난 마도환이 신경 쓰였다. 그가 옆 호텔에 머물고 있다니! 게다가 공항에서 차도도와 나눈 대화도 거슬렸다.
시간 나면 호텔로 찾아오라고?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상대가 다른 사람이라도 신경 쓰일 판에 그 마도환이다 보니 더 신경이 쓰였다. 앞으로 3일 동안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여행 후 돌아와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다행히 숙소가 바로 앞이라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기도 했고.
* * *
쏴아아-
물이 시원하게 떨어졌다.
바닷가로 떨어지는 폭포는 장관이었다. 폭포를 형성한 주상절리가 눈길을 끌었다.
역시 오늘도 지구과학 선생님이 열심히 지층 구조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열심히 듣는 사람이 절반, 관심 없이 바닷가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절반이었다.
태풍이 온다더니 바람이 제법 거셌다. 정면으로 바람을 맞으면 날려갈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듬직한 바람막이가 필요했다.
강우는 재빨리 최대우를 찾았다. 웬일로 최대우가 여학생 무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대충 보니 대우의 몸을 방패 삼아 바람을 피하고 있었다.
“대우야!”
강우도 재빨리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뛰어갔다.
최대우의 옆에서 윤수아가 툭 튀어나왔다.
“강우야! 얼른 와!”
이럴 때일수록 고곽천재가 뭉쳐야 한다. 아니면 바람에 날아갈 것 같았으니까.
바람을 피하면서 손차희와 윤수아는 바다에서 시선을 뗄 줄 모른다.
“강우야, 바다 끝내주지?”
탁 트인 바다를 보니 가슴이 웅장해지는 것만 같았다. 거칠게 요동치는 파도에 자연의 힘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물리는 이런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강우도 바다를 쳐다보면서 감상에 잠겼다.
최대우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아, 우리 동네에서는 이런 건 바다라고 쳐주지도 않아.”
“어? 뭔 소리야?”
“자고로 바다는 묵직한 맛이 있어야지. 검푸른 바다라고 들어봤어? 색깔이 파랗다 못해 너무 깊어 어두컴컴한 바다.”
“서해에 비하면 여기도 바다인데…….”
“우리 동네에서는 적어도 수심이 천 미터는 넘어야 바다 축에 끼워줘.”
서울에서, 또 시골에 살면서 평생 바다라고는 거의 접할 일이 없는 그들과 울릉도에서 온종일 동해만 바라보며 산 녀석은 바다를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달랐다.
“울릉도 바다 보고 싶다아.”
윤수아의 중얼거림에 최대우가 흔쾌히 승낙했다.
“다음 방학 때 놀러 와.”
“알았어! 겨울에 진짜 갈 거다?”
윤수아가 주먹을 불끈 쥐었고 손차희와 강우도 의욕을 불태웠다.
바람을 맞고 있자니 여름인데도 꽤 추웠다. 이제는 빗방울마저 조금씩 떨어졌다.
“태풍이 어디에 있으려나?”
윤수아가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강우는 바람을 등지고 서서 양팔을 벌렸다.
“태풍은 지금…… 저쪽이야.”
강우는 팔을 펼친 상태에서 왼쪽 손바닥 앞쪽을 가리켰다. 그쪽은 정남 방향, 바다 먼 곳이었다.
“어? 그거 어떻게 알아?”
“태풍은 저기압이라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니까.”
“아, 예전에 배운 적 있어.”
손차희는 영재고 입시 준비를 하면서 공부했던 지구과학을 떠올렸다. 이제는 상당 부분 잊어버렸지만 그래도 약간은 머리에 남아 있다. 바람 방향으로 태풍의 중심 위치를 예측하는.
“그게 코리올리의 힘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거든.”
강우는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어? 너 지구과학은 잘 못 하잖아?”
“이건 물리니까.”
사실 과학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고대에는 셈을 하는 수학과 날짜와 시간을 계산하는 천문학이 가장 먼저 발달했고 이는 물리학으로 이어졌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물리학은 화학과 융합하기 시작했다. 현대에는 생명과학과 지구과학까지 합쳐져 전체 과학의 틀을 형성하게 됐다.
* * *
태풍이 제주도를 피해갔으면 좋았겠지만, 수학여행 이튿날 저녁부터 비바람이 거세졌다.
학교 측에서는 학생들에게 숙소 밖으로 나가지 말도록 지시했다. 야밤에 바닷가를 구경하겠다고 벼르던 학생들은 포기하고 방안에 틀어박혔다.
공지가 내려오진 않았지만 3일째 계획된 한라산 등반은 사실상 무산되었다고 봐야 했다. 이대로라면 내일은 온종일 숙소에 갇혀 뒹굴 일만 남았다.
숙소에서는 당연히 할 일이 없다.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티비를 보는 일이 전부였다.
최대우는 열심히 게임을 했고 강우는 티비를 보다가 그마저 지겨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런 날은 선생님들이 점호하기도 쉽지 않다.
- 손차희 : 인원 보고하라고 담임 쌤이 연락함. 우리 조 다 있지?
- 윤수아 : 난 차희 옆에 있음.
- 최대우 : 흐아암.
- 윤수아 : 대우야 벌써 자?
- 손차희 : 강우는 왜 대답 없어?
- 최대우 : 흐아암.
- 손차희 : ???
강우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느라 톡에 답장하지 못했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차도도가 불쑥 들어왔다.
“강우 어딨어?”
실내로 들어와서 두리번거리던 차도도는 강우가 누운 침대로 다가갔다. 이불을 완전히 뒤집어쓰고 있어서 강우가 맞는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최대우는 게임을 하다가 멈춘 채 차도도의 눈치를 살폈다.
“이불과 베개로 위장한 건 아니겠지?”
차도도가 이불을 확 걷어내자 몸을 쪼그리고 누운 강우가 있었다.
“강우! 왜 대답 안 해?”
“네? 언제 오셨어요?”
눈을 비비며 강우가 상체를 일으켰다.
“차희가 너 대답 없다고 하는 바람에 직접 확인하러 왔지.”
담임 맞은편 방을 쓰고 있다 보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차도도가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몸을 돌려서 나가려 할 때였다.
“쌤, 한라호텔 안 가세요?”
“한라호텔? 거긴 왜?”
“음, 거기에서 마도환 교수랑 만나기로 하신 거 아니었어요?”
차도도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녀는 찌뿌둥한 표정으로 강우를 노려봤다.
“네가 어떻게 그걸 알아?”
정색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강우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날 공항에서 마도환 교수가 그랬던 것 같은데요? 설마 거기 가실 생각은 아니죠?”
“그, 그게 고민 중이야.”
“아니! 그걸 왜 고민해요! 미혼의 두 남녀가 호텔에서 만나면 이상하잖아요? 그것도 야밤에!”
울컥하는 강우의 반응에 차도도가 당황해서 손을 저었다.
“미, 미혼? 마도환 교수가 미혼이야?”
“네. 모르셨어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차도도를 보며 강우는 괜히 말을 꺼냈다고 후회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차도도가 이유를 밝혔다.
“나도 고민하긴 했는데…… 너도 알다시피 R&E에서 교수와 연결해주려면 한국대 물리학과 교수와 친분이 있으면 좋잖아? 김윤택 선생님 보면. 그래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
“그래도 마도환은 아니죠.”
강우는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냥 강우 너를 내년부터 마도환 교수와 연결해주려고…….”
“저는 필요 없거든요. 그러니까 만나지 마세요.”
차도도는 강우의 만류가 일리가 있다고 느끼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구속하려는 강우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다.
‘얘가 왜 이러지?’
상식적으로 보자면 유부남과 만나는 것도 아니고 상대가 미혼이라면 오히려 상관 없지 않나? 한국대 교수라면 그렇게 나쁜 조건도 아니고.
“음, 그런데 마 교수님이 미혼인 걸 네가 어떻게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