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두 번째 강연 (1)
학년 주임 김윤택은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오늘 일정이 태풍 때문에 완전히 틀어졌기에 시간을 때울 일이 막막했다. 고등학생이 얼마나 활기차고 정신없는가. 그런 녀석들을 온종일 숙소에 안전하게 가두어둘 방법을 찾아야 했다.
원래의 일정이라면 낮에는 한라산 등반이고 저녁에는 조별 장기자랑이었다. 조별 장기자랑은 날씨와 무관하니 예정대로 진행하면 되지만 한라산 등반은 대체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녀석들을 풀어주었다가 험난한 바닷가로 몰려나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무엇보다 안전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좋은 프로그램 없습니까?”
김윤택은 다른 선생님들의 의견을 구했다. 이런저런 의견이 나왔으나 마땅하지 않았다.
“장기자랑 연습시간으로 대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태풍 때문에 달리 방법이 없네요.”
“내일 예정대로 비행기는 탈 수 있는 거죠?”
선생님들은 서울로 돌아가는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태풍이 진로를 틀어 저녁부터는 태풍경보가 해제되리란 예보가 있었다.
“오전 내내 숙소에 머물러 있었는데 오후에도 계속 숙소에서 놀라고 하기엔…….”
한숨을 쉬면서 고민하던 김윤택이 문득 새로운 발상을 꺼냈다.
“선생님들, 이 기회에 강연회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강연회요? 놀러 왔지 공부하러 오지 않았다고 학생들이 항의할 텐데요?”
“그래도 우리 학생들은 말을 잘 듣지 않습니까? 이참에 수학, 과학에서 하나씩 흥미 위주로 강연해보죠.”
김윤택을 제외한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반대했다. 하지만 김윤택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학생들을 일단 눈에 띄는 곳에 모아놓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사고를 안 쳐요.”
어쨌든 눈에 보이는 곳에 있으면 안심이니까.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선생님들을 보며 동의했다고 여긴 김윤택은 강연자를 고민했다.
그의 눈에 김선호가 들어왔다.
“김선호 선생님, 그때 페스타에서…… 강우가 특별상을 받았었죠?”
“네, 인상 깊은 강연이라고 주최 측에서…….”
“그 강연 어떻게 한 겁니까?”
“원래 차 선생님 몫이었는데 문제가 생겨서 강우 학생이…….”
“아! 그렇다면 오늘 강우 학생에게 강연을 맡겨보면 어떨까요?”
모든 선생님이 눈을 크게 떴다.
여기 있는 선생님들 모두가 강우 이야기를 자주 들었었다. 하지만 수업에 들어가는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정작 강우가 누군지도 잘 몰랐다. 수학과 물리에서 천재라는 소문만 파다했다.
김윤택도 다르지 않았다. 그도 정작 강우네 반에 수업을 들어가진 않았으니까. 실제 강우 실력을 확인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이런 기회를 통해 어떤 녀석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얼마나 잘하는 녀석이기에 그가 제안한 과제연구를 거부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김선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건 담임이신 차 선생님께 확인해 보셔야…….”
“차도도 선생님?”
김윤택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차도도가 없었다. 그의 안면이 확 일그러졌다.
“하아! 이 선생님은 또 어디로 가서…….”
“학생들 점검하시나 보죠.”
신새벽이 적당히 둘러댔다.
김윤택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하여튼 그렇게 합시다. 과학은 강우 군에게 강연을 맡겨보죠. 의외로 잘할지도 모르잖아요? 수학은…….”
물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내심 별 기대를 하고 있진 않았다.
* * *
점심시간이 되자 세션이 끝났다. 학술대회는 주최 측에서 마련한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오후 일정을 시작한다.
지루한 발표회장을 지켰던 강우는 차도도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들도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때 분과장이었던 한태규가 그에게 다가왔다.
“강우 학생!”
강우는 몸을 돌려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오늘 여기에서 만날 줄은 전혀 몰랐네요. 어쩌다 이 먼 곳까지…….”
“수학여행 왔다가 태풍 때문에 발이 묶였거든요.”
“아!”
한태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다고 수학여행 때 학술대회에 참석하는 고등학생을 이해한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난류에도 관심이 많은가 보네요?”
“네, 저는 물리학 다방면에 호기심이 있거든요.”
유체역학의 한 분야인 난류는 플라스마 거동 때문에 상온 핵융합과도 관련이 있다. 그렇기에 강우도 꽤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였다.
“강우 군은 보면 볼수록 놀랍군요. 그런데…… 이분은?”
그제야 강우 옆에 서 있는 차도도를 알아본 한태규가 관심을 보였다.
“저희 담임 선생님이세요.”
“고려 과학고 물리 교사인 차도도입니다.”
차도도가 꾸벅 인사했다.
“아! 반갑습니다. 강우 군처럼 뛰어난 학생을 가르치려면 힘드시겠어요.”
“오히려 보람 있는데요. 사실 가르칠 필요도 없어요. 혼자서 알아서 다 하니까요.”
차도도와 한태규가 인사말을 포함해서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다행히 차도도의 학부 시절 지도교수를 한태규가 잘 알고 있어서 대화가 손쉽게 이어졌다.
강우도 열심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지난번 고속전철 프로젝트는 어떻게 되었어요?”
“아! 강우 군 덕에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되었어. 아이디어가 부족해서 고전하던 차에 큰 도움이 되었네. 아참!”
“네?”
“고려 과학고에서도 R&E를 하지 않나?”
“당연히 하지요.”
강우는 차도도의 입가에 감도는 미소를 확인했다. 그녀가 발을 넓히려는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R&E 지도교수 초빙이니까.
“그럼 2학기부터 카이스트랑 R&E를 할 수 있나? 이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이 강우 군이니까 과학고와 협력과제로 추진해보고 싶네만. 차 선생님? 혹시 가능하시겠습니까?”
“네?”
차도도는 너무 놀라서 버벅댔다. 바라던 일을 이렇게 손쉽게 달성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프로젝트 규모가 꽤 되니까 고등학교에도 지원 가능합니다. 큰 금액은 아니어도 연구비랑 학생들 용돈 정도는 되지요. 물론 연구팀 지도교사로 등록하시면 차 선생님께도 수당이 주어질 테고요. 조금 귀찮으시긴 하겠지만.”
“아아! 저희야 영광이죠. 다만 1학년에게는 R&E를 허용하지 않아서…….”
차도도는 감격해서 수락했다. 과학고에서 이런 R&E 과제는 학생의 입시에 도움을 주면서 담당교사도 꽤 좋은 고과를 받을 수 있게 한다. 게다가 R&E를 잘 유치하는 교사는 학생 사이에 인기도 좋다. 문제는 정식 R&E를 2학년부터 허용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한번 힘써주십시오. 정식 공문을 보내겠습니다. 아, 그리고…… 만난 김에 점심 같이하실까요? 태풍 때문에 멀리는 갈 수 없고 학회에서 제공하는…….”
한태규의 초청을 차도도가 막 수락하려는 순간이었다.
차도도의 휴대폰이 울렸다.
“잠시 전화 받겠습니다.”
양해를 구한 차도도는 휴대폰에 적힌 발신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차도도입니다.”
순간 차도도의 안색이 확 변했다.
“강우를요? 아…… 네…….”
시시각각 변하는 차도도의 표정을 보면서 강우는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눈치챘다.
전화를 끊은 차도도가 양해를 구했다.
“지금 주임 선생님께서 저와 강우를 찾으셔서…… 점심은 아무래도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습니다.”
“하하, 어쩔 수 없지요. 어쨌든 프로젝트는 같이 하는 겁니다?”
“당연하죠.”
차도도는 꾸벅 인사하고는 강우를 데리고 발표회장 밖으로 나왔다.
강우도 발걸음을 맞추며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일단 가면서…….”
급히 학술대회장을 벗어나려는 두 사람 앞을 막는 사람이 있었다. 마도환이었다.
“차 선생님!”
“아, 마 교수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같이 식사하시죠?”
마도환이 차도도에게 환한 웃음을 짓다가 강우에게는 안면을 굳히며 눈치를 줬다. 얼른 꺼지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당연히 가만히 있을 강우가 아니었다.
“쌤, 주임 쌤께서 급하다고 하셨잖아요?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요?”
마도환의 안면이 확 일그러졌다.
차도도가 완곡하게 거절했다.
“마 교수님, 저도 함께 식사하고 싶지만 약간 문제가 생겨서요. 이번에는 어려울 듯합니다. 오늘 태풍 때문에 저희가 비상이거든요.”
거절당하리라 생각지 못했던 마도환은 한동안 버벅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요.”
차도도가 인사할 틈도 없이 강우는 그녀의 팔을 확 끌어당겼다.
“얼른 가야 해요!”
차도도를 끌고 가면서 강우는 생각했다. 별일 아니었지만 마도환이 상대라면 어떤 여지도 남기기 싫었다.
* * *
김윤택의 앞에서 차도도는 난감한 표정으로 안면을 찡그렸다.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강우 학생이라면 할 수 있을 겁니다. 무려 페스타에서 강연으로 특별상을 받았는데요.”
“그때는 강연 자료라도 준비되어 있었어요. 게다가 지금은 수학여행 중이라 강연 분위기가 제대로 잡힐 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아무런 행사 없이 학생들을 숙소에 처박아 두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오늘은 태풍 때문에 비상이니까 특별대책이 필요하죠. 강우 학생, 이해하지?”
차도도의 강력한 반발에 김윤택이 강우에게 은근한 압력을 가했다.
강우는 두 사람의 말다툼을 관찰하며 분위기를 파악했다. 그를 지그시 보고 있는 김윤택의 눈빛이 심상찮았다. 거절하면 앞으로 괴로울 거라는 무언의 경고가 담겨 있는 듯했다.
어째 만날 때마다 김윤택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니.
중간에 낀 차도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김윤택은 학생주임으로 직책상 차도도보다 위였다. 적극적으로 반대하면 앞으로 차도도 또한 곤란해질 것이다.
“수학은 정명욱 선생이 강연하기로 했습니다. 과학은…… 모두가 강우 군이 적합하다는 의견이었습니다.”
평소 김윤택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면 이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차도도는 쉽게 추정할 수 있었다.
“차라리 제가…….”
“강우가 해야 합니다.”
“강우야, 가능하겠어?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난감한 표정으로 차도도가 강우의 의사를 물었다.
강연이라? 수십 번 이상의 경험을 가진 강우이기에, 또 지난번에 강연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확인했기에 남들 생각처럼 강연이 어려운 건 아니었다. 다만…….
“할 수는 있어요. 대신에 저도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김윤택이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 무슨 부탁인가?”
“제가 지난번에 수학 올림피아드 1차 시험을 치지 못해서 떨어졌거든요.”
“그런 소문은 들었네만.”
“관련 규정을 보니까 1차 시험을 통과하지 않더라도 대한수학회 이사진의 추천이 있으면 2차 시험을 볼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김윤택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나에게…… 추천서를 받아달라는 뜻인가?”
“네. 선생님께선 발이 넓으시니까 한국대 수학과 교수님도 아는 분이 있으실 거잖아요?”
당연히 강연은 무조건 할 생각이었다. 이 강연은 학교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반 학생들은 강우를 인정하지만 다른 반 학생이나 그를 모르는 선생님은 달랐다. 학교전체의 유명인사가 되려면 이런 계기가 필요하긴 했다.
그렇다고 순순히 떠밀려서 강연할 수는 없다. 받아낼 건 받아내야 했다. 그러잖아도 올림피아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중이기도 했고.
김윤택이라면 발이 넓을 테니 무리한 부탁은 절대 아니었다.
마치 큰 인심을 쓰는 것처럼 김윤택이 대답했다.
“좋아, 강우 군이 이번 강연을 맡아준다면 교장 선생님께 안건을 올려 보겠네.”
“네,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합의에 차도도는 눈만 멀뚱거렸다.
“주제는?”
“흠, 물리학으로 할게요. 마침 태풍도 오니까 태풍과 관련된 것으로요.”
강우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페스타 특별상이 괜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학생들을 확 끌어당길 흥미로운 강연을 해서 김윤택의 기대치를 넘어설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