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99화 (99/325)

제99화 추천서와 R&E (4)

적당히 배달 음식으로 저녁을 때우고 나니 헤어질 시간이 됐다.

“자, 이제 돌아가렴.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집에서 푹 쉬어.”

어느 정도 자리가 정리되자 차도도가 말했다.

손차희와 윤수아는 순순히 소지품을 챙기고 갈 준비를 하는 반면 강우와 최대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희는 왜 안 일어나?”

“하아! 집이 없어요.”

최대우가 나라 잃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기숙사 있잖아?”

“오늘 외박한다고 써냈는데요?”

대충 오늘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눈물을 글썽이는 최대우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강우의 능청에 차도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들이 미리 작당하지 않았다면 공교롭게도 둘 다 외박 신청을 했을 리가 없다.

그 속이 훤히 보였지만 차마 쫓아내지는 못하겠다.

“그래서?”

“재워주시면 안 될까요?”

정작 대답하는 최대우를 무시하고 차도도는 강우를 노려봤다. 여전히 강우는 창밖을 힐끔거리며 딴청이다. 저 녀석 속에는 능구렁이가 들었나.

“흐음, 너희는 미모의 처녀 선생님 집에서 자고 가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선생님이잖아요!”

강우가 똑 부러지는 반박을 날렸다.

선생님이니 안 될 건 없지만……. 차도도가 눈에 힘을 주며 째려보았을 때 이어진 강우의 말이 매를 불렀다.

“근데…… 미모 맞아요?”

“야! 너 이리와!”

차도도가 주먹을 쥐고 강우에게 뛰어갔다. 강우는 후다닥 도망쳤다. 집이 넓어서 그녀는 강우를 도무지 잡을 수 없다.

“차희랑 수아는 어떡할래?”

“저희는 가 봐야 해요. 내일 할 일이 많거든요.”

“그래, 그래 너희는 어른스럽네. 저 녀석들은 어린애야, 어린애.”

손차희와 윤수아를 보내고 나니 실내가 한결 조용해졌다.

차도도는 거실 바닥에 앉아서 통창을 통해 도를 닦는 듯 야경을 유심히 관망하는 두 남학생을 발견했다.

펑퍼짐한 녀석과 호리호리한 녀석.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왠지 조화를 이루어 웃음을 자아내는 두 학생이었다.

차도도도 그들 옆에 쪼그려 앉았다.

“뭐하니?”

“여기에서는 별이 어떻게 보일까 연구하고 있어요.”

최대우는 어디에서나 별에 일편단심이다.

“여기도 서울인데 잘 보일 리가 없지.”

“하아! 그래도 높으니까 조금은 다를까 살펴보고 있어요.”

차도도도 최대우를 따라 하늘을 살폈다.

하늘 높이 밝은 별이 하나 보였다.

“저 별은 뭐니?”

“저건 목성요. 별이 아니고 행성이에요.”

목성이라……. 당연히 차도도는 모르는 내용이다. 그녀는 천문학에 조예가 깊지 않으니까. 그 특유의 노란 별빛이 기분을 차분하게 만든다.

그렇게 한참 동안 차도도도 별에 빠져들었다.

문득 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쌤, 쌤은 어떡하다가 물리를 하시게 되었어요?”

차도도는 시선을 돌려 강우를 바라봤다. 까만 강우의 눈동자가 진지한 빛을 띠고 있다.

그녀는 과거를 회상했다. 그녀를 물리에 빠지게 한 사건, 선생님으로 발을 들이게 했던 사건이 떠올랐다. 바로 사이언스 페스타에서 어떤 강연을 들었을 때다. 강우가 이번에 강연했던 그 내용을 들었을 때.

“글쎄…….”

차마 그때 그 강연을 듣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강연이 강우의 강연과 주제가 똑같다는 것도. 그래서 평범한 답을 해주었다.

“과학을 좋아했거든.”

“집에서 과학을 반대하지 않았어요?”

“반대라…….”

차도도는 조금은 허탈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당연히 반대가 극심했다. 그녀의 집은 상당히 부유했다. 손에 꼽히는 재벌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열 번째쯤 되는 그룹을 소유한 집안이었다. 일반 대중의 관심을 살짝 벗어난 위치에 있는 그룹. 그래서였는지 주변에 그녀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고등학교 때 그녀의 부모는 적당히 유학 가서 경영학을 전공한 후 돌아오라고 했다. 그녀에게는 오빠가 있기에 가업을 이을 일은 없지만, 그래도 부모된 마음으로 그녀가 그룹에 입사해서 한 축을 담당해주기를 원했었다.

처음에는 그녀도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과학 강연을 들은 후 목표를 바꿨다. 과학을 하고 싶었고 그것도 물리학을 전공하고 싶었다.

‘그때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과로 진학했고 목표대학을 한국대 물리교육과로 잡았다. 그때 강연했던 남자처럼 학생들에게 과학의 꿈을 심어주고 싶어서였다. 유학을 가지 않는 바람에 부모와 엄청 신경전을 벌였다.

학부를 졸업하면서 마지막 선택의 기회가 왔다. 교사가 될까, 아니면 대학원으로 진학해서 물리학자로 나갈까. 학부 진학 때 포기했던 외국 유학도 하나의 길이었다.

정작 그녀의 부모는 이번에도 생각이 달랐다. 적당한 혼처가 있으니 시집을 가라고, 공부할 필요 없다고. 정말 공부하고 싶다면 외국에서 경영학 석사를 밟으라고 했다.

그녀는 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와 다시 싸워야 했다.

‘……힘들고 갈등 많던 시절이었지.’

의견이 맞지 않아 이런저런 다툼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진학의 꿈을 버렸다. 물리를 더 파고 싶었으나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부모에게서 떨어져 나와 독립하면서 과학고 교사에 지원했다.

지금은 교사로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녀의 부모도 학교 선생님이란 직업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는 정도였다. 결혼시키기에 적절한 직업이니까. 덕분에 그녀는 집을 한 채 얻어 독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연을 강우에게 전부 털어놓을 수는 없다.

“반대가 있긴 했어. 그래서 계속 공부하기 어려웠어.”

차도도는 제자들에게 그대로 말할 수 없는 사연이라 적당히 축약했다.

“더 공부하실 생각은 있으셨고요?”

“나도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긴 했지만…….”

만일 교사의 길이 아닌, 국내든 외국이든 물리학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면 집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녀의 부모는 딸의 인생에서는 완고한 편이었다. 좋은 혼처를 받아 시집을 가서 그룹의 한 축을 맡아주면 최고라고 생각하는 분들이었다.

“선생님이 되어보니 나쁘지 않았어.”

나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꽤 좋았다. 머리가 반짝반짝하는, 천재성을 띠는 학생을 가르치면 다이아몬드의 원석을 가공해서 찬란한 보석을 만들어내는 기분이 든다.

작년에는 학생들을 과학의 길로 이끌어서 이 나라를 빛낼 미래의 과학도를 길러낸다는 자부심으로 수업에 임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학생들 하나하나의 미래를 보고 싶은 기분이다.

특히 손차희나 최대우 같은 학생들이 가끔 드러내는 천재성이 그녀의 가슴을 뛰게 한다. 그 정점에는 강우가 존재했다.

차도도는 시선을 돌려 강우를 훔쳐봤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강우의 시선은 저 멀리 창밖에 떠 있는 밝은 별에 닿아있다.

‘강우에게는 빛이 나.’

이유는 모르지만, 강우를 보면 가슴이 뛰었다. 예상치 못했던 그의 천재성은 그녀를 기쁘게 했다.

페스타 강연장에서 강우를 보았을 때 오래전 기억에 남은, 그녀의 인생을 바꾼 그 사람이 겹쳐졌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그녀는 강우를 더 세심히 살피게 됐다.

강우만은 잘 키워보겠다고. 키운다는 말이 어불성설임을 그녀도 알았다. 알면 알수록 강우는 이미 완성된 물리학자였으니까. 강우라면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리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그녀 본인이 그런 학자가 되지 못한다는 점은 아쉽지만, 제자가 그렇게 자라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최근 들어 그녀는 자신이 점점 강우에게 집착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에 추천서와 R&E 문제가 발생하면서 확실히 알게 됐다. 어떤 방법을 쓰던 강우가 그 둘을 모두 하게 해 주고 싶다고.

“강우야, 미안해.”

“네?”

“물리와 수학 둘 다 응시하게 해줬어야 했는데.”

“에이, 뭘요.”

“나, 사실은…….”

입을 열던 차도도는 강우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뭔데요?”

“그날…… 마지막 날 바닷가에서…….”

차도도는 그때를 추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날 사실 내가 바닷가로 나간 이유는…….”

“저희를 찾으러 오셨던 거예요?”

“아니, 너희가 나갔는지도 몰랐어. 난 그때 마도환 교수가 잠시 만나자고 해서…… 리조트를 나오다가 너희를 봤어.”

그때 차도도는 강우와 마도환을 어떻게든 연결해주고 싶었다. 한국대 교수와 엮어주면 강우는 더 찬란하게 피어날 테니까.

밤에 호텔로 부른 마도환의 속셈을 짐작 못 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적당한 선에서 대처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었다. 낮에 식사를 거절한 미안함도 있어서 밤에 해변을 걸으며 술 한잔 정도 같이 하려 했었는데…… 그러면서 R&E를 부탁하려 했었는데…… 가는 길에 강우를 만나면서 바로 포기했었다.

어깨를 움찔하는 강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잘하셨어요.”

“그래도 몰라. 만일 마도환 교수가 R&E를 요청했다면 김윤택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허락했을 거니까.”

그랬다면 추천서와 R&E 두 마리 토끼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차도도는 한편으로는 후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강우의 다소 차가워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선생님께서 굳이 다리를 놓지 않으셔도 됩니다.”

“난 그냥…… 네가 잘되기를 바라니까…….”

강우가 바로 말을 잘랐다.

“쌤, 쌤은 물리학을 계속할 생각 없으세요?”

“지금도 물리를 가르치잖아?”

“그것 말고 직접 공부하고 연구하는 거요.”

“난 너희를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해. 한때는 스스로 연구하고 싶었지만…….”

차도도는 약간은 남았던 아쉬움을 털어냈다.

그녀도 한때는 천재라는 말을 들었었다. 지금의 강우만큼은 아닐지라도 동료 사이에선 돋보이는 인재였다. 고등학교 때는 당연히 천재 소리를 들었고 대학 진학해서도 같은 과 학생 사이에서 손꼽혔었다. 그랬으니 졸업 무렵에 물리학과 석사과정을 밟을까 고민했던 것이기도 했다.

이제는 그런 마음이 희미해져 버렸다.

“그래도 기회가 온다면…….”

“글쎄, 이젠 기회가 없겠지. 내가 선생을 그만두고 연구에 뛰어들 일이 있을까? 난 너희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차도도는 진심으로 말했다. 이제는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을 가슴에 묻을 때가 됐다. 교육에 발을 디딘 그녀가 아닌, 그녀보다 어린 학생들을 위해 과학 탐구의 길을 열어주고 싶었다.

아픈 가슴을 추스르며 그녀는 강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우의 눈동자가 다시 별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 연구는 너희들 몫이야.’

감정을 삭이고 있자니 차도도의 휴대폰이 울렸다.

“애들이 도착했나?”

휴대폰에 생각지도 않은 이름이 떠 있었다. 그녀는 마음을 잡은 후 전화를 연결했다.

“교수님?”

- 주말인데 전화 괜찮으십니까?

교수란 그녀의 말에 강우의 시선이 확 돌아왔다. 약간은 적의까지 담긴 눈빛이다.

당황한 차도도는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 R&E 말입니다. 1학년이라 학교 승인이 나기 어렵다고…….

“그럭저럭 해결했어요. 대신에 다른 것을 포기해야 했지만요.”

“마도환?”

강우가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휴대폰에 귀를 기울였다.

강우의 태도에 차도도는 적잖게 당황했다. 강우가 마도환을 싫어하나? 그녀는 마음을 추스르며 손과 고개를 동시에 저었다. 전화기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 무엇을 포기했는지 모르지만 제가 미안해서요. 저에게 다른 좋은 방법이 있는데 어떠십니까?

“뭔데요?”

- 프로젝트 계약을 강우 학생이 아닌 차도도 선생님과 맺으면 어떨까요?

전화를 건 사람은 마도환이 아닌 한태규 카이스트 교수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