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91화 (91/325)

제91화 두 번째 강연 (2)

강연 공지를 들은 학생들이 뒤집혔다.

한라산 등반도 하기 싫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수학, 과학 강연이라니! 태풍이 왔으면 재난에 대비해서 조용히 숙소에서 머무는 게 정답 아닌가?

“아무리 과학고라지만 너무한 거 아니냐고!”

“수학여행 때 공부라니 실화냐?”

“차라리 태풍을 뚫고 한라산에 오르고 말지!”

시위라도 벌어질 판이었다.

물론 학생들의 반란은 한 방에 제압됐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에게 쫓겨 리조트의 중앙홀에 모였다.

강우는 가장 뒤에서 학생들을 따라 장소를 옮겼다. 그의 뒤를 차도도가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따라왔다.

“강우야, ppt 자료라도 구해볼까?”

갑작스러운 강연이기에 준비한 영상 자료가 없었다. 강연에서 영상 자료가 없으면 매우 지루해지기에 차도도는 예전 자신이 했던 강연들을 머릿속에서 뒤적이며 방법을 모색했다.

어쩌면 이메일에 일부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까.

“차라리 지난번 페스타에서 했던 강연은 어때?”

그 자료는 강우의 이메일에도 저장되어 있어서 손쉽게 활용할 수 있었다.

“그냥 자료 없이 할게요.”

강우는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강연이 산만해질 텐데?”

“괜찮아요. 화이트보드만 있으면 돼요.”

차도도는 걱정이 되는 와중에도 강우의 의견을 존중했다.

“정말 태풍을 주제로 강연할 거야?”

태풍은 물리학이라기보다는 지구과학과 관련이 깊었다. 그는 물리는 잘할지라도 지구과학에서 그리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차도도의 염려는 당연했다.

“하기 나름이니까…… 괜찮아요. 저도 얻는 게 없진 않으니까.”

엄밀히 따져 강연 한 번은 어렵지 않았다. 그 대가로 수학 올림피아드 1차 시험 통과 자격을 얻을 수 있다면 감수할 만했다.

넓은 홀에 학생들이 가득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단상에 김윤택 주임 선생님이 올라가서 오늘 일정을 설명했다.

태풍 때문에 비바람이 심하니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경고가 이어졌다. 다행히 오늘 태풍이 지나고 나면 내일 돌아가는 일정은 문제가 없으니 안심하라는 말도 했다.

동시에 이 시간에는 과학과 수학 강연이 있으며 과학 연사는 강우, 수학 연사는 정명욱이라고 공지했다.

“억! 강우가?”

“학생이 강연을 맡는다고?”

반응이 다양했다. 강우를 잘 아는 학생들은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다른 반 학생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특히 강우를 경쟁자로 간주하는 이민찬과 주영식은 이건 아니라는 식으로 다른 학생을 선동했다. 그런 태도에 발끈한 손차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민찬! 그럼 넌 할 수 있어?”

“내 말은 학생이 하면 안 된다는 거야.”

“넌 강우의 강연을 들어본 적 없지? 페스타에서 강우가 얼마나 박수를 많이 받았는지 알아? 괜히 특별상 받은 게 아니거든.”

“그건 운이었겠지. 자료가 좋았던가.”

물론 이민찬도 지금 자신의 말이 얼마나 억지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기말고사에서 강우 때문에 망친 성적을 생각하면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얼마나 개쪽을 당했던가.

이민찬을 설득해보려던 손차희는 혈압만 상승한 채 포기했다. 그래도 수년간 경쟁하면서 미운 정 고운 정 쌓인 관계였는데 오늘 이민찬이 보이는 모습은 꽤 낯설었다.

“강우가 잘할까?”

“당연하지. 강우잖아!”

손차희는 윤수아의 말을 듣고서야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확고한 믿음을 보이는 윤수아와 함께 손차희는 열심히 강우를 응원했다.

정작 최대우는 뭔가를 주섬주섬 먹고 있었다. 말린 오징어다. 영화 관람이라도 온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손차희도 편안한 마음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학교 강당과 달리 의자가 편안했다.

* * *

물리 강연이 먼저 열렸다.

내심 수학 다음을 바랐던 강우는 금방 마음을 가라앉히고 연단으로 올라갔다. 학생들의 환호와 야유가 반반 섞여 들어왔다.

곳곳에 아는 얼굴이 보였다. 손차희, 윤수아, 최대우 외에 같은 반 학생들이 이곳저곳에 앉아 있었다. 그들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오래전 손강우 시절에 지금 이 장면과 비슷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천재라 불리는 과학고 학생들을 모아 놓고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강연을 해보고 싶었다. 과학기술이 국가 발전의 밑거름이라는 신념을 가진 그이기에 과학고 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연은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국가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앞서가는 과학자로서, 또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보람 있는 삶이라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아쉽게도 손강우 시절에 꽤 많은 강연을 했었지만, 과학고 학생을 대상으로는 강연을 해보지 못했다. 그 아쉬움을 바로 지금 달성하게 됐다.

페스타를 방문해서 강연을 들은 학생도 물론 과학에 관심이 있겠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과학고 학생만큼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갑자기 마련된 이 기회를 강우는 무척 소중한 마음으로 임했다.

“오늘 한라산에 올라갔어야 했는데 모두 아쉽죠?”

“우우!”

그가 입을 열자 한쪽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반 강우입니다.”

강우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 박수가 쏟아졌다.

“우리는 과학도이고 과학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널려 있죠. 우리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온 취지도 지질탐사 목적이 있습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자는 의도가 있는 거죠. 자, 지금 밖에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어요. 살벌합니다. 자칫하면 나갔다가 벼락을 맞을 것 같네요.”

그 순간 창밖에 번개가 내리치자 학생들은 안면이 얼어붙었다.

“마침 좋은 주제를 자연이 실시간으로 제공해 주는데 우리가 마다할 수는 없겠죠. 오늘 주제는 태풍입니다!”

강우는 화이트보드에 크게 태풍이라고 썼다.

지구과학 주제로 알고 실망하는 학생들도 보였다. 과학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과학의 모든 분야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 강연이 끝나면 알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태풍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먼저 강우는 화이트보드에 구불구불한 선을 그렸다. 그 선이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다.

“이게 뭘까요?”

“낙서요!”

“피카소!”

“유럽?”

“정답!”

강우가 그린 것은 유럽 지도였다. 워낙 엉망이라 간신히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알아볼 수 있었다.

“오늘 강연은 바로 유럽에서 시작합니다. 때는 19세기 초, 당시의 유럽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유럽의 중심에 있는 프랑스 또한 예외가 아니었지요. 이때는 포가 개발되어 전쟁에 새로운 개념이 심어진 시대였어요. 과거에는 병사들이 진격해서 직접 성을 공격해야 했지만, 이제 꽤 사거리가 긴 포가 개발되어 멀리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강우는 지도에 파리를 찍어놓고 외곽에서 날아가는 포탄을 그렸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건강한 남자라면 군대에 차출되어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때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매우 적은 시대였죠, 하물며 계산에 능숙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요. 그런 상황에서 삼각함수에 미적분까지 자유자재로 다루는 과학자는 매우 희귀한 인종이라 군에서도 특별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바로 포탄이 떨어질 곳을 계산하여 포신을 조준하는 일이었죠.”

현재 한국의 병역특례와 비슷한 제도가 그때 유럽에도 있었다는 사실에 학생들의 놀라움은 컸다.

강우의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에 학생들은 눈을 빛내며 집중했다. 순식간에 실내의 소란은 잠재워졌고 장내에는 강우의 낭랑한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포병은 무척 힘든 분과거든요. 그때는 훨씬 더 했죠. 전쟁터에 배치된 과학자는 뉴턴의 운동 역학을 이용해서 열심히 사거리를 계산했어요. 명중하면 포상을 받고 실패하면 얼차려를 받는 날을 반복됐죠.”

그때 프랑스 군대에 코리올리라는 과학자가 있었다. 낙하운동을 고려하여 열심히 사거리를 계산했음에도 이상하게 포탄이 떨어지는 위치는 예상과 달랐다. 무엇보다 남쪽이나 북쪽으로 포를 쏘았을 때 오차가 크게 발생했다. 이상하게도 남쪽으로 쏜 포탄은 더 서쪽으로 떨어졌고 북쪽으로 쏜 포탄은 더 동쪽으로 떨어졌다. 뉴턴의 운동법칙에 따르면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날도 실패하여 얼차려를 받은 코리올리는 도저히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상식에 반하는 행동은 용납해도 과학에 반하는 현상은 용납하지 못하는 이가 바로 과학자다. 분을 참지 못한 코리올리는 포의 궤적을 깊이 연구했고 마침내 그 원인을 발견했다.

“이게 바로 코리올리의 힘, 즉 전향력이 발견된 이면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코리올리의 힘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힘이죠. 바로 가상의 힘입니다. 물리학에서는 3대 가상의 힘이 있어요. 관성력, 원심력, 전향력! 이 가상력은 실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간주하면 이해가 편해지죠.”

강우는 강연을 계속했다.

그는 전향력이 속도가 빠를수록, 거리가 멀수록 더 강력하게 나타나는 힘이라고 설명했다. 눈앞에서 쏘는 권총에서는 전향력을 무시할 수 있지만 장거리 자주포에서는 전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심지어 대륙간 탄도 미사일에서는 전향력을 고려하지 않으면 파리에 떨어져야 할 미사일이 베를린에 떨어지기도 한다.

순식간에 화이트보드에는 강우가 그린 포탄 궤적, 미사일 궤적이 난무했다. 흡사 화이트보드에서 우주 전쟁이 벌어진 듯했다.

그리고 강우는 커다란 원을 그렸다.

“이건 지구입니다. 여기가 적도이고요.”

강우는 전향력이 발생하는 원인을 설명했다. 전향력은 지구의 자전 때문에 발생한다. 이 전향력은 전 지구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기에 지구 표면을 가로지르는 바람과 해류에 영향을 미친다.

“그럼 이제 태풍을 설명해볼까요? 태풍은 열대저기압이죠? 다 알죠?”

바람은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분다. 이 바람에도 전향력이 작용한다. 전향력 때문에 북반구의 저기압에서는 바람이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중심부로 몰려간다.

강우는 나선형으로 바람이 중심을 향하는 그림과 반대로 중심에서 밖으로 불어나오는 궤적을 그렸다. 저기압과 고기압이었다.

그렇게 태풍의 구조를 설명하고 이를 대기 대순환과 연결했다. 대기 대순환도 전향력의 영향 때문이다. 그 결과 제주도 아래에서 올라오는 태풍이 전향력이 지배하는 편서풍을 타고 어떻게 흘러가는지 설명했다.

강우의 신들린 강의에 청중은 숨을 죽였다. 오직 강우만이 이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 * *

김윤택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연단을 좌우로 오가며 청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강우는 학생이라 볼 수 없었다. 전문 강사의 느낌이 났다. 어떻게 저 녀석에게 저런 면이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허허.”

김윤택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삼켰다. 그도 십여 년을 교실에서 수업했으니 강연에 이력이 난 프로였다. 그런데 강우는 그보다 더 능숙했다. 말 한마디, 그림 하나, 손동작에 이르기까지 뺄 것이 전혀 없었다. 그 모든 동작이 마치 유기체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려 돌아갔다.

게다가 이 강연은 불과 한 시간 전에 주어졌다. 아무런 준비 없이 바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능숙하고 완벽하게 처리하다니! 단순히 많이 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저 녀석은 인강 강사로 데려놓아도 제 몫을 할 녀석이다. 과학을 이처럼 쉽고 흥미롭게 푸는 방식은 아무나 할 수 없었다. 지식과 말솜씨가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돌아가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대단하군.”

그가 감탄을 터트렸을 때 옆에서 차도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죠? 저도 페스타에서 처음 접했을 때 엄청 놀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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