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과학사 공연 (2)
“티코가 16세이던 여름밤이었어요.”
윤수아의 설명과 함께 강우가 앞으로 나왔다. 강우도 중세 귀족풍의 옷을 걸치고 있었다.
“하늘에 별이 많네?”
강우는 천장을 쳐다보며 마치 별이 보이는 것처럼 고개를 휙휙 저었다.
저쪽에서 우람한 청년이 올라왔다. 바로 최대우였다.
“허허, 티코! 뭘 보나?”
“목성과 토성을 봐! 저기 밝은 두 별이 목성과 토성이야.”
“흠, 그렇군. 목성과 토성이 만나면 불길하다지?”
“아냐! 천체의 운행은 과학이지 미신이 아니야. 점성술은 과학이 아니야!”
길길이 날뛰는 강우를 최대우가 달랬다.
“하아! 넌 눈이 좋은가 보구나.”
“난 눈이 엄청 좋아서 천문학자가 적성이지! 나는 역사상 최고의 천문학자가 될 거야.”
“그 눈으로 옆집 아가씨를 쳐다보지 말게.”
최대우가 들어가고 윤수아가 설명을 이었다.
“목성과 토성을 관측하던 티코는 기존에 공개된 행성 운행표가 엉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이때부터 그는 천문 관측에 일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었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티코는 법학 대학을 다니고 있었죠.”
이번에는 최대우가 장난감 칼을 들고 등장했다.
“티코 나와라! 감히 수학자를 제쳐 두고 건방진 법학자가 더 수학을 잘한다고 우기다니!”
“실제로 내가 제일 잘하는데 어쩌라고?”
강우도 플라스틱 칼을 들고 반박했다.
“하아! 결투다!”
“그렇지! 우리 귀족은 정정당당한 결투로 승부를 가리지! 덤벼라! 으악!”
최대우가 칼로 강우를 두들겨 패는 시늉을 했다. 강우는 열심히 도망쳤다.
“하하! 비겁한 티코! 넌 졌다!”
“으아! 감히 내 복코를 베다니!”
“친구에게 안하무인으로 대들다가 강우는…… 아, 아니 티코는 코가 날아가 버렸죠. 그래서 평생 티코는 코를 가리고 다녀야 했어요. 티코가 26살이 되었을 때……”
강우가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새로운 별이 나타났다! 엄청 밝은 별이야! 저게 초신성이라지?”
“티코는 카시오페아 자리에서 초신성을 발견했고…… 이처럼 열심히 관측하는 티코에게 프리드리히 왕이 덴마크 남부의 섬에 천문대를 세워주었죠. 즉 티코는 지역의 영주가 되었어요.”
“천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측의 정확성이야. 정확도 면에서 나를 따라올 자는 아무도 없어!”
강우가 하늘을 휙휙 둘러보며 관측하는 흉내를 냈다.
“티코는 열심히 관측해서 기록을 모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우가 하늘을 보고 있을 때 평민 여인의 옷을 입은 손차희가 앞을 지나갔다.
“어이! 거기 가는 아가씨!”
“헉! 영주님!”
손차희가 안절부절못해서 허리를 굽혔다.
“오늘 밤 나랑 데이트나 해볼까?”
“전 지아비가 있는데요?”
“그 지아비 조금 뒤면 죽을 거니라.”
강우가 손차희의 손을 끌었다.
“티코는 악명높은 영주였죠. 하지만 그의 천체 관측 실력을 따라올 자는 없었습니다.”
무대에서 강우와 손차희가 사라지고 잠시 후 남자 복장을 한 손차희가 나타났다.
“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케플러!”
손차희가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두툼한 책을 들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무리 검토해도 천동설은 틀렸고 지동설이 맞아. 그런데 증명할 방법이 없군. 증명에 필요한 관측기록은 오직 티코만 갖고 있지. 티코의 제자로 들어가야겠어.”
무대를 몇 차례 돌아다니던 손차희가 어느새 나타난 강우 앞에 무릎을 굽혔다.
“선생님,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어? 넌 조금 전 그…… 농부의 아내가 아니냐?”
“아닙니다. 전 수학자인 케플러입니다.”
“그래? 암만 봐도 여자처럼 생겼는데?”
“남자라니까요.”
관중석에서 폭소가 터졌다.
“알았다. 내 제자가 되려면 눈이 좋아야 하는데…… 저게 누구처럼 보이냐?”
강우가 심사위원석에 앉은 신새벽을 가리켰다.
“흠, 마녀처럼 보입니다.”
“올커니! 딱 맞췄구나!”
학생들이 다시 웃고 신새벽이 버럭 소리쳤다.
“강우! 너 죽었어! 내가 마녀라니!”
“아, 제가 잘못 봤습니다. 마녀가 아니라 천사인데요?”
재빨리 손차희가 정정했다.
“케플러야, 넌 눈이 나쁘구나. 내 제자는 조금 힘들겠고…… 그냥 밑에서 굴러라. 이게 바로 갑질이니라!”
손차희가 책을 뒤지며 열심히 일하는 흉내를 냈다.
“티코와 케플러의 만남은 위대한 관측자와 위대한 수학자의 환상적인 조합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이 발생했죠. 케플러는 목적했던 티코의 기록을 좀처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대 중앙에 최대우가 나섰다. 그는 숙소에서 가져온 그릇 십여 개를 무대에 쫙 갈았다.
“하아! 내 친구 티코여! 우리 함께 만찬을 즐기세.”
“오오! 좋지!”
귀족 차림의 최대우와 티코가 마주 앉았다.
최대우가 콜라를 잔에 따르고 강우에게 주었다.
“무릇 귀족이라면 먹다가 죽어야 체면을 차리는 법! 자, 오늘 죽을 때까지 먹어보세.”
“좋지. 먹다가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고와.”
“그냥 먹으면 재미없잖나? 내기하세.”
“내기? 당연하지. 귀족은 화장실을 가면 지는 거야. 큰 것도 작은 것도 안 돼!”
티코인 강우가 허세를 부렸고 만찬 주인인 최대우는 모든 그릇에 콜라를 부었다.
강우는 최대우가 주는 잔을 받아 마셨다.
“으아, 소변 마려!”
“하아, 귀족의 체면을 지키게. 무릇 귀족이라면 참아야 하네. 자 얼른 또 들게.”
최대우가 연거푸 콜라를 권했다.
강우는 다시 콜라를 받아마셨다. 그렇게 무려 큰 페트병 하나가 바닥을 드러냈다. 윤수아가 설명했다.
“만찬장에서 화장실을 참으며 열심히 먹고 마셨던 티코는 오줌을 참은 병으로 사흘 후 숨을 거둡니다.”
관람객들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구경하던 어떤 학생이 물었다.
“이거 진짜예요?”
“배가 터졌어요?”
“흐아, 나 지금 배 터질 거 같아!”
콜라를 퍼마신 강우가 바닥에서 흐느적거렸다.
“역사적 사실입니다. 저희 고곽천재는 역사를 왜곡하지 않습니다.”
다시 손차희가 나타났다. 그녀는 쓰러진 강우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흑흑 스승님! 이렇게 어이없게 돌아가시다니요! 역사상 최고의 천문학자라 하기에 너무 쪽팔립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잖습니까? 스승님께서 남기신 관측 결과를 이용해서 지동설을 증명해보겠습니다!”
손차희가 열심히 책을 넘기는 시늉을 했다.
윤수아가 마무리를 지었다.
“이렇게 해서 지동설이 증명되고 케플러 법칙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여러분, 케플러 3법칙 아시죠? 타원운동의 법칙, 면적속도일정의 법칙, 조화의 법칙! 이 세 법칙의 뒤에는 티코와 케플러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답니다. 오늘 연극 끄읕!”
청중들의 박수가 터졌다.
윤수아가 마지막 인사를 하겠다며 조원을 불러 모았다. 정작 강우는 번개처럼 사라졌다.
“어? 강우야! 인사해야지!”
“나, 쌀 거 같아!”
“푸하하하!”
다시 폭소가 터지고 윤수아와 최대우, 손차희만 머리를 숙이고 연극을 마쳤다.
* * *
장기자랑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고곽천재의 연극은 계속 화제에 올랐다.
심사위원을 포함하여 관람한 교사와 학생들은 연극 아이디어를 신선하다고 평가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과학자의 일대기를 코믹하게 잘 그렸다. 소품이 부족했음에도 이미지를 잘 전달했고 얼렁뚱땅 흘러가는 장면에서도 핵심을 잘 짚었다.
배우들의 연기력이야 고만고만했지만 어쨌든 학생이라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장기자랑이 끝나자 어느새 밤이 깊었다.
상을 발표할 시점이다.
심사위원 대표로 나온 신새벽이 단상에 섰다.
마이크를 잡은 그녀는 청중을 둘러본 다음 입을 열었다.
“학생 여러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재밌었어요! 준비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 모두 상상 이상으로 잘해줬습니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여러분의 재능을 오늘 다시 확인했습니다.”
학생들이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그녀를 주시했다.
오늘 출전팀은 모두 15개 조. 대략 전체의 절반 정도가 참여했다. 그들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모두 열심히 했다. 오늘 이 밤은 수학여행의 아름다운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모두 세 팀에게 상을 수여하겠습니다. 금상, 은상, 동상. 먼저 동상부터 발표하겠습니다.”
동상은 가요를 합창한 팀에게 돌아갔다. 그 팀에는 교내에서 가장 노래를 잘 부른다는 평을 듣는 학생이 있었다. 노래를 받쳐주는 배경 반주까지 녹음해서 준비한 노력을 높이 샀다.
은상은 차력 쇼를 연기한 팀이었다. 무엇보다 조원들의 협동심이 돋보였다. 그리고 금상에는…….
신새벽은 수상 명단이 적힌 쪽지를 들고 청중을 쭉 훑었다. 그녀의 눈에 강우가 보였다.
“마녀라고 해서 안 뽑아주려 했는데…….”
학생들의 웃음이 다시 터졌다.
“티코와 케플러를 연기한 3반의 고곽천재에게 금상을 수여합니다. 앞으로!”
강우는 조원들과 함께 앞으로 나갔다.
주변의 눈길이 그들에게 쏠렸다.
애초에 그는 장기자랑에 나설 생각이 없었다. 손차희가 강제로 그를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구경이나 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손차희의 적극성이 그를 옭아맸다. 손차희는 학생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뛰어들었겠지만 생각해 보면 어느 분야든 열심히 적극적으로 임하는 타입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성과를 냈다.
오늘 장기자랑 금상 수상도 그녀의 그런 적극성이 뒷받침한 결과였을 것이다.
물론 대본을 한번 읽어보고도 내용의 핵심을 깨달은 조원들의 능력 덕분이기도 하다.
“별도의 상장은 없습니다만 상금이 있습니다. 금상 수상자에게는 교내 편의점에서 사용할 수 있는 10만 원 상품권을 드립니다.”
물론 요즘에는 모바일 상품권이다. 윤수아가 대표로 상품권을 휴대폰으로 받았다.
“으흐흐, 한동안 먹을 게 많아지겠네.”
최대우와 윤수아가 가장 좋아했다.
신새벽이 강우와 손차희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아까 나보고 마녀라고 했지? 내가 정말 마녀처럼 생겼어?”
“허억! 선생님은 천사예요! 천사!”
강우는 바로 천사라고 강조했다.
그들이 관람객을 향해 인사하자 박수 소리가 홀을 가득 메웠다.
* * *
수학여행 마지막 밤이다.
숙소로 돌아온 강우는 잠자리를 준비했다.
“밤에 밖으로 나가지 마라.”
차도도가 경고하고 돌아갔다.
굳이 귀찮게 나돌아다닐 생각이 없었던 강우는 편하게 침대에 엎어졌다.
“강우야, 바다 보러 가지 않을래?”
이 녀석이 왜 이러지? 그가 아는 최대우는 일탈을 즐기는 그런 인물은 아니다. 이 녀석이 갑자기 나가고 싶다면 뜻이 있어서다.
“아직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 비는 그쳤어?”
“하아, 오다가 보니 날이 완전히 갰더라.”
역시 별을 보는 녀석인 만큼 기상 변화를 기가 막히게 알아챘다.
생각해 보니 태풍 때문에 리조트 앞 백사장도 제대로 걷지 못했다. 파도가 잠잠해졌다면 어둠이 내린 해변을 걷는 것도 운치 있을 듯하다.
물론 선생님들은 절대 안 된다고 하겠지만.
학생들 숙소와 달리 이 숙소에는 감시가 소홀했다. 마음먹는다면 야밤에 산책하는 일이 어렵진 않았다.
“가보자!”
강우는 흔쾌히 동의했다.
최대우와 함께 주변을 살피면서 숙소를 벗어났다.
리조트를 벗어나자 바로 백사장이 나왔고 어둠 속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태풍이 몰아쳤냐는 듯 세상이 평온했다.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보고 있자니 시름이 모두 날아가는 기분이다.
“하아! 좋다!”
강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때아닌 자유를 만끽했다.
눈앞에 검은 바다가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맑게 갠 밤하늘이 어느 때보다 영롱하게 머리 위에 얹혀 있었다.
하늘을 가로질러 바다 저쪽으로 흘러가는 뿌연 은하수가 눈을 떼지 못하게 사로잡았다.
“천국이네…….”
밤하늘의 별이 이렇게 멋있을 줄이야! 대자연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는 그 대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을 탐구하는 과학자다.
강우는 옆에서 핸드폰 불빛을 켜고 책을 뒤적이는 최대우에게 눈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