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98화 (98/325)

제98화 추천서와 R&E (3)

아파트 입구에서 경비원의 도움을 받아 호출했다.

- 왔어?

반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네.”

- 올라오렴.

번쩍번쩍 금칠해놓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 버튼을 누르려고 보니 가장 꼭대기 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부착된 LCD 모니터에서 바깥 풍경을 높이에 맞춰 보여준다. 발상이 기발하다.

“이 아파트 비싼 것 같은데? 게다가 꼭대기 층?”

“응, 펜트하우스. 상관없잖아?”

역시 부촌에 사는 손차희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한 듯 전혀 긴장감이 없었다.

강우는 몇 차례 고민하다가 마지못해 물어봤다.

“차희야, 너희 집도 잘 살아?”

“강남에서 아파트 살면 잘 산다고 오해하긴 하는데…… 남들은 잘산다고 하더라.”

손차희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난 이런 집은 조금 답답할 것 같아. 탁 트인 바다만 보다가 이렇게 갇혀 살면…….”

최대우의 말도 이해가 되긴 했다. 울릉도에서 살던 이 녀석은 이렇게 높은 아파트가 처음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이 기회에 손차희네 집이 부자란 것을 알았다. 물론 예전부터 짐작했지만. 거기에다 차도도도 만만찮다는 것까지.

윤수아의 표정을 보니 그녀 또한 그리 긴장하지 않고 있었다. 그에 반해 그와 최대우는 안절부절못하니 서울에 처음 올라온 시골 소년 같았다.

고속 엘리베이터라 금방 끝까지 올라왔다.

눈앞에 호수가 적힌 커다란 현관문이 보였다.

“들어와!”

차도도가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발목까지 오는 편안한 긴 치마에 앞치마를 두른, 학교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차림새였다.

집안으로 들어서던 강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와우!”

차도도의 집은 놀라웠다. 일단 전망이 끝내줬다. 큼지막한 통창 밖으로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풍경이 확 들어왔다. 최대우의 표정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쌤, 다른 분들은 계세요?”

“여기 나 혼자 살아.”

무슨 집이 운동장이냐! 소형 국민차를 몰고 다니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반전인데? 강우는 집안을 소개하는 차도도를 따라 이곳저곳 구경했다.

깔끔한 내부 인테리어에 포인트로 유리 재질로 된 장식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벽에 걸린 장식과 가구들이 차도도의 이미지와 묘하게 어울렸다.

꼭대기 층인 펜트하우스는 복층이었다. 아래층은 거실과 주방, 위층은 침실과 서재로 구성했다.

다른 친구들의 눈에는 그냥 멋진 집으로 보였겠지만 정신연령이 높은 강우에게는 이 집의 가격이 먼저 떠올랐다. 본인 명의인지 아니면 전세나 월세인지 모르지만 이런 집에서 살려면 그녀의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물어보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으나 참았다. 어린 학생이 관심을 두기엔 너무 세속적인 질문이다.

“자, 편하게 티비 보고 있어. 난 하던 요리마저 하고.”

강우와 최대도는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해서 벽에 걸린 커다란 티비를 감상했다.

손차희와 윤수아는 요리가 재밌는 듯 곧바로 차도도에게 달라붙었다.

차도도가 요리라? 어쩐지 앞치마를 걸치고 있더라니. 오늘 차도도의 새로운 면모를 봤다. 얼핏 보면 손에 물도 안 묻힐 것 같은데 놀러 온 학생들을 위해 손수 요리까지하다니.

“음료 마시렴.”

차도도가 그들에게 주스를 가져다줬다.

잠시 후 요리를 끝낸 윤수아가 그들을 불렀다.

“강우야! 대우야! 밥 먹자!”

어중간한 때라 밥은 아니고 말 그대로 요리를 먹었다. 정성을 다해 이것저것 신경 쓴 티가 났다. 얼핏 보면 중국 요리와 닮았는데 맛은 어떨지.

“으윽!”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을 누가 했던가. 한입 입에 넣는 순간 강우는 이 요리가 사람이 먹는 음식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렇게 이상해?”

차도도가 미안한 표정으로 그들의 눈치를 봤다.

“그, 그게…….”

“쌤이 요리에 익숙지 않아서…… 간을 잘 못 맞춰.”

“간도 문제지만 덜 익은 것 같은데요?”

“으악! 그, 그럼 더 데울까?”

“요리는 얼마나 해봤어요?”

“너희 온다길래 오늘 처음 해봤는데…… 역시 안 하는 게 나았겠지?”

풀이 죽은 차도도를 보니 과연 답이 없다. 꼼꼼한 선생님이 이렇게 허당일 때도 있다니.

자꾸 눈치를 보기에 강우는 환한 미소로 답했다.

“그래도 먹을 만해요.”

“그, 그렇지?”

그제야 차도도의 얼굴에도 다시 밝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들을 위해 애를 써서 음식을 장만했으니 그 마음만이라고 곱게 받기는 개뿔…….

차린 요리를 이것저것 맛보던 차도도가 우울한 목소리를 냈다.

“평소처럼 중국집 짜장면이 차라리 나았는데 괜히 욕심을 부려서……. 먹기 힘들면 그만 먹어도 돼.”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우는 몇 젓가락 뜨다가 포기했다. 그만 그런 게 아니라 손차희를 비롯한 모두가 비슷한 반응이었다.

* * *

“강우야, 그래서 내 생각에는…….”

둘러앉아서 과일과 음료를 마시며 차도도가 먼저 말을 꺼냈다. 교장실에서 있었던 논란의 후속편이다.

교장 선생님의 제안을 들은 친구들이 분개했다.

“그냥 허락해주면 되는 거 아냐?”

“나쁜 일도 아니고…… 아니면 경시 두 과목을 동시에 칠 수 있게 해준다거나.”

“강우라면 수학, 물리 둘 다 입상할걸?”

강우는 응원해주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이런 면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이, 마치 교장실에 당장 쳐들어갈 기세였다.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아.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특혜를 베푸는 거니까.”

차도도가 그들을 달랬다.

그들은 머리를 맞댄 채 고민에 빠졌다.

수학 올림피아드 1차 통과 추천서와 외부 R&E 참여. 어느 것이 더 중요할지 강우는 선택이 어려웠다. 둘 다 할 수 있으면 좋지만 사실 모두 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기회는 또 오는 법이니까.

“교장 선생님께 답변드려야 할까요?”

“그래야겠지? 다음 주까지 교내 경시 신청서를 넣어야 하니까 곧 결정해야 해. 내가 월요일에 다시 찾아가서 말씀드려보겠지만 그래도 안 된다면 하나를 골라야지. 내 생각엔 R&E를 제안하신 한 교수님에게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내년에 재추진하자고 제안하는 게 어떨까 싶어.”

추천서를 포기하면 1년을 기다려야 하지만 연구 프로젝트는 6개월이다. 차도도의 제안이 합리적이긴 하다.

하지만 강우는 연구 프로젝트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연구 프로젝트는 겉보기만큼 그리 단순하지 않다.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를 내년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올해 시작되는 프로젝트여서 내년에 끼어들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내년부터는 핵융합 연구에 매진해야 한다. 그의 핵심 프로젝트에 지장을 주어서는 곤란했다.

게다가 이 프로젝트에는 연구비가 달려있다. 현재 강우의 처지는 연구비를 무시할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또 이 프로젝트에는 친구들과의 문제도 달려 있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고곽천재 모두의 연구실적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거기에 차도도까지 엮어서.

이런 원대한 계획을 교장 선생님의 반대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니.

“김윤택 선생님께 부탁한 게 잘못이었나…….”

그가 이 사태를 유도했을 게 뻔했다.

그의 중얼거림을 들었을까. 손차희가 바로 응원했다.

“강우야, 우리 때문에 프로젝트를 사수할 필요는 없어. 우리 조 과제연구는 다른 걸 해도 되니까.”

“내가 너희 도움을 받고 싶어서 그래.”

강우는 미소로 대답했다.

“결정했니?”

차도도의 허탈한 물음에 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리로 경시대회를 나가야 할까 봐요.”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수학은 포기하고. 넌 재주가 많아서 문제야. 아예 하나만 잘하면 고민할 필요도 없잖아?”

차도도가 핀잔 아닌 핀잔을 쏟아냈다.

물리를 선택한다는 뜻은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의미다. 자연스럽게 수학 올림피아드는 일 년 후로 미루어졌다.

분위기가 축 처지자 차도도가 샴페인을 들고 왔다.

“자, 그럼 이번 학기 과제연구는 함께 카이스트랑 R&E를 추진하기로 하자!”

손차희를 비롯한 모두가 눈을 반짝였다. 강우 덕분에 그들 모두에게 좋은 기회가 돌아갔다.

“우리 샴페인 마시자!”

“쌤, 우리 미성년자인데요? 술 마셔도 돼요?”

손차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도도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호기롭게 말했다.

“선생님과 함께라면 괜찮아. 부모님 앞에서 술도 배우는데 뭘. 그런데 이 샴페인은…….”

차도도가 붉은빛의 샴페인 병을 그들에게 쓱 내밀었다.

“무알콜이다!”

“에이, 그게 뭐예요?”

술을 마신다고 좋아하던 학생들이 실망의 푸념을 쏟아냈다.

강우는 와인잔을 채우는 무알콜 샴페인을 바라보면서 감회에 사로잡혔다.

술을 마신 지 얼마나 됐을까. 물론 손강우 시절에도 그다지 애주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끔 술로 현실의 고달픔을 달랬다. 연구비 부족에 교수 임용이 되지 않아 힘들었던 그 시절에는 술만이 유일한 친구였다.

그때의 기억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강우로 빙의한 이후 술이라고는 입에 댈 기회가 전혀 없었다. 아무리 술이 고파도 고등학생 신분으로는 마실 수가 없었으니까.

와인잔에 고인 붉은 액체를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겨 있자니 차도도가 피식 웃었다.

“어쭈, 강우 제법 술꾼티가 난다? 술 마신 적 있지? 어디 선생님한테 다 털어 놔봐.”

“에이 쌤, 제가 무슨 술을…… 이래 봬도 저는 착한 학생이라니까요. 착한 걸 빼면 제 캐릭터가 형성되지 않아요.”

친구들의 동의를 구하던 강우는 바로 입을 닫았다. 모두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샴페인 한잔에 과일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무알콜이라도 쓴맛이 약간 살아있었다. 술이 그리워졌다. 그냥 교장 선생님 서명 하나면 바로 끝날 일 아닌가?

차도도가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냥 추측일 뿐이지만…… 어쩌면 김윤택 선생님의 의견일지도 몰라. 김 선생님이 다음 학기 과제연구를 강우랑 하고 싶어 했으니까.”

무리한 추측이긴 하지만 강우는 일리가 있다고 보았다.

아마 교장 선생님도 학년 부장인 김윤택에게 조언을 구했을 것이다. 추천서를 언급했던 당사자이고, 물리 부장 선생님이니 프로젝트를 연결하는 게 좋을지 물어봤을 것이다.

김윤택은 이번 학기 과제연구에서 강우를 놓치면 내년에도 기약이 없으니 중간에 방해 공작을 했겠지. 차도도를 견제할 필요도 있고. 자신의 영향력을 위해서 적어도 물리에서만큼은 차도도가 독단적으로 대학과 R&E를 추진하는 건 막고 싶었겠지.

강우는 입맛을 다시며 단호하게 말했다.

“추천서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보겠습니다. 규정에는 한국 수학 올림피아드 위원회 추천서라고 되어 있으니까…… 수학회 이사진 한 사람을 만나 어떻게든 천재성을 인정받으면…….”

“너 또 사고 치려는구나?”

“에이 쌤! 사고는 무슨.”

카이스트 한태규와 인연이 닿은 것은 우연이었지만 강우에게는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한국대 수학 교수를 만나 물고 늘어지면 어떻게든 추천서를 받아낼 자신이 있었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이 김윤택의 의도라면 그 의도에 놀아날 생각이 없었다.

염려하는 차도도에게 미소를 보내며 강우는 샴페인 잔을 들었다.

창밖에 어둠이 내리고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보는 서울의 야경은 환상 그 자체였다.

강우는 홀린 듯 그 야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