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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96화 (96/325)

제96화 추천서와 R&E (1)

2학기가 시작되는 날, 기숙사를 출발해서 부푼 마음으로 강의실로 향하는 학생들과 달리 강우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힘이 없었다.

그의 옆에서 발을 맞추는 최대우도 비슷했다.

두 사람이 목적지인 B동에 이르렀을 때 옆에서 발을 거는 녀석이 있었다. 강우는 잽싸게 발을 피했다.

“젠장! 안 넘어지네?”

이런 장난을 거는 녀석은 고현성뿐이다.

강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타박했다.

“영양제는 먹었어?”

“갑자기 영양제는 왜?”

“철 좀 들라고.”

“싱거운 놈!”

몇 걸음 앞서 걷던 고현성이 그를 홱 돌아봤다.

“흐흐, 이번에는 내가 이겼더라?”

“뭘?”

“지난 기말고사! 내가 너보다 총점에서 앞섰어.”

수학과 물리만 잘한 강우는 전 과목을 고르게 친 고현성에게 뒤졌다. 총점 전교 석차에서 고현성은 윤수아에게 3등 뒤진 17등이었다. 차도도가 알려준 바에 따르면 강우는 48등이었다.

강우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흐흐, 꼬리 내렸냐? 넌 20등 안에 이름도 없던데…… 그래서 몇 등 했냐?”

귀찮게 고현성이 계속 물고 늘어졌다.

강우는 시선을 돌려 무시하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고현성이 바로 따라붙으며 계속 찝쩍댔다.

“어이, 브라더! 그래서 몇 등인지 알려줘야지? 졌다고 대답도 안 해 주냐?”

갑자기 걸음을 확 멈춘 강우가 상대를 노려봤다.

“너, 밥 언제 살래?”

“무슨 밥?”

“내기에서 졌으면 밥을 사야지.”

강우의 호통에 고현성이 딴청을 피웠다.

“내가 더 잘했는데 무슨 밥?”

“이 녀석이!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면 안 되지. 내기를 잘 생각해 봐. 너랑 나랑 내기했는지, 너희 조랑 우리 조랑 내기했는지.”

“헙!”

상황을 깨달은 고현성이 재빨리 입을 닫았다.

“이 자식이! 입 닦으려고?”

잠시 머리를 굴리던 고현성이 미심쩍은 듯 반박했다.

“우리 조가 졌다고 어떻게 확신해?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아.”

“생각해 봐. 기말에서 차희가 1등 했지? 상철이는 차희보다 못했지? 수아가 14등, 근데 넌 수아보다 못했지? 나랑 대우는 중간보다 조금 아래인데 영제가 대우보다 조금 더 잘하긴 했지만 이 셋 합산하면 만회 안 되고. 동섭이는 저 뒤에 바닥이잖아? 대보나 마나지.”

고현성도 강우가 언급한 대로 계산해보니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밥 사라!”

“으흑, 아, 알았어.”

기말고사가 끝나고 성적이 발표되자마자 방학을 하는 바람에 2학기까지 결산이 밀려버렸다.

“내가 차희랑 이야기해서 날짜 통보할 테니까 그때 와서 돈 내.”

“크흑!”

오늘 저녁에 또 떡볶이를 먹어야 할 듯했다.

* * *

첫 수업은 물리. 담임인 차도도가 들어왔다.

차도도는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공지사항을 먼저 알렸다.

“이번 달 가장 중요한 행사는? 경! 시! 경시대회는 총 6개 부문으로 실시하고 모든 학생은 하나씩만 출전할 수 있어요.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은 한 반드시 하나는 꼭 출전해야 해요.”

강우는 처음 듣는 행사였다.

“요즘 사교육 때문에 경시대회 없어지지 않았어?”

별수 없이 강우는 옆자리에 앉은 손차희에게 물었다.

“아니, 경시 다 살아있어. 외부 경시대회 성적은 학생부에 기록할 수 없고. 교내 경시는 상관없어.”

결론적으로 학생부에 쓸 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학교에서는 경시대회를 개최한다는 뜻이다. 학생당 한 부문만 출전하는 원칙도 가능한 많은 학생이 상을 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학교에서 하라니 경시대회에 나가야 한다.

“강우야, 넌 어느 부문 나갈 건데? 수학? 물리?”

강우가 수학과 물리 양쪽으로 두각을 드러내다 보니 모두가 강우의 행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정작 강우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뭐 뭐 있는데? 6개가 뭐야?”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정보.”

손차희의 대답과 동시에 윤수아가 끼어들었다.

“난 정보!”

컴퓨터를 끼고 살아온 윤수아라면 정보 경시가 딱 적합하다.

“난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차희 넌?”

“난 물리 아니면 화학인데…….”

손차희가 말을 멈추고 강우의 반응을 살폈다.

그 의미를 강우도 바로 눈치챘다. 그가 물리로 나가면 화학을 선택하겠다는 뜻이다.

“난 물리!”

최대우는 볼 것 없이 물리를 선택했다. 물리에서 다른 과목에 비해 월등히 두각을 나타내는 최대우이기에 당연한 선택이다.

그때 차도도가 계속해서 말했다.

“경시대회는 학년 구분이 없어요. 그래서 2학년들과 수준을 겨루어볼 수 있는 대회이기도 해요. 여러분들이 입학할 때 천재가 많다고 기대가 컸는데 과연 그런지 이번 경시에서 판별나겠죠? 모두 신중히 출전 부문을 선택하고 열심히 노력해주길 바랄게요.”

어? 강우는 1학년과 2학년이 함께 치른다는 말에 살짝 흥분했다.

일반 고등학교라면 경시는 3학년에게 상을 몰아주는 행사이지만 고려 과학고에서는 3학년은 수능 준비를 이유로 경시대회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 덕에 대대로 1학년과 2학년의 대결이 펼쳐졌다.

그 순간 강우의 머리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권유성이다. 내기에서 이겼는데도 그놈의 태도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과제연구, 그것도 조원들이 모여서 행하는 과제연구를 순순하게 두 사람의 대결로 치기엔 강우의 입장에서도 석연치 않은 일이긴 했다.

‘이번에는 정말 박살 내야지.’

강우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윤수아에게 물었다.

“수아야, 유성이는 무슨 부문으로 출전하지?”

“작년에는…… 수학이었어. 그때 수학에서 4등 했었는데 지금 2학년 가운데는 박일현 선배 다음으로 두 번째였어. 올해는…… 알 수 없지.”

윤수아가 권유성의 실적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2학년 중에 수학을 가장 잘하는 두 녀석이 바로 박일현과 권유성이란 뜻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지난 한국 올림피아드에서 최종 시험을 통과하고 국가대표 선발 대상에 들어갔다.

그들과 직접 실력을 겨뤄볼 기회를 놓칠 순 없다. 게다가 이 기회에 권유성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럼 나도 수학으로 정할까?”

강우의 도전에 윤수아가 피식 웃었다.

“유성이가 피하면 어떡하고?”

“피할 녀석이 아니지. 오히려 내가 물리를 택하면 물리로 붙자고 달려들 녀석인데.”

“그런가…….”

권유성의 자존심과 승부욕을 모르는 윤수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작 손차희는 강우와 권유성의 대결을 볼 수 있다고 흥분했다.

“나도 빠질 수는 없으니까…… 어쨌든 나도 수학으로 할래.”

그렇게 모두의 경시대회 출전 분야가 잠정적으로 정해졌다.

* * *

수업이 끝나고 떡볶이 먹으러 갈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 차도도가 강우를 호출했다.

장소는 상담실이 아닌 교무실이었다. 상담실이면 신새벽에게 들볶일 위험이 커져 걱정인데 그나마 교무실이라 다행이었다.

신새벽이 있는지 눈치를 보면서 들어가자 차도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우 왔어? 날 따라오렴.”

“설마…… 상담실 가는 건가요?”

“아니. 다른 곳에. 상담실이 싫은 모양이구나?”

“한두 번 망가졌어야 말이죠.”

상담실만 아니면 어디든 못 갈까. 강우는 자신 있게 차도도를 따라갔다.

어째 가는 곳이 요상했다. 평소에는 B동을 벗어날 일이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A동으로 이동하고 있다.

갑자기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어디 가는데요?”

“따라오면 알아.”

“설마…….”

차도도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어휴, 안 잡아먹으니까 그냥 좀 따라오지?”

강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닫았다. 계속 대꾸하다가는 한 대 맞을 분위기다.

계단을 올라가고 복도를 지나 마침내 도착한 장소에 강우는 입을 쩍 벌렸다.

마침내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지난 기말고사 때 마주친 이후로 계속 찝찝함을 감출 수 없었는데 지금 외통수로 딱 걸렸다.

“여, 여긴 왜요?”

“교장 선생님께서 너를 좀 보자고 하시거든.”

그의 눈에 교장실이라고 적힌 팻말이 보였다. 강우는 내심 푸념하면서 간신히 당황한 가슴을 달랬다. 뭐, 죽이기야 할까.

지나치게 긴장한 표정이 눈에 띄었는지 차도도가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렸다.

“긴장 풀어. 우리 교장 선생님, 그리 무서운 분 아니거든.”

물론 겉으로 보기에도 인자한 분이란 건 안다. 하지만 잘못한 일이 있을 때는 다르겠지. 특히 시험 시간에 잠을 퍼 자는 불량학생이라면?

차도도가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교장실이라고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단지 혼자 쓴다는 것뿐. 사무실 안쪽에 큼지막한 책상이 있고 책상 위에 명패가 보인다.

교장 백두섭. 예전에 보았던 그 인자한 남자가 그들을 맞이했다.

강우는 가슴을 졸이면서 조심스럽게 차도도 옆에 섰다. 여차하면 차도도를 방패로 삼겠다고 생각하니 한결 기분이 편해졌다.

“자네가 강우 군인가?”

목소리에는 호의도 적의도 깔려있지 않았다.

“예. 1학년 3반 강우입니다.”

강우는 깍듯한 자세로 인사했다.

“앉지.”

차도도와 함께 접대용 소파에 앉자 백두섭이 맞은편에 앉으며 음료 캔을 놓았다.

“그때 봤었지? 수학 시험 칠 때. 찍고 자는 줄 알았는데 다 풀고 자는 거였더군. 성적도 잘 나왔다고 들었는데…….”

“그날은 교장 선생님인 줄도 몰랐습니다.”

“어? 나를 모르나? 가끔 조회시간에 보잖아?”

“맨날 자는 바람에…….”

옆에 앉은 차도도가 한심한 표정으로 그에게 눈을 흘겼다.

강우는 음료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거두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내가 강우 군을 부른 이유는 두 가지일세. 첫째는…… 주임 선생님께서 강우 군이 수학 올림피아드 경시대회 추천서가 필요하다고 하더군.”

수학여행 때 부탁했던 일을 김윤택이 추진하나 보다. 예상보다 김윤택이 빨리 조치해줬다.

“사실 바로 허락해도 상관없긴 한데…… 이런 일에는 항상 구설수가 붙어서 말이야. 예를 들어 자네에게 추천서를 써준 후 다른 학생이 또 부탁하면 거절하기 힘들어지거든. 모든 일은 서로 형평성이 맞아야 하니까. 그렇다고 추천서를 남발할 수도 없고.”

“중간고사, 기말고사에서 모두 만점 받은 것만으로는 어려울까요?”

옆에서 차도도가 지원했다.

백두섭이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어렵진 않네. 다만 내신을 위한 교내 시험과 올림피아드를 위한 경시 시험은 성격이 다르다는 정도는 나도 알아. 그래서 수학부장 선생님 의견을 들어봤는데…….”

백두섭이 강우를 쳐다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교내 수학 경시에서 탁월한 성적을 거두면 추천서를 써주자는 의견이 나왔네.”

수학부장 선생님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강우는 살짝 안면을 찡그렸다. 가능성이 열렸다는 점은 다행이어도 그 조건이 만만치 않았다.

“알다시피 경시는 학년 구분이 없네. 현재 2학년에는 IMO 출전 자격자가 모두 3명이야. 강우 군의 경시 점수가 그 학생들에게 필적한다면 충분히 추천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네.”

강우는 이런 조건이 붙은 이유가 지난 기말고사 성적 때문임을 눈치챘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성적이 널뛰기했고 시험에 임하는 강우의 태도가 불성실하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잖아도 경시대회에서 권유성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려고 생각했었다. 유의미한 성적은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백두섭이 손을 저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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