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00화 (100/325)

제100화 추천서와 R&E (5)

강우는 차도도 옆에서 조용히 사태의 추이를 지켜봤다.

방금 차도도의 말에 그는 화가 났다. 그날 밤 해변에서 즐거웠던 시간의 이면에 그런 일이 있었다니. 야밤에 차도도와 마도환이 단둘이서 만나는 상황 자체가 싫었던 그였다. 그런데 하필 만나려고 했던 이유가 자신 때문이었다니.

다행스럽게도 차도도가 알아서 포기했다지만 강우는 그녀가 그런 고민을 했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걸려온 전화가 그에게 불을 붙였다.

강우는 차도도의 전화기를 뺏어 바로 끊으려 했다. 다행히 상대가 마도환이 아니라 한태규라는 걸 듣자마자 강우는 얌전한 학생으로 되돌아갔다.

전화를 끊은 차도도가 상기된 표정으로 설명했다.

“한 교수님이 새로운 방안을 제시하셨어.”

애초 계획은 강우를 포함한 고곽천재 네 명에게 프로젝트 연구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국책 연구로 받은 고속전철 프로젝트를 일부 수행하는 조건이다.

그런데 고려 과학고에서 1학년은 R&E를 할 수 없다고 해서 문제가 생겼다.

한태규는 이를 다른 방법으로 풀었다. 프로젝트를 고곽천재가 아닌 지도교사 차도도와 체결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공식 문서상에는 차도도가 외부 연구기관과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이 된다.

고교 교사가 국책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없지도 않다. 학교장 승인만 나면 제약이 없고 학교 측에서도 학교의 명예를 높일 수 있어 권장하는 편이다.

차도도는 이렇게 받은 연구비를 과제연구를 통해 강우를 비롯한 고곽천재에게 비용으로 넘기면 된다. 이것은 엄연히 교사와 학생 간의 과제연구로 R&E가 아니다. 학교에서 특혜를 받았다고 구설에 오를 일도 없다.

“그냥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건데요?”

“나도 알아. 하지만 행정 측면에서는 완전히 달라. 위반 사항이 없으니까.”

물론 엄밀한 차이점은 있다. 훗날 고속전철 연구 보고서에 수행자로 차도도의 이름이 남는다. 강우의 이름은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관련 논문을 발표할 때 논문 저자 표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이는 강우에게 전혀 상관없는 문제다. 오히려 그는 차도도의 이름이 남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전 찬성입니다.”

“흐음, 이게 더 깔끔하지?”

차도도도 마음에 드는 눈치다.

“대우야, 넌…….”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강우는 한숨을 내뱉었다. 여전히 최대우는 밖을 바라보며 별을 세고 있었다.

“대우야 뭐하니?”

“몇 등급의 별까지 보이는지 관측하고 있었어.”

시골에서는 6등급 별까지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도심에서는, 서울 같은 대도시에는 2, 3등급 별이 한계다.

못 말릴 녀석이라며 강우는 포기하고 다시 차도도에게 집중했다. 차도도의 얼굴에 어린 미소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쌤, 쌤도 좋으신 거죠?”

“뭐가? 당연히 일이 잘 풀리면 나도 좋지. 이제 네가 수학 경시에 나가면…… 추천서도 받고 고속전철 연구도 수행할 수 있고…… 다 잘된 거잖아?”

“그거 말고…….”

“그럼 뭐?”

“물리 연구를 하게 된 거요. 프로젝트를 받으면 선생님은 엄연히 연구자거든요. 이제 가르치는 걸 떠나서 같이 연구하는 거잖아요?”

쑥스러운 듯 시선을 돌리며 생각에 잠긴 차도도의 얼굴에 미약한 홍조가 깃들었다.

강우는 차도도의 내심을 이해했다.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 예전에 대학을 졸업하면서 접어두었던 연구의 열정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조금 전 차도도의 인생을 들으면서 새삼 그녀도 천재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그녀의 잠재력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가 등급을 볼 수 있는 대상은 오직 비슷한 또래의 학생뿐이다.

예상치 않은 과정으로 그녀를 물리 연구에 끌어들이게 됐다.

“자, 일이 잘 풀렸으니까…… 우리 자축할래?”

들뜬 차도도가 주방 한쪽에 놓인 와인장을 열었다.

이 집에 들어선 이후부터 강우가 탐내던 보물창고였다. 그가 미성년자만 아니었다면 바로 저 창고부터 털었을 것이다.

“우와! 저도 마실 수 있는 거예요?”

“네버!”

“언제는 선생님이 주면 마실 수 있다고…….”

“안돼. 너희는 무알콜 샴페인만이야. 나쁜 선생님이 되고 싶진 않아.”

차도도가 탐스러운 붉은 빛이 감도는 와인을 땄다.

세 사람은 소파 탁자 주변에 둘러앉았다.

커다란 와인잔을 채운 와인과 샴페인이 유사한 붉은빛을 뽐냈다.

“쌤, 술 잘 마시세요?”

“아니, 술이라면 쥐약이야.”

“그런데 왜?”

“오늘은 축하할 만한 날이잖아?”

차도도가 와인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한 모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절로 손이 와인병으로 가는 강우였지만 차도도의 만류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는 맛있던 무알콜 샴페인인데 물처럼 밍밍하게만 느껴졌다.

아! 술 고프다.

“와인이 맛있네. 자, 강우야 짠!”

강우는 샴페인이 든 잔을 부딪쳤다.

차도도의 마음이 이해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많이 고민했을 텐데 의외로 깔끔하게 해결될 것으로 보였으니까. 거기에다 졸업하며 포기했던 연구를 다시 수행할 수 있다니.

어쩌면 그녀의 내면에서는 학문을 향한 욕심이 사그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서 불을 지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작 최대우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그저 주는 대로 샴페인을 받아마시고 있었다.

* * *

“하아!”

강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도도에게 허당끼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허당일 줄은 몰랐다.

불과 와인 두 잔을 마신 차도도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소파에 쓰러지더니 인사불성이다. 술이 약하다는 말을 했지만 이건 약해도 너무 약했다. 이런 주제에 마도환과 술을 마시겠다고 했었다니!

다시 분노가 슬금슬금 일었다.

탁자에는 그녀가 마시던 와인이 반쯤 남은 채 놓여 있고 한쪽에는 와인잔이 뒹굴고 있었다. 다행히 빈 잔이라 와인을 쏟지는 않았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이 집에서 자고 갈 계획이긴 했는데 이런 상황을 예상하진 못했다.

와인이 눈앞에 있으니 한잔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지금까지 참았는데 술에 손댈 수는 없다.

“무알콜 샴페인으로 흉내만…….”

강우는 자신의 잔에 남은 샴페인을 마셨다.

그런데 이 자식은 어디 갔지? 생각해보니 갑자기 최대우 녀석이 사라졌다.

최대우가 통창 앞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대우야, 뭐해?”

“별 봐.”

에라이, 미친놈. 그렇게 본다고 보이나?

강우는 거실의 전등을 모두 껐다. 갑자기 창밖의 야경이 눈으로 확 들어왔다.

“이야! 훨씬 잘 보여. 진작 끌걸…….”

최대우가 하늘을 보면서 다시 별 수를 세고 있다.

녀석을 내버려 두고 강우는 소파에 널브러진 차도도를 살폈다.

상황을 보니 그녀가 깨어나기는 틀린 듯했다. 아무리 제자라도 그렇지 남자 앞에서 이렇게 정신이 없어도 되나?

그녀를 편히 자도록 옮겨야 할 것 같긴 한데…….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우는 방법을 바꿨다. 그녀의 방에서 가벼운 이불을 가져와서 그녀의 위에 덮어줬다.

다른 이불을 추가로 가져와서 거실에 잠자리를 만들었다.

“대우야,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잘 거야.”

“어. 응?”

놀란 최대우가 고개를 돌려 그와 차도도를 살폈다. 녀석이 피식 웃으며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는 거실 바닥에 누워 소파에서 잠든 그녀를 올려다봤다.

감은 속눈썹이 하얀 얼굴에 인상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잠이 든 그녀가 편안해 보였다.

‘눈을 감은 모습이 예쁘네…….’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로 향하는 손 때문에 강우는 움찔했다. 차도도는 그의 선생님이자 동료이고 친구이자 막강한 후원자였다. 그녀가 있기에 외롭지 않고 그녀 덕분에 목표를 향해 순항할 수 있다.

자기 일처럼 염려해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괜히 그녀가 쓸데없이 일을 벌이는 때도 있지만 어쨌든 그를 위해서였으니까.

내일부터는 모든 일이 제자리를 잡을 것이다.

* * *

아침 식사를 마치고 B동으로 향하던 강우는 앞에서 걸어가는 두 남녀와 마주쳤다.

“그래서 강우가 물리 경시에 나가게 됐어.”

“아, 아깝다! 내가 코를 팍 눌러줄 수 있었는데.”

“누르긴 뭘 눌러? 안 지면 다행이지.”

“무조건 내가 이기거든! 난 진검승부에선 안 져.”

두 녀석이 그를 반찬 삼아 열심히 주접을 떨고 있었다. 윤수아와 권유성이다.

강우는 뒤에서 확 달려들며 두 사람의 어깨를 콱 잡았다.

“안 지긴 뭘 안 져?”

“어? 강우야!”

“물리로 도망친 녀석이 제 발로 찾아왔네?”

환하게 웃는 윤수아와 달리 권유성은 잔뜩 찌푸린 얼굴이다.

“도망치다니?”

“물리 친다며? 내가 수학 친다니까 슬쩍 바꿨잖아?”

권유성의 표정에서 강우는 진심을 읽었다. 비꼬는 말투지만 겨뤄보지 못해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이다.

권유성이 2학년이기에 둘이 같은 시험으로 겨룰 순간은 교내라면 이번 경시대회가 마지막이다. 내년에는 권유성이 3학년이어서 경시에 참여하지 않는다.

“뭘 슬쩍 바꿔?”

“이야기 다 들었어. 내가 압승을 거둘 수 있었는데 아깝다.”

생각해보니 윤수아는 그 뒷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날 밤에 한태규의 권유로 그가 굳이 물리 경시에 응시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아쉽냐?”

“당연하지.”

“수학으로 갈아탈까?”

“그러면 좋지만…… 참아. 물리가 네게 더 낫다며?”

“꼬리를 내리는군.”

권유성 이 녀석은 어떻게 된 게 아직도 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긴 이 녀석 성깔에 후배라고 놀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꼬리를 왜 내려? 난 자신 있다고!”

이제 진실을 밝힐 때가 됐다.

“좋아, 네가 진검승부를 원한다면…… 수학을 선택하기로 하지.”

“강우야?”

윤수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응?”

“고곽천재 버리는 거야?”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그가 물리 경시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이를 토대로 카이스트와 프로젝트를 해야 한다. 이 연구 프로젝트에 고곽천재 모두가 참여할 예정이니까 윤수아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럴 리가. 난 항상 너희와 함께하지.”

프로젝트보다 그에게는 고곽천재가 더 중요하다. 졸업 후에는 어떨지 몰라도 이 학교에 있는 이상 고곽천재는 그와 함께할 동료였다.

“방금 수학한다고…….”

“차도도 선생님이 해결하셨어. 내 선택과 상관없이 우리는 카이스트 프로젝트에 참여할 거야.”

비록 R&E가 아닌 과제연구이지만 명칭을 제외하면 마찬가지니까 상관없었다. 연구비와 인건비도 똑같이 받을 거였으니까. 앞으로 고곽천재는 프로젝트 수행으로 용돈벌이하며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강우는 권유성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선전포고를 날렸다.

“그래서 나는 네 녀석 잡으려고 수학 경시에 참여할 거다. 기대해도 좋아.”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만 깜박이던 권유성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붙자고! 이번에는 안 져!”

지난 과제연구에서 졌던 일이 가슴에 맺힌 모양이다. 저렇게 의욕을 불태우는 녀석이라면 앞으로가 기대됐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 B동에 들어섰을 때였다.

“강우? 나 좀 볼까?”

처음 보는 녀석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샤프하고 마른 인상에 두툼한 안경까지.

강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상대를 쳐다봤다.

만난 적은 없지만 본 기억은 있다. 동아리 신청 때였었나? 그때 수학연구반의 스타로 군림하던 녀석이다. 2학년이고 이름이…… 박일현이라고 했었지?

그가 상대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녀석의 머리 위에서 찬란한 S자가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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