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92화 (92/325)

제92화 두 번째 강연 (3)

차도도가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도 주제가 태풍이었습니까?”

“아뇨. 그때는 시계 이야기였어요. 그때도 1시간 만에 준비했었죠.”

시계라 하니 어떤 내용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쨌든 강우의 재능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물리 재능뿐만 아니라 강연 재능까지.

김윤택은 지금까지 강우를 제대로 접한 적이 없었다. 수업을 들어간 적도 없고 단지 담임을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기껏 짧은 시간 한두 번 마주친 적이 전부다. 널뛰는 강우의 성적을 보면서 한계를 보았고 차도도는 담임이기에 다소 과장해서 평가한다고 생각했다.

수학과 물리학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천재일지 의문 부호를 붙였었다.

그랬던 강우가 지금 그 재능을 드러냈다. 연단 위의 강우는 단순히 말을 잘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청중을 휘어잡는 자연스러운 설명과 예시에서 강우가 이 강연 내용을 얼마나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과학 천재가 분명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녀석이야.”

“그렇죠?”

흥분한 표정의 차도도를 보며 김윤택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차도도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녀의 표정은 마치 잘생긴 아이돌의 공연을 보는 듯했다. 학생을 향해 저런 표정을 짓는 선생을 보며 김윤택은 심각한 위화감을 느꼈다.

어쨌든 김윤택은 머릿속으로 지난 학기 과제연구를 떠올렸다.

그가 선택했던 이민찬과 손차희는 예상에 미치지 못했다. 손차희는 중간고사를 망쳤고 이민찬은 기말고사를 망쳤다. 입학 당시 우수학생이라고 들떴던 자신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반면 강우는…… 비록 기말고사 성적이 이상하지만 수학과 물리만큼은 최상이었다. 저 녀석이라면 과제연구를 완벽히 소화해낼 것이다. 이미 그 능력을 사이언스 페스타 최우수상으로 입증하지 않았던가.

“이번 학기에는 확실하게 잡아야겠어.”

김윤택이 슬그머니 주먹을 쥐며 중얼거렸다.

옆에 앉은 차도도가 고개를 돌리며 반응했다.

“네?”

“과제연구 말이야. 마도환 교수랑 엮어 공동 연구를 추진해볼까 해서.”

“R&E는 2학년 때부터 할 수 있지 않나요?”

“1학년도 못할 건 없지. 위에서 승인해주면 되니까.”

행정적인 면에서 자신감이 넘치는 김윤택이었다.

그가 생각할 때 한국대 마도환 교수는 핵융합 분야에서 국내 일인자다. 게다가 과학고에 관심을 보이고 있기도 했다. 학생들과 협업 연구를 추진할 수 있는 최적의 상대였다.

당연히 마도환을 마다할 학생은 없을 것이다.

“차 선생, 이번 학기에는 강우를 양보해주게. 차희는 데려가도 좋아.”

김윤택은 은근히 차도도에게 압력을 넣었다.

차도도는 대답 없이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그 미소를 김윤택은 수락으로 받아들였다.

* * *

“지구의 적도가 지나가는 아프리카 케냐에는 난유키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은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관광지입니다. 모든 관광지가 그러하듯 이곳에는 골동품을 파는 약장사가 있어요. 그 약장사는 바닥에 긴 선을 그어놓고 구경꾼에게 이야기합니다.”

강우는 화이트보드에 선을 쭉 그었다.

“이 선에서 북쪽에 있는 호텔에서는 화장실 변기 물이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내려가고 남쪽에 있는 호텔에서는 화장실 변기 물이 반시계방향으로 돌면서 내려간다고요. 정말일까요? 참고로 이 약장사는 이 내용으로 영국 BBC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의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BBC가 약 빨았나 보네.”

“으아, 더러워. 변기를 관찰했다는 거 아냐?”

“물이야 원래 회전하며 내려가는 거지.”

“큭큭, 똥 싸면서도 과학이냐?”

학생들의 야단법석에 강우는 말을 이었다.

“그 약장수는 코리올리의 힘 때문에 적도의 북쪽과 남쪽에서 회전 방향이 달라진다고 주장했지요. 그는 관광객들 앞에서 싱크대 배수통으로 실험해서 입증해 보이기도 했고요. 관광객들은 땅에 그어놓은 선을 건너자 이 배수통에서 빠지는 물의 회전 방향이 반대로 뒤집힌 것을 보고 놀랐죠. 정말일까요?”

“케냐 안 가봤는데…….”

“변기 보러 적도 갈 판이네.”

“역시 과학은 위대하구나.”

“위대한 건 네 뱃속이야. 매시간 뭘 처먹잖아?”

강우는 학생들의 반응에 미소를 지었다.

과학을 향한 호기심, 학생들의 관심은 그를 흥분하게 한다. 지금 강우는 이 학생들을 친구가 아니라 예전의 손강우가 그러했듯 미래의 이 나라에 헌신할 과학 꿈나무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시간이 소중했고 뜻깊었다.

“그렇습니다. 과학은 위대합니다. 하지만 과학은 어렵죠. 그래서 일반 대중은 가끔 과학의 본질을 잊고 현혹됩니다. 이 사건도 비슷하죠.”

과학을 끌어들인 약장사의 설명을 듣고 당연히 관광객들은 물의 회전을 진실이라 여겼다. 그들은 코리올리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위대한 과학 원리라는 설명에 진실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앞에서 제가 말씀드렸죠. 전향력은 먼 거리에, 위도가 높은 극지방일수록 뚜렷하게 나타난다고요. 우리가 떠올리는 적도의 풍경은…… 푸르른 남태평양 바다, 작열하는 태양, 바람이 불지 않는 아늑한 해변, 야자수에 걸린 해먹에 누워 바나나를 까고…….”

그렇다. 적도에서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 설사 불더라도 매우 약하다. 심지어 적도에서는 태풍도 없다. 그 이유는 코리올리의 힘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땅에 그은 선 하나를 두고 북쪽과 남쪽 호텔의 변기 물이 다른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빠져나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과학이란 이름으로 대중을 속인 술수에 불과하죠.”

“우리 집 씽크대에서도 물이 회전하며 빠져나가던데?”

“그건 배수를 빨리하기 위해 배수구에 나선을 내어 두었기 때문이지 코리올리의 힘과 전혀 관계가 없어요. 즉 우리 집에서는 물이 반시계방향으로 회전해도 옆집에서는 시계방향으로 회전할 수 있는 거죠.”

이어서 강우는 과학이란 이름이 다른 목적을 갖고 쓰일 때 얼마나 어이없는 사건이 일어나는지 예를 들었다. 역사상 발생한 참혹한 사건에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을 현혹해서 벌어진 사건이 상당히 많다.

강우는 과학자의 책임과 윤리를 논했다. 학생들은 과학자로서의 사명과 더불어 책임 의식을 통감하게 됐다.

* * *

“저 녀석 대체 뭐냐?”

이민찬이 신음을 터트렸다.

그의 옆에는 주영식이 앉아 있었다.

주영식은 3등으로 입학한 학생이었다. 중간고사 때 손차희가 망치고 기말고사 때 이민찬이 망친 것과 달리 주영식은 두 번 모두 꾸준한 성적을 거뒀다. 그 바람에 두 시험을 합산한 1학기 종합결과에서 그는 당당하게 전교 1등을 차지했다.

중간, 기말 모두에서 1등을 하지 못했던 그가 종합해서 1등을 차지한 것은 행운이었다.

물론 본인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지 않았다. 실력이라 여겼다.

“뭐긴, 약장수지.”

주영식이 강우의 강연 내용을 빗대어 대답했다. 그도 강우를 제대로 접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전에는 이름만 들었었다.

“그래도 강연 내용이 평범하진 않잖아?”

“모두 말빨이야, 말빨!”

현란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연단의 강우는 막힘이 없었다. 저 정도라면 유명 인강 강사의 수업에 비견할 정도였다.

“과학이 이렇게 재밌기는 처음인데…….”

“그게 저 자식이 노리는 거지.”

이민찬은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는 주영식을 힐끔 보면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말솜씨 문제가 아니다.

그가 주목하는 부분은 강연 내용이었다. 한 달의 시간을 두고 준비한다고 해도 이민찬은 저런 내용을 끌어낼 수 없었다.

그것을 강우는 불과 한 시간 만에 해냈다.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가 느껴졌다. 이것은 강연 실력이 아니라 문제를 만났을 때 접근하는 방식과 이해도의 차이였다.

“진짜 천재일까…….”

“천재는 개뿔! 둔재야, 둔재.”

주영식은 녀석을 폄하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건지 계속 강우를 까댔다.

예전에 이민찬도 그랬다. 손차희 정도를 제외하고는 고려 과학고에 자신을 상대할 인물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민찬은 언젠가는 강우 때문에 피를 볼 주영식에게 연민을 느꼈다. 지난 기말에 자신에게 벌어졌던 대참사를 아마 이 녀석도 오래지 않아 겪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강연이 끝났다.

“우아아아!”

학생들은 우레 같은 박수로 환영했다.

지루한 강연이 끝나서 환호하는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진심으로 강우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과학의 본질과 과학자로서의 사명을 깨닫게 해주었으니. 정작 태풍에 숨은 과학 이론은 덤이었다.

* * *

두 번째 강연은 수학.

강우는 가장 뒤쪽에 앉아 편안하게 경청했다.

정명욱 선생님의 강연은 무척 재미있었다.

강연 내용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수를 어떻게 대했는지, 그들은 방정식을 어떻게 풀었는지, 원주율과 원의 넓이를 어떻게 계산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강우가 앉은 자리는 가장 뒤쪽이어서 주변에는 선생님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차도도를 가장 먼저 찾았다. 그보다 두 줄 앞에 김윤택과 함께 앉아있었다. 강연이 어땠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여건이 아니다.

그가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신새벽이 다가와서 옆자리에 앉았다.

“강우 잘하던데?”

나지막이 그녀가 강우에게 말을 걸었다.

강우는 반갑게 대답했다.

“들을 만했어요?”

“재밌었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다 알지?”

“그야…… 기본이죠.”

“강연에 재능이 있는진 몰랐는데 말이야.”

과거 손강우 시절 강연했던 경험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신새벽은 선생님과 학생의 반응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대부분 호평이라는 칭찬이었다. 특히 강우를 잘 몰랐던 선생님들 사이에 인지도가 대폭 상승했다고 알렸다.

“강우야, 내가 보기에 너희 담임 쌤이 엄청 긴장하실 거야.”

“네? 왜요?”

수시로 기이한 발상을 드러내는 신새벽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이것도 천재의 특성인데……. 신새벽이 천재였나?

“그렇다고 왜 담임 쌤이 긴장해요?”

“널 다른 선생님들한테 빼앗길까 봐.”

“에이, 제가 무슨 물건인가요?”

“당장 이번 학기 과제연구에서 너랑 같이하고 싶다는 선생님들 많을 거 같은데.”

결국 선생님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는 말이었다. 그걸 어디에 써먹겠냐 싶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쌤도 긴장하시겠네요.”

“난 긴장 안 해.”

“음, 안 해요? 왜요?”

“난 너를 꽉 잡고 있거든.”

신새벽의 활짝 웃는 표정에서 자신감이 넘쳤다.

그녀는 갸웃거리는 강우의 의문을 곧바로 풀어주었다.

“넌 매일 나에게 톡을 보내야 하니까.”

“아!”

“넌 도망치지 못해. 어쩌냐?”

아무래도 이 관계는 화학 수업이 끝나는 날까지 변치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신새벽과 이야기하는 사이에 강연이 끝났다.

학생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중간에 강우와 마주친 녀석들은 엄지를 척 올렸다.

강우는 학생들을 뚫고 손차희를 비롯한 조원들을 찾았다.

그들의 칭찬을 기대하며 어깨를 으쓱이고 있을 때 고곽천재 세 사람이 등장했다. 그런데 어째 그들의 안색이 어두웠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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