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수학여행 (4)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강우는 재빨리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견학 때 실험실 대학원 형한테 들었어요.”
“그랬구나. 그래도 초대를 거절하기엔…….”
차도도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내일 태풍이 휘몰아치면 모든 일정이 취소될 것이다. 그러면 차도도가 마도환을 만날 시간이 생긴다. 어쩌면 그녀는 제자의 앞길을 위해, 또는 자신의 발을 넓히기 위해 정말 연락을 취할지도 몰랐다.
이참에 확실하게 못을 박아둬야겠다고 강우는 생각했다.
“쌤, 마도환이 아니더라도 유명한 교수는 많거든요. 그리고 저는 R&E 교수가 필요하면 스스로 충분히 구할 자신이 있으니까 저 때문이라면 굳이 만나실 필요는 없어요.”
“그, 그래.”
차도도가 강우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째려보다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강우는 긴 숨을 내뱉으며 침대에 무너졌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눈치만 보고 있던 최대우가 입을 열었다.
“강우야, 정말 R&E 교수 구하기 쉬워?”
“왜? 관심 있어?”
“그게 아니라……외부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 매주 수요일마다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
“잠이나 자.”
이 자식도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았나 보다.
* * *
예상대로 아침이 되자 비바람이 거세졌다.
중급 태풍이 제주도 남단을 통과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 하루는 일정을 취소하고 리조트에서 대기하면서 저녁 행사인 장기자랑을 준비하라는 공지가 내려왔다.
대충 예보를 참고하면 저녁쯤부터는 비바람이 잦아들 것으로 보였다.
강우는 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바다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성난 파도가 무서울 정도로 출렁이며 몰려오고 있었다. 자연의 거대한 힘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아침 식사 후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저녁에 있을 장기자랑 준비 때문에 톡방이 난리였다.
- 손차희 : 장기자랑 뭐 할래?
- 윤수아 : 합창 어때?
- 최대우 : 먹방!!
- 윤수아 : 먹방?? 좋아! 자신감 뿜뿜!
- 손차희 : ㅠ.ㅠ
- 손차희 : 강우야! 강우 어디 갔어?
물론 강우는 톡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조원들에게 미안하게도 조별 장기자랑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지금 그는 맞은편 객실의 차도도 움직임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만약 차도도가 학술대회를 방문한다면 몇 시일까? 저녁에는 장기자랑을 비롯한 일정이 있기에 저녁 식사를 같이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점심을 노릴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면 밤이거나.
점심시간에 딱 맞춰 도착하기보다 학술대회장을 조금이라도 관람하려면…….
마침 그도 학술대회장에서 할 일이 생각났다. 겸사겸사 차도도와 함께 가볼까? 머릿속으로 온갖 계획을 세웠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어느 순간 맞은편 객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우도 바로 밖으로 튀어 나갔다.
우산을 든 차도도가 강우를 발견하고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몸을 움찔했다. 현장을 딱 잡았다!
“쌤! 호텔 가시는 거예요?”
당황한 차도도가 어버버거리더니 손을 휙휙 내저었다.
“강우야! 그래도 호텔이라니 어감이 좀 그렇잖아? 물리학회 학술대회 구경하려고.”
“갑자기 학술대회는 왜요?”
“왜라니? 좋은 기회잖아? 더 넓은 학문을 견학할 기회.”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그럼 저도 같이 가요. 마침 우산도 없는데 잘됐네요.”
강우는 답변을 듣지 않고 우산을 빼앗았다.
“너도 가게?”
고등학생이 학회를 구경할 필요가 있나 고민하던 차도도는 강우의 미래를 위해서 같이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강우는 차도도와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사이좋게 옆 건물인 한라호텔로 향했다. 얼핏 보기엔 운치 있어 보이는 두 남녀였지만…….
비바람이 거세어 우산은 쓰나 마나였고 한라호텔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흠뻑 젖었다.
강우와 차도도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 * *
마침 타임 브레이크 시간.
분과별로 나뉘어 논문 발표를 듣던 사람들이 복도로 나와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 흰색 와이셔츠나 정장으로 격식을 갖춘 사람들 사이에서 평상복을 걸친 두 사람이 유독 튀어 보였다.
그렇더라도 어색함은 없었다. 강우는 전생에서 이런 학술발표회장을 무수히 다녔으니까. 국내 국외를 가리지 않고 논문을 직접 발표하거나 다른 이들의 발표를 들으러 참석했었다. 그렇기에 이런 발표회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했다.
물리학회 회원들은 한 손에 종이컵을 들고 몇 사람씩 모여서 방금 들었던 연구 주제나 잡담을 나누며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
강우는 입구에서 안내장을 받은 다음 분과별 주제와 장소를 훑었다.
차도도는 신기한 듯 주변을 휙휙 둘러보고 있었다. 학부만 졸업한 그녀에게 이런 논문발표장은 낯설었다.
“흠, 저쪽이 괜찮…….”
여러 개의 강연장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며 차도도의 팔을 잡던 강우는 일순간 표정이 굳었다.
하필이면 저 자식이? 맞은편에서 마도환이 미소를 짓고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꼭 이렇게 만나게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강우를 힐끔 살핀 마도환이 차도도에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그냥…… 구경하러 왔습니다.”
차도도도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강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발 물러섰다.
“태풍 때문에 수학여행 일정이 쉽지 않겠습니다.”
“그러잖아도 태풍 때문에 시간이 조금 비었네요.”
“오신 김에 제가 분과장을 맡은 발표회장을 한번 구경해보시면 어떨까요?”
“그게…….”
차도도가 머뭇거리는 사이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고 논문 발표가 재개됐다. 복도에서 웅성대던 사람들이 급히 여러 강연장으로 나뉘어 들어갔다.
기회를 맞은 강우는 다급하게 차도도의 팔을 잡았다.
“쌤! 저쪽이에요.”
차도도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강우는 그녀를 끌고 목표한 강연장으로 움직였다.
강우는 당황한 표정을 짓는 마도환을 힐끔 보면서 내심 실소를 머금었다.
강우가 들어간 발표장에는 스무 명가량의 청중이 모여 발표를 듣고 있었다. 그는 단상 한쪽 옆에 앉아 있는 인물을 확인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KTX에서 만났던 카이스트 교수 한태규가 분과장을 맡고 있었다. 학술대회에서 분과장은 해당 세션의 발표 마감 시간을 알리고 질문과 대답을 조율하며 진행을 책임지고 관리했다.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면 강우가 움직이기에 확실히 편하다.
강우는 차도도와 함께 가장 뒤쪽에 앉았다.
“여긴…….”
“유체역학을 주로 다루는 분과예요.”
“네가 유체역학에도 관심 있었니?”
“방학 때 조금 공부해봤거든요.”
물론 거짓이 아니다. 그는 핵융합 관련 연구를 행하면서 틈틈이 새로운 변화구를 개발하느라 유체역학 공부를 동시에 진행했으니까.
마침 단상에서는 유명 사립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생이 난류의 발생 메커니즘을 열심히 발표하고 있었다. 내용이 어려운 데다 흥미도 떨어지고 발표마저 ppt를 보고 읽는 수준이라 청중의 절반은 졸고 있었다.
“재미없죠?”
“그러게…….”
차도도도 조금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됐다. 장내는 조용했고 딱히 질문하는 사람도 없었다.
분과장인 한태규가 주의를 환기하며 말했다.
“질문하실 분 없습니까? 10초 이내로 없으면 다음 진행으로…….”
그 순간 강우가 손을 들었다.
강우를 확인한 한태규가 놀란 표정을 억누르더니 말을 이었다.
“질문하세요.”
“고려 과학고 재학생인 강우입니다.”
순간 발표장이 웅성댔다. 고등학생이 학술발표장에서 질문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일순간 청중의 시선이 강우를 향했다.
발표자도 질문을 받아야 하는지 분과장에게 의문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계속하세요.”
한태규가 가볍게 강우를 지원했다. 다른 학생이었다면 만류했겠지만, 강우의 천재성을 이미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발표회장은 강우에게는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였다. 전생의 손강우는 학술발표회에서 질문과 대답을 무척 많이 경험했다. 당연히 조금도 거리낌 없이 질문을 시작했다.
“나비에르-스톡스 방정식을 수학적으로 푸는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셨는데요, 예제로 푼 물리현상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강우의 질문이 의외로 전문적이자 청중들이 숨을 죽였다. 발표자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해당 수식을 적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문제를 슈퍼 컴퓨터를 이용하여 수치해석적으로 푼 결과를 보신 적 있습니까?”
“그…… 그건…….”
바로 발표자가 꼬리를 내렸다.
“공학자들은 수치 시뮬레이션 접근을 많이 하죠. 그 결과에 따르면 방금 수학적으로 계산한 값과 결과에서 차이가 나거든요. 그 이유가 뭐라고 보시는지요?”
답이 돌아오지 않자 강우는 능수능란하게 혼자서 답변과 질문을 반복했다.
“같은 수식을 이용하였으나 초기 조건과 가정이 상이합니다. 특히 수학적으로 문제를 해석한 이 연구에서 경계조건으로 넣은 값이…….”
강우의 유창한 질문이 계속되었고 발표자는 별다른 반박과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버벅거렸다.
결과적으로 발표자의 연구는 범용적이지 못하고 특정 조건에서만, 그것도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판별났다.
고등학생이 순식간에 논문을 뒤집어 버리자 청중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강우를 쳐다봤다.
한태규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강우를 칭찬했다.
“대단합니다. 고등학생답지 않은 질문이었습니다. 발표자께선 방금 논의한 내용을 잘 살펴보시고 추후 보완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다음은…….”
강우는 미소를 지으며 옆에 앉은 차도도를 돌아봤다.
차도도가 얼이 빠진 표정으로 강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강우는 차도도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나지막이 불렀다.
“쌤?”
“어…… 뭐야? 강우 너 뭐야?”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지금까지 강우가 놀라운 기행을 보이긴 했지만, 오늘 일은 차원이 달랐다. 오늘은 무려 새로운 연구가 발표되는 장소 아닌가. 그 새로운 연구를 단숨에 반박하고 뒤집었다.
페스타에서 강우가 했던 강연은 이미 알려진 내용이기에 잘 다듬으면 됐다. 내용 자체가 어렵지도 았았다. 하지만 오늘은 이 분야에서 수년간 연구한 박사 과정 대학원생을 상대한 것이었다. 다른 청중들도 강우의 의견을 반박하지 못했으니 그 논리가 적합했다는 이야기였다.
“지난 방학 때 연구한 분야라니까요. 이것 때문에 제가 논문을 얼마나 찾아봤는데요.”
“그…… 그래?”
“게다가 저기 분과장이신 카이스트 교수님도 잘 아는 분이에요. 이번 세션 끝나면 소개해 드릴게요. 인맥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하셨잖아요?”
무려 카이스트 교수를 두고 거짓말할 리는 없으니 차도도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강우는 그녀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뛰어난 학생이 분명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녀는 과학고에서 여러 천재를 봤었다.
1학년인 이민찬이나 손차희, 2학년인 권유성과 박일현. 이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손꼽히는 천재들이었다. 그런데 강우를 이들과 비교하기 어려웠다. 완전히 유형이 다른 천재였다.
“그, 그래. 여러 교수님들을 알아두면 좋으니까…….”
차도도는 넋이 나간 채 동의했다.
목적을 모두 달성한 강우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차도도에게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했고 그녀가 마도환을 만나려고 했던 목적 또한 다른 방식으로 달성하게 해주었다. 어쨌든 오늘 일로 인하여 차도도는 졸업할 때까지 그의 뜻을 지지해줄 것이다.
‘마도환을 더 물 먹였어야 했는데…….’
무엇보다 마도환과 차도도를 떼어놓았다는 점이 기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