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추천서와 R&E (2)
백두섭은 물을 삼킨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자네와 관련된 품의를 올리셨더군. R&E 관련해서 말이야.”
지난 수학여행 때 담임과 논의했던 사항이라 강우는 무슨 일인지 바로 눈치챘다.
“알다시피 우리 학교에서는 1학년에게 R&E를 허용하지 않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학생을 보호하자는 목적이 가장 크지. 1학년은 전문적인 연구에 뛰어들 역량이 부족한 데다 처음부터 내신이 아닌 외부 연구과제에 집중하다 보면…… 과거에 내신 성적이 망가져서 곤란한 경우가 자주 있었거든. 그래서 R&E는 2학년부터 허용하기로 되어 있는데.”
“하지만 이번 사안은 저희 쪽에서 추진한 R&E가 아니고 카이스트에서 요청해온 겁니다. 게다가 프로젝트 수행 연구비도 있고요. 이런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차도도가 열심히 반박했다.
강우는 조심스럽게 두 사람의 분위기를 살폈다. 교장 선생님이 특별한 거부 의사를 보이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허락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나도 아네. 강우 군에게 굉장히 좋은 기회란 것을. 그리고 강우 군의 집안 형편에도 큰 보탬이 되리라 생각해. 다만, 이 일도 쉽게 결정할 수 없어. 왜냐하면, 학교에도 규정이 있는데 멋대로 어기기 시작하면 규정이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교장 선생님의 뜻을 이해하지만 강우는 조금 짜증이 났다.
과거에 손강우 시절에도 핵융합 연구를 추진하자 이런저런 간섭을 무수히 받았다. 특히 핵융합은 군사 무기와 연관되다 보니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사실상 거의 없었다. 모든 연구를 허가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 허가 이면에는 항상 마도환의 검은 마수가 작동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차도도가 강우 대신에 질문했다.
“내 생각에는 그 고속전철 프로젝트가 물리학 분야이니까 물리 경시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면 R&E를 허락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네. 이를테면 강우 군은 1학년이지만 2학년에 필적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어 허용해준다는 명분을 챙길 수 있으니까. 어떤가?”
답답한 행정이지만 딱히 불리하진 않았다. 물리 경시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이라면 최소한 상을 받을 성적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물리라면 최우수상도 가능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우는 곧바로 자신감을 드러냈다.
순간 백두섭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리 쉽지 않아. 알다시피 자네 앞에는 수학과 물리라는 두 과제가 놓였네. 이번 교내 경시대회에서 두 분야에서 출중한 성적을 거둬야 해. 그런데 여기에 또 문제가 있어. 알다시피 여러 사람이 수상할 수 있도록 1인당 1분야만 출전할 수 있거든. 즉 자네는 수학과 물리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네.”
그제야 강우는 지금 이 자리가 만들어진 이유를 알게 됐다. 둘 중 하나만 출전할 수 있다면 올림피아드 추천서와 연구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의 계획이 비틀리는 순간이었다.
강우는 표정을 굳힌 채 입을 다물었다.
차도도 또한 난감한 표정으로 백두섭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교장 선생님, 이건 학생의 재능을, 또 앞날을 꺾을 수도 있는 중요한 사안입니다. 그렇게 규정에만 얽매이시면…….”
“차 선생, 나도 아네. 하지만 그렇게 쉽지 않아. 요즘 학부모들이 극성이잖나? 항의나 청탁 전화가 수없이 걸려온다네. 지인의 연구 프로젝트에 이름을 넣겠다고 승인해달라는 요청도 있고. 그런 요청은 부담이 없는 1학년에게 더 집중되거든.”
“그래도…….”
“이 세상에는 규정을 교묘하게 악용해서 또는 위반해서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이 많아. 그래서 규정을 강화하는 거고. 그래서 모호한 피해자가 생기지만 어쩔 수 없다네. 나도 허락하고 싶네만 당장은 어쩔 수 없지. 방법을 생각해보자고.”
“사이언스 페스타 성적으로는 안 될까요?”
“분야가 다르지 않나? 게다가 그 과제연구는 김선호 선생 담당이지.”
완곡한 거절에 강우도 기분이 싸늘하게 식었다.
미심쩍은 의심이 든다. 손강우 시절 곳곳에서 마도환의 마수가 작동하더니 지금은…… 김윤택이 손을 쓴 것이 분명하다. 카이스트와의 R&E를 막겠다는 심보가 느껴진다.
교내 경시대회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다만 마땅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 강우 군을 부른 이유는 이런 현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야. 해결 방법은 조만간 머리를 짜내보기로 하세.”
“알겠습니다.”
차도도가 먼저 일어나면서 강우에게 눈짓을 줬다. 강우도 따라서 일어났다.
“강우 군? 너무 실망하지 말게. 이 음료수도 가져가고.”
강우는 음료 캔을 쥐고 교장실을 나왔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방법이 있을 거야.”
차도도가 열심히 위로했으나 강우의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역시 이 사회는 복잡하다. 열심히 연구만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과거에 연구비 부족으로 헤매던 시절이 떠올랐다. 당연하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다르지 않다.
그저 위치만 달라졌을 뿐.
* * *
고곽천재와 전상철네 조가 떡볶이집에서 모였다.
기말고사 성적에서 뒤처진 전상철네 조가 밥값을 내기로 했다.
“우린 강우만 제치면 이길 줄 알았는데…….”
고현성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하소연했다.
전상철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런데 차희가 기말고사에서 날아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나도 있다고!”
윤수아가 곧바로 옆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저번 기말고사에서 손차희뿐 아니라 윤수아도 중간고사에 비하면 성적이 올랐다.
“우리는 중간고사랑 별로 차이가 없었는데…….”
고현성의 푸념에 강우가 덧붙였다.
“많이 떨어진 나도 있지.”
1등에서 추락했으니 어쩌면 강우가 가장 많이 추락했을 것이다.
“어흑, 얘들아, 미안해.”
전상철네 조에서 가장 성적이 떨어지는 오동섭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누구도 오동섭이 시험을 잘 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기에 변수는 아니었다.
‘공부를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란다.’
강우는 내심 위로를 던졌다.
내기에서 진 탓에 씩씩대는 고현성과 달리 전상철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상철의 이런 표정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다. 그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서 모두 비슷한 성적을 거뒀다. 중간고사에서 망하고 기말에서 잘한 손차희나 그 반대인 강우와 달랐다. 덕분에 두 성적을 합산한 것으로 반에서 1등을 했다.
전교 석차에서도 같은 양상이 나타났다. 1학기 종합 전교 1등은 이민찬이나, 손차희, 강우가 아닌 주영식이었다.
“어이, 브라더! 씨스더! 2학기는 달라! 반드시 밥을 얻어먹고야 만다!”
고현성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이 녀석의 시선이 강우가 아닌 손차희에게 가 있었다. 게다가 분하다는 표정이 아니라 흐뭇하다는 표정이다. 자신의 돈으로 손차희에게 밥을 사주니까 아깝지 않다는 뜻인가?
강우는 내심 실소를 머금으면서도 녀석의 말을 받아줬다.
“좋아, 2학기 중간고사에서도 한 판 더 붙지.”
녀석은 내기에서 이기든 지든 행복할 것이다. 손차희와 한 차례 더 밥을 먹을 수 있으니까.
그 특유의 건들거리는 스타일만 좀 바꾼다면 손차희에게 호감을 얻을지도 모르는데. 아직 애는 애였다.
그렇게 먹고 떠들고 있던 중 손차희가 말을 꺼냈다.
“아참, 담임이 날 잡으라고 하셨어.”
“무슨 날?”
“내가 기말고사 잘 치면 집들이한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오래된 일이지만 강우는 가까스로 기억해냈다.
그때 손차희가 이민찬을 이긴다면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했다. 그의 일이 아니어서 잊고 있었는데 손차희는 훌륭히 성과를 얻어냈다.
“너 혼자 가는 거 아니었어?”
“혼자 무슨 재미야? 고곽천재 전부 불러도 된다고 했어.”
“그럼 우리는?”
고현성이 급히 옆에서 끼어들었다.
“너희를 왜 불러? 너희 조는 상관없어.”
냉정하게 답한 손차희가 휴대폰에서 일정표를 넘기며 물었다.
“언제가 좋아?”
“말 나온 김에 단번에 해. 늦추면 경시에 부담되잖아?”
“그럼…… 이번 주 토? 일?”
“토요일.”
늦게까지 놀려면 토요일이 낫다.
강우의 주장에 손차희가 담임께 확인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 * *
토요일.
점심을 먹고 강우는 최대우와 기숙사를 나섰다.
다행히 차도도가 바로 수락했기에 오늘은 차도도 집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금요일 밤에 집으로 돌아간 손차희와 윤수아는 곧장 차도도의 집으로 온다고 했다. 그 바람에 기숙사에서 출발하는 사람은 그들 둘뿐이었다.
“길 알아?”
“길? 잘 알지.”
최대우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이 돌아왔다. 울릉도에서 서울에 온 지 이제 반년인데 서울 지리를 잘 알 리가 있나? 주말에 기숙사를 벗어난 적도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인데?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째려보고 있자니 최대우가 휴대폰을 열었다.
“문명의 혜택이 있으면 써야지.”
이 녀석이 얼리 어답터였던가? 강우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빛을 풀지 않았다.
“집 주소가?”
강우는 헐레벌떡 손차희가 보낸 톡을 열었다.
“서울시 강남구…….”
“서울 한복판이네. 지하철 타면 몇 정거장이냐…… 30분 안 걸려.”
최대우가 지하철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손강우 시절의 경험이 있으니 이 녀석보다 길을 더 잘 찾을 것 같지만……. 어쨌든 강우는 녀석을 따라갔다.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 역에서 내려 5분가량 걸으니 어마어마한 빌딩 집단이 눈앞에 보였다.
쳐다보려니 고개가 아프고 옆을 휙휙 둘러보니 주눅이 든다. 동네가…… 평범하지 않다.
“강우야, 저기 차희랑 있네.”
입구에 손차희와 윤수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윤수아의 손에는 할인마트에서 산 듯 큼지막한 사각 휴지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잘 찾아왔네?”
윤수아가 놀리듯 두 사람에게 인사했고 최대우는 자기 덕분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근데 이거 뭐냐?”
최대우가 사각 휴지를 가리키자 손차희가 눈썹을 살짝 치켜뜨며 대답했다.
“남의 집에 처음 가면 당연히 선물을 사 가야지. 너희는 선물 샀어?”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두 사람은 서로 눈치만 봤다. 그런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 쓴 두 여학생이 놀라웠다. 하긴 기숙사에서 바로 왔으니 선물을 살 방법도 마땅찮았지만.
“어휴, 기본이 안 됐네. 기본이.”
손차희가 혀를 찼다.
물론 강우는 그런 일에 무관심했다. 그보다 그는 눈앞의 건물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맞게 찾아온 거야?”
“주소로 보면 이 아파트 맞는데?”
“으음, 선생님 차가 모닝인데…… 어떻게 여기에서 살지?”
잘 모르는 강우의 눈에도 이곳은 범상찮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부촌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이 아파트 단지에 외제 차라면 몰라도 소형차 모닝이 주차되어 있으리라고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물론 차가 개인의 부를 대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선생님이 부자겠지.”
일전에 교사 이 년 차 월급으로는 소형차 사기도 만만찮다던 차도도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집이 부잔가? 그럼 오늘 쌤 외에 다른 가족도 있는 거야?”
“나도 몰라.”
손차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들 중 누구도 담임 선생님의 집안 사정까지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