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93화 (93/325)

제93화 과학사 공연 (1)

강우네 숙소에 고곽천재가 모였다.

굳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대낮이라지만 여학생 숙소에 강우와 최대우가 들어가기에는 남들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수학 과학 강연이 끝난 지금은 조별 장기자랑 준비 시간이어서 별 상관없긴 하지만 어쨌든 학생들이 바글거리는 그쪽 숙소보다는 교사용 숙소인 이쪽이 나았다.

“여기 아늑하네, 그렇지?”

방에 들어오자마자 윤수아가 소감을 말했고 손차희도 동의했다.

바로 맞은편이 담임 숙소라고 일러주었을 때 윤수아는 킥킥대며 한참 웃었다. 당연히 그 이유를 강우와 최대우는 알 수 없었다.

“자, 그래서 문제가 뭔데?”

이제 대화를 시작할 때다.

“조별 장기자랑에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손차희가 눈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강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바라지 않았던 일은 꼭 일어나는가. 이쯤되면 이것 또한 과학이 아닐까?

수학여행 오면서 장기자랑만은 나가지 않기를 바랐다. 어린애도 아니고. 손강우 시절을 떠올리면 애들이 재롱떠는 걸 보면서 박수나 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무대에 나가 장기자랑을 하자니.

아침부터 그 말이 나오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직전에 뒤통수를 맞았다.

“왜 갑자기…….”

“장기자랑 대회에서 상을 타면 학생부에 잘 써준다고 했거든.”

손차희의 의욕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내신 성적과 학생부에 목숨을 건 학생다웠다.

수시 입시의 판도를 좌우하는 학생부는 역시 전가의 보도였다. 이번에도 학생부가 관련되었다 는 한마디로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가를 유도하고 있었으니.

“하아!”

강우는 한숨을 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 손차희를 당연히 이해했다. 딱히 학생부가 아니라도 학교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그녀였으니까.

그는 이왕 할 거라면 잘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럼 뭘 하지?”

네 사람은 머리를 맞댔다. 일단 강우는 가장 평범한 레퍼토리부터 체크했다.

“노래 잘해?”

장기자랑에서 가장 흔한 게 바로 노래 아닌가.

윤수아가 대신 대답했다.

“차희 노래 잘해!”

“진짜? 그러면 노래로 하면 되겠다.”

최대우가 바로 반응했다.

“넌 잘하니?”

“나? 으…… 노래는 전혀 못 하는데. 남들이 돼지 멱 따는 소리라고…….”

“합창은 안 되겠네.”

강우는 최대우를 제쳐 두고 윤수아를 쳐다봤다.

윤수아도 바로 손을 저었다.

“흐음, 그럼 차희 혼자 불러야 하는 건가? 그건 좀…… 너희 둘, 춤 잘 춰?”

“으악!”

손차희와 윤수아가 동시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중에 반드시 꼭 시켜봐야겠다.

어쨌든 노래와 춤은 물 건너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차희 혼자서 노래를 불러봤자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고현성은 기타 친다더라. 댄스부 소속 애들은 댄스 공연한대. 작곡부 애들은 하모니카 불고……. 사물놀이 하는 애들도 있어.”

윤수아가 다른 조의 준비상황을 말했다.

자율 동아리에서 열심히 활약하는 학생들이 신나서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과학고 학생들은 공부만 한다는 선입관은 잘못되었다.

“우리는 자율 동아리 하는 사람 없어?”

모두의 시선이 손차희를 향했다.

손차희는 반드시 가입해야 하는 체험활동 동아리에는 수학연구반, 자율 동아리에는 이론 물리부에 가입했다. 동아리로 특기를 굳이 살린다면 그녀는 수학이나 물리 문제를 장기자랑 시간에 풀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했다.

네 사람의 한숨이 쌓였다.

살살 꼬시는 강우의 특기가 나왔다.

“그냥 포기하면 어떨까?”

“안돼!”

곧바로 손차희의 반대로 이어졌다. 그녀의 두 눈에서 빠직 불꽃이 튀었다.

“끙!”

내버려 두면 혼자서 노래라도 부를 기세였다. 차마 친구로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손차희가 노래 부르는 동안 나머지 셋은 뒤에서 춤을 추게 될까 봐 겁이 나서였지만.

이럴 때는 강우의 천재성도 그리 써먹을 데가 없…… 지 않다.

문득 한 가지 묘책을 꺼냈다.

“연극할까?”

“에이, 우리가 탤런트도 아니고 연극은 무슨……. 한다면 로미오와 줄리엣 할 수 있겠네.”

손차희는 회의적이었고 강우는 설득에 나섰다.

“로미오 줄리엣 말고 과학사 연극. 고대나 근대 과학자를 연기하면 취지도 괜찮고 대상이 과학고생들이니 이해가 빨라 재미있어할 거고…….”

“우물에 빠진 탈레스나 목욕탕에서 유레카라고 외친 아르키메데스?”

윤수아가 좋은 생각이란 듯이 눈을 반짝였다.

강우는 차분하게 가능성을 검토했다.

“간단하게 분장도 가능할까?”

“연극부 애들에게 소품 빌리면 돼.”

역시 이럴 때는 발 넓은 윤수아가 치트키였다.

* * *

태풍이 다 지나갔는지 저녁이 되자 비바람이 잦아들었다.

창문으로 백사장으로 밀려오는 성난 파도를 바라보던 학생들은 날씨가 잠잠해지는 것을 보며 안심했다. 어쨌든 이대로라면 내일 서울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저녁을 먹은 후 예고한 대로 리조트의 중앙홀에 모였다. 낮에 강연을 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여기에는 앞에 연단이 마련되어 있어 공연하기에도 좋은 구조였다.

고곽천재는 관람석의 한쪽 구석에 모여 앉았다.

그들의 순서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

다른 조의 공연을 보면서 지루하게 기다려야 하지만 오히려 좋은 점도 있었다.

단상에선 김윤택이 조별 장기자랑의 시작을 알렸다.

심사위원은 선생님 세 사람.

둘은 강우가 모르는 선생님이었고 다른 한 명은 신새벽이었다. 심사위원 자질은 논외로 치고 어쨌든 친한 선생님이 포함되어있는 거라 나쁘지 않았다.

첫 타자는 이민찬네 조.

이민찬이 앞에 서고 그 뒤로 세 학생이 섰다. 그리고 노래 시작.

이민찬 혼자 노래를 불렀다.

그러는 동안 뒤에 선 세 학생이 코러스를 넣고 있었다.

“이민찬이 이렇게 노래를 잘 불렀다고?”

“많이 잘 부르지.”

강우의 질문에 윤수아가 대답했다.

역시 이민찬은 다방면으로 뛰어나다는 느낌이었다.

강우는 편한 마음으로 이민찬의 노래를 들었다. 조원 셋을 완전히 병풍으로 만든 장기자랑이었지만 그렇게 하고도 욕을 먹지 않을 만큼 노래 실력이 탁월했다.

“대단하긴 하네.”

이민찬은 분명히 뛰어난 학생이다. 수학부터 시작하여 과학, 국어, 영어 등 공부에서는 전 과목에 재능이 있었다. 게다가 예체능도 잘했다.

이처럼 다방면으로 뛰어난 학생이 바로 수재였다.

다만 엄밀하게 따지면 수재와 천재는 다르다. 전 방면에서 모두 천재인 사람은 극히 드무니까. 여러 개를 잘하는 게 나은지, 하나를 잘하는 게 나은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실정에서는 여러 개를 잘하는 사람이 더 안정감 있는 삶을 산다는 통계가 있긴 하다.

어쨌든 이민찬은 뛰어 나지만 강우가 생각하는 천재는 아니었다.

이민찬의 저 괴팍한, 으스대는 성격은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많은 분야에서 앞서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심성이 나빠서는 아니다.

이민찬의 고운 목소리가 장내를 메우자 학생들이 노래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손차희와 윤수아도 연극 준비를 멈추고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강우는 괜히 샘이 났지만 고작 노래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신승리를 하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청중의 박수를 받으며 이민찬이 단상을 내려왔다.

그다음 순서는 고현성. 심지어 이 녀석은 혼자였다. 같은 조원은 단상에 오르지 않았다. 조별 장기자랑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모르겠다.

기타를 들고 꾸벅 인사한 녀석이 태풍이 부는 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낭만적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나지막하게 노래를 더했다.

강우가 보기에 노래 솜씨는 별로였으나 기타를 치니 꽤 멋있게 보였다.

고현성도 무난하게 장기자랑을 끝냈다. 곧바로 음악 공연이 이어져서 여운이 오래가진 않았다.

이어서 한 무리의 학생들이 커다란 흰 종이와 매직펜을 들고 단상에 올라갔다.

“저희는 선생님들 캐리커처를 그려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심사위원들과 다른 선생님들 앞에 앉아서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윤수아가 바로 설명해주었다.

“쟤들은 만화창작부 애들이야.”

과학고 학생들이 의외로 재주가 많다. 순식간에 캐리커처가 완성되었고 한 장, 한 장 보여주기 시작하자 청중의 감탄이 이어졌다.

강우가 보기에 각 선생님들의 특징을 확실하게 강조해서 잘 그렸다.

그때 단상 위가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야! 아무리 내가 미워도 그렇지, 그게 왜 내 얼굴이냐? 그건 마녀잖아?”

“서, 선생님 맞는데요.”

“화학 쌤이잖아요. 화학하면 연금술이고 연금술하면 마녀죠. 아! 지팡이도 그려드릴 걸 그랬나…….”

“야! 이것들아!”

신새벽이 빽 소리 질렀다. 넓은 홀이 웃음바다가 됐다.

강우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보면 볼수록 신새벽은 희한한 캐릭터였다. 그가 볼 때 마녀처럼 그려진 캐리커처는 그녀의 외모보다 마음을 잘 포착했다. 하지만 신새벽에게서 점수 잘 받기는 틀렸다.

이어서 공연이 계속됐다. 지루하고 단순한 합창도 있었고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장기자랑도 있었다.

그사이 강우네 조는 열심히 분장했다. 특별한 도구가 없어 화장품으로 수염을 그려 얼굴 분장을 했고 연극부에서 빌려온 중세 귀족 복장, 어린아이용 장난감 플라스틱 칼 등을 착용했다.

수학여행을 오는 데 왜 이렇게까지 챙겨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다양한 소품들이 있었다.

강우는 정신없이 주요 대화를 요약한 대본을 확인했다.

빠른 시간에 준비해야 했기에 완벽한 극본은 아니었다. 조원들의 애드립과 순발력에 기대를 걸어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또 짧은 시간에 대사를 다 외우기도 어려워서 해설을 적재적소에 넣어야만 했다.

해설자는 윤수아가 맡았다. 우람한 체구의 최대우는 그 자체만으로도 웃음을 자아낼 수 있어 욕심 많은 중세 성주를 비롯하여 다양한 역을 맡겼다.

연기를 잘하리라 기대되는 손차희에게도 주요 배역을 안겼다. 수염을 붙이니 중세 귀족풍의 중성적인 매력이 돋보였다. 어차피 인원이 적어 모두가 주연급이다.

어쩔 수 없이 강우도 핵심 인물로 등장해야 했다. 그것도 이 연극의 주인공으로.

친구들이 배역과 강우의 성격이 비슷하다고 우겨서였다.

* * *

흰 종이를 오려 만든 수염을 코밑에 붙이고 중세 귀족풍 옷을 걸친 윤수아가 앞으로 나섰다. 은테 안경을 끼고 있어 조금 이상하게 보이긴 했지만. 그녀는 의자를 가져와서 앉은 다음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때는 1546년, 덴마크의 귀족 가문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무대 위로 중세 부인 복장의 손차희가 등장했다.

“나? 귀족이야, 귀족!”

손차희가 본인을 가리키며 스스로 소개했다.

이어서 강우가 기어 나왔다. 네발로 기어가던 강우는 손차희 앞에서 어린애 목소리로 칭얼댔다.

“엄마, 엄마!”

관객들의 웃음이 터졌다.

그때 심사위원 쪽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와아! 강우다!”

놀란 강우가 그쪽을 쳐다봤다. 신새벽이 과하게 열정적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하아, 진짜 주책은…….”

전교생 앞에서 심사위원인 신새벽이 저렇게 소리 질러도 되는지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그 바람에 강우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는 동안 관객의 웃음이 다시 터졌다.

황당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던 손차희가 강우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서 오렴, 복 많은 아이야.”

“엄마, 내 이름이 복 많은 아이야?”

“그래, 라틴어로 티코라고 한단다.”

그들의 과학사 연극은 근대 천문학의 지평을 열었던 티코 브라헤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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