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95화 (95/325)

제95화 과학사 공연 (3)

“뭔데?”

“중요한 일.”

최대우는 소책자 하나를 꺼내 놓고 열심히 하늘과 책을 살폈다.

“여기까지 와서? 갑자기?”

“하아! 여긴 특별한 곳이야.”

“왜?”

“마라도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 최남단이니까.”

강우도 그를 따라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별이 총총했다. 서울보다 별이 엄청나게 많이 보이긴 하지만 무엇이 특별한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최대우가 남쪽 수평선 먼 곳에서 반짝이는 별을 가리켰다.

“여기에서는 서울보다 훨씬 남쪽 하늘까지 볼 수 있거든.”

“남십자성이나…… 마젤란은하도 보여?”

그나마 들어본 천체를 강우는 입에 올렸다.

“하아, 그건 적도까지 내려가야 볼 수 있는 거고. 난 남쪽 하늘을 보고 싶었거든. 이곳의 하늘은 울릉도나 서울과는 또 다르니까. 특히 오늘은 날이 맑아 수평선 부근까지 잘 보이는 날이라…….”

태풍의 영향일까. 바다에서 저렇게 수평선 부근까지 별이 보이는 날은 드물다고 했다.

지구는 둥글다. 서울은 북위 37.5도에 있고 서귀포는 33.3도니까 이론상으로는 대략 4도 정도 더 남쪽의 별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적위 -56.7도에 위치한 별을 볼 수 있어. 높은 산에서 보면 이론보다 1도 정도 더 아래쪽 별도 볼 수 있다는데…… 한라산 올라가서 별 보고 싶다.”

“언제는 한라산 등반한다니까 죽을상 하더니.”

“그건 낮에 올라가는 거고, 난 밤에 올라가야지.”

보면 볼수록 이 녀석은 하늘에 미친 녀석이다.

강우는 최대우가 가리키는 별을 유심히 봤다. 덕분에 그도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별을 잘 구경했다.

새로운 것을 접하면 가슴이 뛴다. 그것이 별이든 달이든 아니면 다른 자연 현상이든. 과학은 그 열정과 호기심을 바탕으로 계속 발달해왔다.

오늘 접하는 저 별빛이 최대우에게는 앞으로 과학을 헤쳐나갈 때 훌륭한 토대가 될 것이다. 물론 강우에게도 마찬가지다.

“별 보고 있으니 좋다!”

“하아아, 누워서 별을 보면 더 좋아.”

최대우가 모래사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하늘을 이불 삼아 잔다더니 지금이 그런 자세다. 저런 때묻지 않은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강우도 옆에 누우려 할 때 저쪽에서 그림자가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멈칫거리면서 접근하는 인영은 익숙한 여인의 그림자였다.

“거기 누구니?”

차도도의 목소리였다.

차도도가 왜 여기에? 놀란 강우는 크게 소리쳤다.

“강우랑 대우인데요!”

“너희들 내가 나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허억!”

강우는 다급한 경악성을 터트렸지만 정작 눈은 웃고 있었다. 차도도가 그들을 혼내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 가까이 온 차도도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저희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아셨어요?”

“너는 몰라도 대우는 갈 곳이 여기뿐이지. 대우가 이렇게 별이 쏟아지는 밤을 놓칠 리가 없어.”

과연 담임답게 최대우의 성향을 완벽하게 꿰고 있다.

차도도도 강우 옆에 나란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빛에 흐릿하게 빛나는 그녀의 얼굴이 새삼 눈부셨다.

“선생님도 같이 별 보실래요?”

누워있는 최대우와 서 있는 강우 사이에서 고민하는 눈치다.

이윽고 결심한 듯 차도도가 입을 열었다.

“강우는 나랑 잠시 걸을까?”

“네.”

당연히 마다할 강우가 아니었다.

“대우야, 여기에서 별 보고 있어. 강우 내가 잠시 빌려 갈게.”

“그러세요.”

최대우는 별빛에 취해 정신이 없어 보였다.

차도도가 먼저 백사장을 따라 걸었고 강우도 곧바로 그녀 옆에서 걸음을 옮겼다.

선선한 바람, 검은 바다, 요란한 파도 소리,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 그 모두가 이국적인 정서를 느끼게 했다.

한참 동안 차도도는 아무 말이 없었다.

걸음을 옮기다 보니 서서히 리조트 불빛이 멀어졌다. 주변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오로지 밤하늘을 채운 별빛만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이렇게 걷는 건 페스타 때 이후로 처음이네요.”

“그러게.”

짧은 대화 이후에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내 차도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강우의 이름을 불렀다.

“강우야.”

“네.”

“예전부터 느끼긴 했는데…… 이번 수학여행에서 더 확실해졌어.”

“뭔데요?”

“네가 좀…… 특이하다는 거. 적어도 학술대회장에서 고등학생이 그런 질문을 할 수는 없잖아?”

순간 강우는 긴장감이 확 일었다. 설마 다른 사람이 강우의 몸에 빙의했다는 것을 눈치챘나? 엄밀히 따져보면 그동안 학교에서, 또 학교 밖에서 강우는 일반 고등학생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의 주변에 있는 차도도나, 고곽천재 동료들이 그를 특이한 존재로 바라보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빙의니 환생이니 이런 것은 소설에서나 나오는, 말도 안 되는 현상 아닌가.

“제가 좀 잘 나긴 했죠?”

“풉!”

차도도가 기분 좋게 웃었다.

“이만하면 얼굴도 잘생겼지, 키도 제법 크지, 공부도 웬만큼 하지…….”

“어이구, 그래, 잘났다.”

“잘난 제자 둬서 좋으시잖아요?”

“그래, 가끔 엉뚱한 짓 하는 것만 빼면.”

차도도의 목소리가 밝고 경쾌했다. 그녀의 기분이 썩 좋아 보였다.

“그래서 우리 담임 쌤께서는 무엇이 불만이실까요?”

“불만이라기보다…… 한 학기 동안 네 성적 변화와 실적을 따져봤는데…… 네가 굳이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기분을 받았거든. 그렇지?”

예전에 기말고사 직전에 비슷한 의견을 낸 적이 있었기 때문일까.

“역시 제자 마음은 쌤이 잘 아시네요.”

이제는 스승이라는 표현이 거리낌 없이 나왔다. 처음 입학했을 때는 차도도를 배움을 주는 존재라기보다 인생에서 거쳐 가는 타인처럼 느꼈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스승이란 꼭 지식을 전하는 사람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인생의 경험을 전할 수도 있고,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옛말에도 세 사람 가운데 배울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다고 하지 않던가.

빙의해서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서일까, 아니면 집에서 떨어져 기숙사에서 생활해서일까. 이 순간 강우는 적잖게 차도도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는 자신을 발견했다. 딱히 나쁘진 않았다. 어차피 사람은 혼자서 독불장군으로 살 수 없으니까.

“예전에 네가 세웠던 계획과 엮어 보니…… 역시 너는 실적을 만들어 외국으로 진학하는 게 답일 것 같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김윤택 선생님에게 수학 올림피아드 추천서를 부탁한 일은 잘했어.”

“모두 작전이죠. 헤헤.”

강우는 차도도와 함께 크게 웃었다.

야밤의 해변이 한결 아늑해지는 기분이다.

“오늘 강연은 어땠어요?”

“예상보다 훨씬 잘했어. 내가 지난번 강연도 봤었잖아? 강연하는 네 모습은 마치…….”

“마치?”

차도도는 미소만 지을 뿐 뒷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별빛이 내려앉은 그녀의 얼굴이 얼핏 붉어진 기분이 든 것은 괜한 착각일까.

“쌤!”

“응?”

“이번 학기 과제연구요, 쌤이랑 할 생각인데. 어때요?”

“그, 그게…….”

물론 차도도가 바라던 일이다. 다만 그녀는 그것이 강우에게 바람직한지 확신하지 못했다. 강우를 위해서라면 여전히 발이 넓은 김윤택이 맡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다.

그녀가 맡았을 때 한태규의 제안이 성사될지도 의문이었고.

강우는 그녀의 내심을 충분히 추측하고 있었다.

“오늘 보셨다시피 저도 아는 사람 많아요, 설사 지금은 모르더라도 안면을 트는 일 자체가 어렵지 않아요. 그래서 저에게는 유명 교수와 연결해줄, 발 넓은 사람보다 저를 확실하게 응원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의 앞을 가로막을 김윤택과 그를 지원할 차도도. 누가 더 나은지는 따질 필요조차 없다.

상기된 표정으로 차도도가 용기를 내어 물어왔다.

“벌써 주제를 결정했니?”

“주제랄 게 있나요, 오늘 만난 카이스트 교수님과 하려고요. 연구비도 지원해주신다니까…….”

인건비를 지원해주면 가난한 강우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고등학생이 대학교수의 연구에, 그것도 국가 지원사업에 끼어들어 공동 연구를 수행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설사 김윤택이 다리를 놓아 R&E를 수행하더라도 그만큼 뜻있는 과제연구를 선택할 수 없다. 고속전철 과제는 모든 과정을 강우가 직접 해당 교수를 설득해서 작업한 셈이다.

차도도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도 그 연구 프로젝트가 강우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확신했다. 다만…….

“규정상 1학년은 R&E를 못해.”

“그 부분을 쌤께서 풀어주셔야죠. 부탁드려요.”

“요 녀석! 어쩐지 날 끌어들이더라니…….”

“차희를 비롯한 조원 전체가 같이할 거예요. 쌤은 연구를 총괄하는 지도교사로. 괜찮죠?”

“그래, 나를 잘 이용하도록 해. 열심히 밀어줄게.”

차도도가 순순히 수락했다. 이번 학기에 있을 과제연구를 기대하는 눈치다.

강우는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제주도 방문을 계기로 많은 것을 이루었다. 한태규와 김윤택에게, 또 차도도에게 인정받아 미래를 향한 초석을 확실히 다졌다.

2학기에 한태규 카이스트 교수와 공동 연구를 수행하면 대학 진학을 위한 발판 마련은 물론 물리학계에도 족적을 남길 수 있게 된다. 고등학생이 쓴 논문은 분명 화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본격적으로 핵융합 연구에 시간을 투자해서 외국 유학 기반을 다져야 했다.

졸업할 때쯤에는 핵융합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사가 되어 있도록.

그렇게 되면 국내의 명성도 따라오고 훗날 마도환과의 싸움에서도 우위에 올라설 수 있다.

당연히 그의 계획에 따르면 이 모든 길을 친구들과 함께한다. 손강우 시절의 경험에서 연구에 있어서 독불장군은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파도 소리에 강우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해변을 따라 걷는 재미가 제법이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옆으로 몇 발자국만 들어가면 파도가 닿는 지점이다. 발밑으로 물에 다져진 모래가 밟혔다.

“쌤, 이렇게 걸으니까…….”

“걸으니까 뭐?”

“아니에요.”

“음흉하긴. 말을 꺼냈으면 끝까지 안 할래?”

“그냥 좋다고요.”

차도도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별이 반짝였다.

눈을 마주친 강우는 빙그레 웃었다.

차도도가 그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

“이 녀석! 오늘만이야. 내일부터는 이럴 일 없어.”

“그거 많이 들어본 멘트인데요? 드라마에서 ‘너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이야!’라고…….”

“어휴, 이제 그냥 막 기어오르네. 이제 대우 데리고 들어가자 다른 선생님들이 걱정할라.”

어색한 듯 차도도가 그의 팔을 놓았다.

뜻깊은 산책이었고, 또 좋은 여행이었다.

강우에게는 다시 태어난 후 모든 시름을 잊은, 가장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다.

그 시각, 최대우는 백사장에 드러누워 열심히 별을 세고 있었다.

“별 하나, 별 둘, 별 셋, 별 넷…….”

“대우야,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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