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교내 경시 (2)
만일 이런 유형의 문제를 오늘 처음 만났다면 강우는 풀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기하나 정수론은 고교 과정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 분야다. 하지만 그에게는 짧지만 국내 수학 올림피아드 1차 시험을 대비한 적이 있었다. 그때 고곽천재와 함께 이런 유형을 경험했다. 물론 이 문제에 비하면 무척 쉬웠지만.
그렇기에 문제지를 받아들고 고민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문제를 노려보며 풀이 방법을 고민하자 문제가 의미하는 핵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예상처럼 막막하지 않았다. 그의 천재성은 머릿속에 든 수학 법칙과 원리에서 그 해답을 열심히 찾았고 어렵지 않게 길을 열었다.
가진 기억에 수학적 사고, 이해력, 응용력이 총동원된 결과였다.
‘풀린다!’
당사자인 그도 놀랄 만큼 특이한 경험이었다. 강우는 빠른 속도로 문제를 풀어나갔다.
그리고 약 한 시간 후, 그는 연필을 놓았다.
“응?”
박일현의 놀란 신음과 함께 주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기했나 보네.”
“한 시간 만에 풀 문제가 아닌데…….”
“학교 내신 문제 수준이 아니니까.”
“우리 중에도 일현 선배 외에는 푼 사람이 없지 않았어?”
강우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견해는 비슷했다. 한 시간 내에는 절대 풀 수 없으니 포기한 거라고. 사실 수학연구반도 아닌 강우가 푼다면 수학연구반의 수치라고 여기는 학생도 많았다.
강우가 연필을 놓았을 때 권유성이 버럭 소리쳤다.
“강우? 포기냐? 나처럼 끈질기게 붙어봐. 수학은 끈기가 있어야 하거든. 조금 안 풀린다고 연필 던지면 어떡해?”
권유성은 이제 절반을 풀었다. 정확하게는 첫 번째 문제에 매달리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다음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현재 국가대표 다음가는 상비군이니 강우보다 우위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연필을 놓은 강우를 마음껏 비웃었다.
정작 강우는 권유성에게 눈웃음을 날린 후 답지를 박일현에게 내밀었다.
“채점 부탁드립니다.”
얼떨떨한 심정으로 박일현이 답지를 받았다. 모두의 시선이 강우의 답지에 쏠렸다.
답지를 들여다보는 박일현의 안색이 점점 심각해졌다. 동시에 학생들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이, 이게…… 강우? 벌써 기하와 정수론을 공부했다고?”
“KMO 1차 때문에 조금 하기는 했었죠?”
“1차?”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박일현이 고개를 저었다.
“형? 어떻게 됐어요?”
권유성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박일현이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대답했다.
“다 맞췄어.”
“예?”
그 답변은 마치 폭탄처럼 실내를 휘감았다. 수학연구반 내에서도 이 문제를 제대로 푼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박일현조차도 처음 이 문제를 만났을 때 갈피를 잡지 못했었다.
그런 문제를 강우가 손쉽게 풀어버렸다. 이것은 사실상 수학연구반의 패배였다.
박일현이 마지막 문제를 짚으면서 물었다.
“이 문제 말이야…….”
“아! 이거 페르마수 문제잖아요, 페르마는 모든 n에서 페르마수가 소수라고 주장했지만, 오일러가 아님을 증명했었죠. 이를 변형하면 변이 n개인 정다각형의 작도 문제가 되고…….”
“그, 그렇긴 한데…… 너 이거 어떻게 알았어?”
당연히 강우는 평소의 변명을 끄집어냈다.
“수학사에서 유명한 문제잖아요? 사실 페르마란 수학자가 우리의 피를 끓게 하니까…… 누구나 주목하는 부분도 있고요.”
하다못해 전국에 페르마란 이름을 붙인 수학 학원만 해도 엄청나게 많았다.
묘하게 핵심을 피해 가는 강우의 말주변에 박일현의 안면이 살짝 굳었다. 지금까지 한 수 아래로 봤던 강우가 예상외로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너도 대단하구나. 과연 수학에 관심도 많고 잘하네. 이번 경시에서 다크호스로 등장하겠어.”
강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겠죠? 좋은 승부가 될 것 같습니다.”
강우의 선전포고였다. 경시대회는 학년 구분이 없기에 그는 권유성뿐만 아니라 박일현과도 경쟁해야 한다. 수학에서는 1학년 최고이며 따라올 자가 없다고 평가받는 강우였기에 이번 경시대회는 목표한 추천서 외에 그를 향한 학생들의 평가를 바꾸게 될 것이다.
침묵을 뒤로하고 강우는 당당하게 동아리방을 나왔다.
입구에 수학연구반이란 팻말이 보였다.
“오라고 하니까 따라가긴 했지만. 어쩌다 보니 도장 깨기를 해버렸네.”
* * *
저녁을 먹은 후 세미나실에 고곽천재가 모였다.
강우가 수학연구반을 다녀갔다는 소문은 벌써 전교생에게 퍼져 있었다.
가장 관심을 가진 사람은 윤수아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 학술부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 사실 그 학술부장 선배는 요점정리만 잘하지 제대로 설명을 못 해. 점화식 공식이라며 무려 열다섯 개를 쭉 나열하는데 그걸 누가 다 기억해?”
손차희가 수학연구반에서 있었던 일을 재미있게 설명했다.
윤수아가 바로 호응해서 손뼉 쳤고 최대우도 즐거워했다. 정작 강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근데 강우야, 넌 왜 그래? 기분 나빠?”
윤수아의 질문에 강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수학연구반에서는 항상 그런 문제만 공부해?”
애매한 듯 고민하던 손차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그렇지.”
“흐음, 난 올림피아드를 준비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 국내 올림피아드 경시에 출전하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잖아? 그래서 수준을 거기에 맞추긴 힘들어. 학교 내신을 더 잘 받아보자는 다수의 목표에 맞춰 공부하곤 하니까.”
“그런 이상한 점화식은 내신에 안 나올 텐데…….”
“며칠 전부터 이번 교내 경시를 준비하자고 자체 공부하던 중이었어.”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지 감이 온다.
처음 그가 손차희와 윤수아를 보았을 때 이들은 학원에서 준 문제집을 공부하고 있었다. 문제 수준은 교과과정 밖이었고 실제 시험에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 현상에는 학원 상술 이외에 해당 과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급히 성과를 얻으려는 학생들의 욕심도 깔려있다.
급하다 보니 단순암기식으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동일한 현상이 수학연구반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마 박일현도 이런 문제를 인지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겠지.’
이유야 어찌 되었건 수학연구반의 대부분 학생은 경시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고심하던 강우의 시선이 손차희에게로 돌아갔다.
“넌 어때? 경시 준비는?”
“지난 KMO 1차랑 비슷하지 않을까? 특별히 어렵진 않아.”
기말고사를 잘 치른 후로 손차희는 부쩍 자신감이 붙었다. 그녀는 공부하다가 막히는 수학 문제를 틈틈이 강우에게 물었다. 공부하는 태도도 안정적으로 바뀌었다. 이미 오랜 기간 경시형 문제를 풀어왔던 그녀이기에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다.
강우는 그녀가 이번 교내 경시에서 괜찮은 성적을 거두리라 예상했다.
강우의 시선이 나머지 두 사람을 향했다.
“대우는 물리로 출전하는 거지?”
“하아, 난 특별히 대비하진 않아. 블로그 질문 올라온 거 대답하는 게 전부지.”
블로그에서 워낙 다양한 문제를 다뤘기에 최대우도 자신감이 증가했다. 최근에는 강우가 답변했던 고난도 문제를 혼자서 파느라 끙끙대고 있었다.
강우도 녀석의 재능 S를 믿었다. 이제 서서히 자신의 옷을 입기 시작한 최대우는 앞으로 점점 뚜렷한 성과를 보여줄 것이다.
강우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윤수아를 향했다.
“헤헤, 난 별로 기대하지 말아줘.”
윤수아는 수학이든 물리든 특별한 재능이 없다. 대신에 그녀는 컴퓨터에 관심이 있다. 이번 경시대회에도 정보로 출전한다.
“열심히 하던데?”
“손을 놓은 지 너무 오래돼서…….”
말은 그렇게 하지만 최근 들어 윤수아의 표정이 살아있었다. 평소 교과 공부를 할 때와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것만으로도 강우는 그녀가 경시에서 나름 성적을 거두리라 확신했다.
“경시대회에 목을 맬 필요는 없어. 어차피 이건 성장하는 과정이니까. 자신의 능력을 테스트해본다는 생각으로 임하면 충분해.”
이들은 그의 소중한 동료다. 이들이 성장해야 그의 미래도 밝아진다.
* * *
학년주임 김윤택은 경시를 앞두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그는 물리 경시 문제를 만드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문제 출제를 다른 물리 선생에게 맡기고 그는 다른 일에 열중이었다.
지금 그는 수학 경시 때문에 정신이 없는 정명욱과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자판기 커피 맛에 고개를 저으며 정명욱이 물었다.
“주임 선생님께선 한가해 보이십니다? 경시 문제 안 내세요?”
“이번에는 수학 경시가 제일 큰 관심사지요, 물리는 한물갔습니다.”
“그럴 리가요?”
“1학년에서 주목받는 학생들이 모두 수학으로 몰렸더군요.”
김윤택이 물리 경시에서 관심을 접은 이유였다. 강우를 비롯하여 이민찬, 손차희, 주영식 모두 수학 경시를 선택했다. 여기에 수학 국가대표인 박일현마저 있었으니.
“대단한 학생들이 많지요.”
정명욱도 부인하지 않았다.
김윤택이 목소리를 낮추며 은근히 물었다.
“수학 출제 경향을 어떻게 두고 있습니까?”
“예년 수준으로 낼 생각입니다만?”
김윤택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우수 학생들이 몰렸으니 더 어렵게 내서 변별력을 확실하게 키워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정명욱이 찜찜한 눈초리로 상대를 쳐다봤다. 이런 식으로 타 과목 선생님이 출제하는 데까지 간섭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가 주임 선생님이니 월권은 아니라지만.
“수학 올림피아드 대표로 해마다 우리 학교에서는 적어도 둘 이상 항상 배출되었습니다. 올해도 2학년 한 명, 3학년 한 명이었죠. 지금 일학년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내년에는 박일현 군 한 명뿐일 겁니다.”
“유성이도 있잖습니까? 한끝 부족해서 상비군이지만요.”
“어쨌든 일 학년에게 자극을 주려면 어렵게 내야 합니다. 그것도 올림피아드 문제 스타일로요.”
김윤택의 거듭된 주장에 정명욱도 마지못해 수긍했다.
어차피 이 행사는 학생부 기록용이다. 문제 유형이 내신형이든 올림피아드형이든 상관없다. 다만 난이도를 높이면 소수 학생만의 잔치가 된다.
“올림피아드 국가대표에 뽑히면 학교의 명예를 높입니다. 하지만 이 성적은 학생부에 기록 못 하지 않습니까? 교내 경시 문제 유형을 올림피아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맞춰줘야 합니다. 1차 통과 후 여름학교를 수강한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정명욱이 긍정을 표하자 김윤택이 웃으며 물러났다.
“정 선생만 믿습니다.”
휴게실을 나온 김윤택은 교장실로 방향을 바꿨다.
올림피아드 유형으로 나오면 KMO 1차를 통과한 학생들이 유리하다. 이민찬이나 손차희 등이 해당한다. 하지만 강우는 아니다. 강우는 1차에서 떨어졌기에 여름학교를 수강하지 못했다.
“이제, 교장 선생님만 설득하면 끝이야. 강우 이 자식, 순순히 추천서를 써줄 수는 없지.”
정명욱에게 올림피아드 유형을 고집한 이유는 강우를 불리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는 백두섭 교장을 만나 강우가 박일현 정도의 점수를 받으면 추천서를 써주자고 설득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올림피아드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않으면 추천서는 결국 무용지물이 된다. 강우가 그런 재능을 보유하고 있다면 당연히 밀어주겠으나 그게 아니라면 불필요하다고 설득할 생각이다.
지금은 강우가 수학 경시대회에서 돋보이는 성적을 거두지 못하게 만들어서 추천서를 막는 게 최선이었다.
그가 강우를 미워하는 이유는…… 강우가 지난 과제연구 지도교사로 그를 거부한데 이어서, 이번에는 감히 그를 배제하고 차도도와 함께 R&E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물리 과제연구를 하면서 그가 아닌 다른 물리 선생님을 지도교사로 선정했다는 점이 그의 심기에 매우 거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