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교내 경시 (3)
교내경시대회는 무려 세 시간 동안 치러진다.
1, 2학년이 섞여 배치된 고사실에서 강우는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그나마 친하지 않은 같은 반 학생 둘이 전부였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서 본의 아니게 주변 학생들의 관심을 받았던 그는 오히려 이 시험이 무척 편안했다.
“감독 선생님만 잘 걸리면 대박인데…….”
수다스러운 신새벽만 아니면 누구든 상관없다.
드르륵-
강의실 문이 열리고 문제지를 든 감독 선생님이 들어왔다.
감독 선생님을 보는 순간 강우는 안면을 찌푸렸다. 김윤택이었다.
방금 누구든 상관없다고 생각한 게 무색했다.
김윤택은 수학 담당이 아니어서 별 상관없긴 하지만 그에게 비호감인 선생님이니까.
고사장에 앉은 학생들을 항해 김윤택이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경시대회는 여러분의 숨은 재능을 알아내고 대학 입시에 도움을 주고자 개최하는 겁니다. 2학년들은 작년에 경험해보았으니 잘 알겠지만 1학년들은…….”
무려 10분에 걸쳐 듣는 사람이 거의 없어질 때쯤에야 김윤택이 말을 마치고 시험지를 배부했다.
“자, 시작한다. 시험 시간은 180분이고 일찍 끝내면 나가도 좋다.”
시험을 시작하고 5분이 채 되지 않아서 답지를 제출하고 나가는 학생이 생겼다. 경시에 전혀 뜻이 없는데 마지못해 시험을 친 학생이다.
다른 학생들은 그로 인해 다소 흐트러진 고사장 분위기를 잘 극복해야만 한다.
몇 사람이 나가고 강우가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을 때 김윤택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강우 학생!”
“예?”
“교장 선생님과 잘 이야기가 됐어. 현재 우리 학교에는 수학 올림피아드 국가대표가 한 사람 있지. 2학년에 박일훈이라고. 그 학생과 동등한 실력을 보여주면 추천서를 해결하겠다고 말씀하셨네.”
“아,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강우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박일훈이라면 수학경시에서 1등을 차지하리라 예상되는 학생이었다. 그 학생과 동등한 성적이라면 이 경시에서 최우수상을 타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무려 1, 2학년을 합쳐서 1등을 하라니! 너무 가혹한 조건이다. 국가대표 추천서도 아니고 겨우 KMO 겨울학교 입학 추천서일 뿐인데도.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내막을 알 수 없으나 그 이면에 김윤택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강우는 저쪽으로 멀어지는 김윤택의 입가에 드리워진 비웃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굴복할 수는 없지.”
이 시험에서 두드러진 성적을 거둘 자신이 있다. 그의 천재성이라면 어렵지 않다.
강우는 다시 문제지를 쭉 훑었다. 국제 올림피아드에서 출제하는 분야에서 열 문제가 나왔다. 대략 한 문제당 20분가량 시간이 주어졌다. 올림피아드 문제 유형이라 절반이 증명 문제이니 시간이 빠듯했다.
그렇다고 걱정할 그가 아니었다.
강우는 거침없이 쭉쭉 풀어나갔다.
문제를 보자마자 연관된 기본 지식이 떠오른다. 머릿속에서 해당 지식이 재조합되고 자유롭게 사고력이 작동했다. 문제가 어떻게 응용되더라도 그의 눈과 머리를 비켜 갈 수 없다.
“제법인데…….”
문제 유형이 마음에 들었다. 단순히 교과과정을 벗어난 문제가 아니라 수학적 사고력을 묻는 근본적인 문제가 눈에 띄었다. 문제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 티가 났다.
“이건 정명욱 선생님이 내신 문제처럼 보이는데…….”
그는 단박에 출제자를 추측했다.
대략 한 시간이 지났을까. 같은 고사장에서 시험 치던 학생들이 모두 포기하고 답지를 제출하고 나갔다.
이제 고사장에 남은 사람은 강우가 유일했다.
의외로 수학경시에 강한 학생이 이 고사장에는 배치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강우 학생? 자네도 붙잡고 있지 말고 슬슬 내고 나가지?”
김윤택의 비웃는 표정에 강우는 짜증이 확 일었다.
이미 절반가량 풀었으니 2시간이면 다 풀 수 있다. 그렇게 되면 1시간이 남는다.
원래대로라면 빨리 제출해서 감독도 쉬게 해주려 했지만, 김윤택의 표정을 보는 순간 강우는 3시간을 다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저 인간이 편한 꼴은 절대 볼 수 없었다.
마지막 문제가 제법 어렵다. 단순한 조합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복잡한 경우의 수가 존재했다. 강우는 머릿속에서 문제의 복잡한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 헤쳤다.
“강우 학생? 어려우면 포기해!”
그가 혼란에 빠져있자니 김윤택이 다시 시비를 걸어왔다. 이젠 외부에서의 소음도 제법 들린다. 시험을 끝내고 미리 나간 학생들이 떠드는 소음이다.
그의 사고를 방해하려는 김윤택의 노골적인 태도에 강우는 가벼운 미소로 응수했다.
복잡한 문제가 한 꺼풀 벗겨졌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결국은 기본적인 몇 개의 원리가 복합된 문제일 뿐이다. 끈질기게 고민하고 사고하면 해결책이 보이기 마련이다. 인간이 낸 문제라면 그러하다.
강우는 문제의 실마리가 보이자 풀이과정을 답지에 적기 시작했다.
강우의 표정이 밝아지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하자 감독하는 김윤택의 입가에 조소가 일었다. 그가 난국에 빠졌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시험 시작 후 2시간이 지났을 때 예상대로 강우는 답지를 완성했다. 남은 시간이 많으나 더는 풀 문제가 없었다. 제출하고 나가야 정상이지만 김윤택을 보면 나가기가 싫어진다.
그는 문제를 푸는 척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김윤택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 * *
정보 문제지를 받아든 순간 윤수아는 감격했다.
컴퓨터에서 손을 놓지 못한다고 혼나던 때가 엊그제인데 지금은 관련 시험을 보고 있다.
눈앞에 놓인 컴퓨터 모니터에서 커서가 반짝인다. 그녀가 키보드로 써넣은 글자가 프로그램의 뼈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두 문제, 제한 시간 3시간.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프로그램을 짜서 빠르고 정확하게 답을 만들어내는 문제였다.
이번 문제는 데이터가 많아 필연적으로 컴퓨터 계산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기에 프로그램의 처리속도가 승패를 좌우한다.
조건을 만족하는 논리를 구성하기 쉽지 않아 보였다.
문제를 풀기 시작한 순간 윤수아는 자신의 능력이 과거와 달라졌음을 인지했다.
고려 과학고에 입학한 후 제대로 컴퓨터를 다룰 일은 두 번의 과제연구가 전부였다.
소행성의 궤도를 계산하기 위해 대량의 수식을 코딩하고 프로그램화했으며 월면을 형상화하기 위해 지형을 3D로 구현하는 프로그램을 작성했다.
그 두 문제는 틀에 박힌 정보 올림피아드 문제와 달라서 이 시험에 도움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정보 경시대회에 참가하면서도 그녀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수학이나 물리에서 타학생만큼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기에 정보를 선택했을 뿐이다. 물론 정보 과목이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푸근한 기분을 그녀에게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데 문제를 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수아는 자신의 눈과 손을 의심했다.
놀랍게도 문제가 술술 풀렸다. 과거보다 훨씬 논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문제가 해결됐다.
절대 쉬운 문제가 아님에도 쉽게 풀리는 양상이 마치 그녀가 과거와 다른 수준에 있는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곧 그녀는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의 과제연구를 통해 실전 프로그램을 만든 경험이 그녀를 한 단계 성장시켰다.
그 과제연구는 물리학과 수학에서 가르침을 주었지만, 그 과정에서 놀랍게도 그녀의 프로그램 작성 능력이 대폭 향상한 것이다.
그것은 감동이었다.
어릴 때 컴퓨터를 만지면서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구박을 받았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뛰어넘어 이제는 그녀의 컴퓨터 실력이 연구에 도움을 준다.
“쓸모가 있었어. 나는 놀고 있었던 게 아니야.”
윤수아의 눈망울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혔다.
이럴 시간이 없다. 그녀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고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 흐릿하게 보이던 글자들이 다시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 * *
손차희는 바로 앞에 앉은 학생을 의식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권유성과 같은 고사장에 배치됐다. 그것도 나란히 앞뒤로 앉아 시험을 치른다.
시험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나쁜 기억에 사로잡혔다.
학교에서는 권유성과 이렇게 같은 교실에서 시험을 치른 적이 없었지만, 학원에서는 숱하게 많았고 심지어 중학교 때는 같은 교실에서 경시대회를 치른 적도 있었다.
권유성의 오지랖 때문에 녀석의 주위에는 항상 여러 학생이 몰렸고 그들의 시선은 그녀를 부담스럽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분 나쁜 일은 자주 그녀가 권유성에게 밀렸다는 사실이다. 특히 수학에서.
오늘 고사장에 들어왔을 때 권유성이 다른 학생들과 경시를 운운하며 떠드는 장면을 보자 과거의 아픈 추억이 되살아났다.
하필이면 이 녀석과 같은 고사장이라니. 차라리 이민찬이라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시험 문제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한두 문제를 고민하고 해답을 찾으면서 손차희는 새로운 기분에 젖어 들었다.
그녀가 권유성을 싫어하는 이유, 녀석과 같은 고사장이었을 때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그의 천재성 때문이었다.
그녀는 권유성을 천재라고 인정하기 싫었고 그렇기에 녀석을 꺾어 이를 증명하고자 했다.
그런 마음이 시험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권유성도 별거 아니었어,’
최근에 그녀는 압도적인 천재를 만났다. 그녀가 어떻게 해도 능가할 수 없고 너무나 멀리 있는. 그렇기에 시기할 수도, 따라잡을 수도 없는 그런 사람을.
바로 강우였다.
강우를 만난 이후 그녀는 권유성의 천재성을 질투하지 않았다. 강우에 비하면 권유성은 범재나 마찬가지며 그녀나 권유성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권유성을 시기하고 미워하던 마음이 사라졌다. 이제는 권유성을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됐다.
지금부터 그녀의 목표는 권유성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강우를 쫓아가는 것이다.
목표가 한결 높아졌다.
덕분에 그녀의 마음은 급속히 안정을 되찾았다.
앞에 앉은 권유성의 몸이 한차례 크게 꿈틀거렸다. 풀다가 막혔다는 신호다. 예전이라면 그녀도 같이 동요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문제가 풀린다. 곳곳에 강우와 함께 세미나실에서 공부했던 유형의 문제가 보였다. 오늘 시험은 좋은 결과를 얻을 것 같다.
손차희는 주어진 3시간을 모두 소모하면서 끝까지 문제를 풀었다. 고려 과학고 경시 문제는 절대 쉽지 않기에 모든 문제에 손을 댔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건너편 벽을 응시했다.
저 벽 건너편에서 강우가 시험을 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 풀었을까. 궁금해졌다.
* * *
경시대회 결과는 금방 나왔다.
결과물을 받아든 김윤택은 황당한 표정으로 정명욱을 찾았다.
“이거 채점 제대로 한 겁니까?”
“정확합니다.”
정명욱이 웃음으로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날 강우 학생은 막판까지 헤매고 있었는데요?”
“검산하고 있었겠죠.”
김윤택은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시간이 끝나갈 때쯤 강우는 문제를 더 푸는 것 같지 않았다. 문제지를 열심히 째려보며 고개만 젓고 있었을 뿐이다.
김윤택은 강우의 몸짓을 보고 문제가 막혀서 그렇다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딱히 시간에 쫓기는 기색도 아니었다.
사전에 물어봤을 때 출제 선생님들은 시간이 부족하리란 예측을 했었으니까 강우가 제대로 풀었다면 그런 행동을 보일 리 없었다.
그래서 얼른 답지를 내라고 중간에 호통을 치기도 했었는데.
‘설마 시간이 엄청 남았단 말인가?’
절대 그럴 리는 없었다. 아니 없어야 했다.
“그래도 이 점수는…….”
김윤택의 눈동자는 수학경시로 유명한 몇몇 학생의 점수를 확인하며 격렬한 떨림을 일으켰다.
도무지 인정하기 싫은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