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교내 경시 (1)
본 기억이 난다.
동아리 신입회원 모집에서 수학연구반에 앉아있던 사람이다. 그때 수학연구반 고학년생들은 박일현을 현 고려 과학고 최고의 수학 천재라고 했었다. 무려 국제 올림피아드의 은메달리스트라고 했던가.
그때는 대충 그렇구나 하고 넘겼었지만 올림피아드 체계를 이해한 지금은 안다. 은메달리스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박일현이 은메달을 딴 시기는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그 말은 중학교 3학년 때 고등부 KMO를 쳐서 1차를 통과했고 여름학교, 겨울학교를 거쳐 1학년 여름에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는 뜻이다.
사실상 중학교 때 고등부 대표가 된 셈이니 그 천재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박일현, 수학 S, 물리 A, 화학 C, 생물 C, 지구과학 C.
강우는 박일현의 머리 위에 찬란히 빛나는 수학 S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가 뚫어져라 쳐다보자 기분이 나빴을까. 박일현이 가볍게 기침했다.
“크음, 네가 강우니?”
“네, 그런데요?”
“잠시 이야기 좀 할까?”
위 학년 선배가 그를 부른 경우가 없었기에 강우는 적잖게 당황했다.
옆에서 장난치던 권유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형! 강우도 수학 엄청 잘해요!”
“나도 소문 들었다.”
다행히 박일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려 강우는 안심했다.
버릇없다고 고자질하거나 아니면 험담을 할 줄 알았는데 권유성이 오히려 칭찬해서 의외였다. 역시 성격이 유별나서 문제지 내면이 나쁜 녀석은 아니다.
“무슨 일이세요?”
“특별한 일은 아니고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서. 수학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모두 만점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거든.”
“아, 예.”
그의 놀라운 성적이 다른 학년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물론 과학고 내신 시험이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수학을 어디에서 배웠지?”
난데없는 박일현의 질문에 강우는 살짝 안면을 찌푸렸다.
“독학했는데요?”
“으응?”
의외였던 듯 박일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음, 혼자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데?”
“수학이 딱히 배운다고 되는 과목도 아니죠.”
강우의 능청스러운 반박에 박일현이 크게 웃었다.
“하하, 그렇긴 해. 일반 학생은 아무리 배워도 어렵지.”
수학이기에 이런 호언장담이 가능하다. 수학 천재들이 쉽게 이해하는 문제를 범재들은 머리를 싸매고 반복 학습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독학으로 만점이라…… 천재라도 쉬운 일이 아니지. 대부분 학원에 다니는데…….”
엄밀히 말하면 강우도 독학은 아니다. 수학 대부분을 손강우 시절에 배웠으니까. 다만 지금 강우가 이렇게 자신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천재성이 단지 손강우가 과거에 학습했던 내용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통해 확실하게 천재성을 테스트해봤다. 그의 이해력과 응용력은 엄청나게 향상되어 명확하게 천재라고 자부할 수준이 됐다. 지금은 모르는 내용도 기초적인 부분을 공부하면 손쉽게 그 이상을 이해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 봐야 교과서 범위잖아요.”
강우의 소탈한 변명에 박일현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렇지. 아무리 문제를 어렵게 내어도 교과서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고 비튼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 흠, 그래서 말인데…… 지금 잠시 네 실력을 테스트해봐도 될까?”
“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호의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웠으나 마다할 강우는 아니었다. 그도 박일현의 S가 궁금했으니까.
“무슨 테스트요?”
“일단 따라와 봐.”
박일현이 그를 데리고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옆에서 권유성이 낄낄대며 겁을 줬다.
“강우야! 너 이제 큰일 났어. 이 형이 국제 수학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야!”
“어? 은메달리스트 아니고?”
“아, 내가 올여름 IMO에서 금메달을 땄어.”
박일현이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국가대표 상비군에 들어갔고 1학년 때 은메달, 2학년 때 금메달을 땄다.
천재라는 권유성이 1학년 때 1차 시험을 통과하고 2학년 때 상비군에 들어갔으나 정작 국가대표로 출전하지 못했으니 두 사람의 격차는 상당했다.
강우는 권유성의 수학 잠재력이 A, 박일현의 수학 잠재력이 S였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했다.
‘과연 S는 다르긴 다르구나.’
그가 생각에 잠기자 권유성이 재차 추임새를 넣었다.
“고곽 3대 천재라고 들어봤지? 고곽 출신으로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IMO에서 금메달을 3연패 한 사람이 딱 한 명 있었어. 그 선배가 최고 천재지. 그다음이 은메달 1개 금메달 2개. 아마 이 형도 졸업할 때 그 반열에 오를 거야.”
올해 입학 시점에서 선생님들은 지금 1학년이 더 우수하다고 자평했었다. 2학년에 무려 박일현 같은 천재가 있는데 그렇게 평가하다니? 그 이유를 강우는 눈치챘다.
박일현의 잠재력을 보면 수학을 제외한 과학 과목은 영 엉망이다. 즉, 박일현은 천재일지라도 학교 교육에 적합하지 않다. 학교에서 좋아하는 그런 우등생이 아니다.
수학만 잘하고 다른 과목이 별로라면 김윤택이 높게 평가할 리가 없었다. 덩달아 그를 제외하고 뚜렷한 성과가 없는 2학년 전체의 평가까지 박하게 내려졌으리라.
박일현을 따라 들어간 장소는 수학연구반 동아리 방이었다.
학생들은 자율적으로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었다. 앞에서 칠판에 수식을 잔뜩 쓰고 설명하는 학생 한 사람과 지켜보는 다른 학생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함께 고민하고 있었다.
난데없는 불청객이 된 기분이라 강우가 주춤하는 사이 1학년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박일현을 향해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곳에서는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 대접받는다.
“강우 왔네?”
손차희였다. 강우는 천체관측반이지만 손차희는 수학연구반이다.
특이하게도 권유성은 천체관측반인데도 수학연구반 학생들과 두루두루 친했다. 세미나 중인데도 신경 쓰지 않고 몇몇과 장난치듯 대화했다.
부근에서 쑥덕임이 들려왔다. 예상외로 강우는 이 수학연구반에서도 유명인사였다.
“누구야?”
“1학년의 그 수학 괴물.”
“아, 만점 받았다던?”
“멀끔하게 잘 생겼네.”
“그래 봐야 경시 문제는 못 풀지. 내신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걸.”
“곧 울면서 여길 나가겠지.”
갑자기 관심이 쏠리는 게 확 느껴졌다. 역대로 수학을 잘하는 학생은 항상 수학연구반 소속이었는데 난데없이 수학연구반이 아닌 학생이 등장했다. 그렇기에 대부분은 적대감을, 일부는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다.
강우가 박일현을 따라 한쪽 구석으로 옮겨갈 때 세미나를 진행하던 녀석이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1학년 강우?”
강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상대를 쳐다보자 녀석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혹시 이 문제 알아?”
“누구시죠?”
“나? 2학년이고 수학연구반의 학술부장이야. 마침 점화식 형태의 수열 일반항을 정리하고 있는데 말이야…… 이게 말도 안 되게 복잡해야지.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어?”
점화식은 다양하고 복잡해서 유형별로 정리하기 쉽지 않다. 교과서에서는 두세 종류만 배우고 많은 유형을 다루지 않는다. 실제로는 자주 나오는 유형만 십여 가지가 넘는다.
2학년인 녀석의 무례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나 그렇다고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녀석의 얼굴에 그를 테스트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화이트보드에 적힌 문제의 난이도는 교과과정을 살짝 벗어난 수준이다.
방금 학술부장은 피보나치 수열의 일반항을 설명하고 있었다. 피보나치 수열은 13세기 초 이탈리아의 수학자 피보나치가 소개한, 자연계에서 흔히 발견되는 대단히 유명한 수열이다.
강우는 칠판에 적힌 수식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수학을 저런 식으로 암기 형태로 접근하면 곤란하다. 과학고, 그것도 수학에 관심 있는 학생이라면 보다 근본적으로 문제를 파헤쳐야 한다.
강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박일현을 찾았다.
박일현은 한쪽 옆에서 관망하고 있었다. 지금 이 사태가 박일현의 술수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불확실했다. 어쨌든 수학연구반이 도발해 왔으니 순순히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이곳의 분위기가 자신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그의 전투력을 일깨웠다.
강우는 빙그레 웃으며 칠판 앞으로 걸어갔다.
“점화식 유형을 종류별로 나누어 일반항을 외우는 방식은 지금 당장 시험 칠 때나 효과가 있죠. 피보나치 수열은 그렇게 일반항을 구하는 게 아니고요…….”
마카를 받은 강우는 단숨에 수식을 전개했다.
“점화식을 푸는 핵심은 주어진 식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열로 어떻게 변환할 것인가 하는 점이죠. 피보나치 수열의 일반항은 19세기 초 프랑스 수학자의 이름을 따서 비네의 공식이라 명명되어있는데 이것은…….”
“어? 거기서 왜 그렇게 풀리죠?”
듣고 있던 한 학생이 질문했다.
설명이 부족했다고 느낀 강우는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학생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문제를 이해할 수 없어 짜증이 난 모습이었다면 이제는 난제를 풀어 고개를 끄덕이는 즐거운 모습이다.
강우의 강의 실력이 수학이라고 달라지진 않는다. 순식간에 이해한 학생들이 함성을 터트렸다.
“와아! 귀에 쏙쏙 들어와. 지금까지 왜 저렇게 구하는지 모르고 막연하게 외우기만 했었는데…… 완전 다르네.”
학생들의 칭찬이 길어질수록 학술부장의 얼굴은 점점 썩어들어갔다. 누가 봐도 설명에서 강우의 압승이었다.
설명을 마친 강우는 웃는 낯으로 마카를 학술부장에게 넘겼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학술부장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카를 받았다.
순식간에 적을 제압한 강우는 보란 듯 의기양양하게 박일현에게 다가갔다.
박일현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강의 잘한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과연 명불허전이군.”
동아리 방 한쪽에 놓인 캐비닛에서 박일현은 시험지를 꺼내어 눈앞에 펼쳤다.
“……이거 올해 내가 IMO를 대비하면서 풀었던 예상 문제지인데…… 꽤 어려워. 우리 학교 경시 문제 수준도 이만큼은 안 돼. 풀어볼래?”
강우는 문제를 받았다. 단 3문제였고 대수, 기하, 정수 세 분야다. 대수를 제외하고는 내신과 거리가 있다.
“수학연구반에서는 이런 문제로 경시를 준비하나요?”
“그건 아냐, 이렇게 어려운 문제는 풀기 쉽지 않거든. 이건 올림피아드 최종시험 준비용이지.”
강우는 그를 주시하는 학생들의 시선을 느꼈다. 모두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이다.
“네가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면 수학 천재가 확실해. 이번 교내 경시에서도 대단한 성적을 거두겠지.”
박일현이 완곡하게 그를 부추겼다.
그 말은 못 풀면 수학 천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슬슬 자존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시간은요?”
“무제한.”
사실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수학에서는 모르는 문제라면 아무리 시간을 많이 준다고 해도 풀지 못한다.
“한번 해보죠.”
강우는 미소를 머금고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권유성이 옆자리에 앉았다.
“나도 같이 풀게요.”
호승심이 강한 권유성도 이 대결 분위기를 피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와 겨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시험지를 받은 강우는 주위를 둘러보며 여유로운 웃음을 선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녀석들이 찔끔 놀라 시선을 돌렸다. 손차희가 그를 향해 나지막이 파이팅을 외치며 응원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강우는 문제를 확인하며 연필을 잡았다.
강우와 권유성, 두 학생이 수학 문제에 도전했다. 맞은 편에는 박일현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다른 학생들은 방해하지 않으려고 멀찌감치 물러나서 둘을 주시했다.
실내에는 연필 소리만이 사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