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교내 경시 (4)
- 강우 93점.
- 박일현 72점.
- 권유성 64점.
- 손차희 53점.
- 이민찬 51점.
- 주영식 42점…….
믿을 수 없는 점수에 김윤택이 다시 투덜댔다.
“애초에 최고점이 50점을 간신히 넘을 만큼 어렵게 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었죠. 실제로 어려웠습니다. 심지어 마지막 문제는 함정에 빠지기 쉬운 문제였고요. 하지만 생각보다 학생들 수준이 뛰어나더군요. 박일현 학생이야 국가대표이자 IMO 금메달리스트 아닙니까? 저 점수가 당연합니다. 권유성 학생도 상비군이니까…… 올해 노력을 많이 했겠지요.”
“그럼 다른 학생은…….”
“손차희나 이민찬 학생은 원래 만능 아니었습니까? 수학뿐 아니라 다른 과목도 다 잘하니까요. 의외로 수학에서도 깊이가 있어요. 예상보다 두 학생이 잘 쳤습니다.”
자꾸 딴말하는 정명욱을 김윤택은 아니꼽게 노려보며 다시 질문했다.
“그럼 강우 군은…….”
“솔직히 강우 군이 이렇게 잘 칠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다 풀었어요. 그렇다고 백점을 줄 수는 없잖아요? 증명과정에서 빠진 수식을 트집 잡아서 점수를 깎았습니다.”
강우의 성적은 정명욱으로서도 의외였다.
이미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통해 수학을 잘한다고 증명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신일 뿐, 경시에서는 다르리라 생각했다.
가끔 강우가 엉뚱한 면모로 천재성을 보여주긴 했지만, 워낙 들쑥날쑥해서 그 성적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놀라운 성적이 교내 경시대회에서 드러났다. 아무리 잘하더라도 박일현을 넘기 어려우리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넘었다. 압도적으로.
김윤택으로서는 최악의 결과였다. 이민찬마저 손차희에게 뒤졌으니까.
강우는 예상보다 더 놀라운 학생이었지만 그는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을 거부하고 다른 선생님과 과제연구를 계획하는데 하필이면 그 상대가 신출내기나 다름없는 차도도였다.
잘해주고 싶어도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녀석이다.
“끙, 결국 강우 군이 수학경시에서 최우수상을 받게 되는군요.”
“손차희와 이민찬은 우수상입니다.”
경시 수상은 최우수상 한 명과 다수의 우수상으로 정해진다. 구체적으로 점수를 발표하지는 않는다.
“알았어. 어쨌든 수학 천재가 탄생했으니 축하할 일이지요.”
김윤택은 마지못해 강우의 등장을 환영하는 척했다.
* * *
강우는 입학 후 두 번째로 교장실을 방문했다.
인자한 인상의 백두섭 교장 선생님은 예전처럼 그를 맞이했다.
목표를 달성했기에 강우는 편한 마음으로 인사했다. 그의 옆에는 담임인 차도도와 주임인 김윤택이 앉아있었다.
“그렇다면 강우 학생이 수학경시 최우수상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김윤택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럼 이제 그간의 논란이 끝난 거죠? 대한 수학회에 추천서를 요구할 수준은 확실한 거죠?”
“지난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학생을 눌렀으니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현 국가대표 학생보다 더 뛰어난 학생이 있어 추천한다면 충분한 명분이 된다.
강우가 박일현보다 우수한 성적을 거두리라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었는데 막상 현실이 되니 백두섭은 마음이 즐거워졌다.
우수한 학생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 쏠쏠하다.
“경시대회 참가 때 약속했으니까 당연히 지켜야지요. 강우 학생? 고생했네.”
백두섭이 온화한 미소로 강우를 격려했다.
정작 강우는 이 자리가 불편할 뿐이다. 일단 예의상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교장 선생님 덕분에 내년 올림피아드 국가대표 자리를 노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일현 군과 권유성 군은 이미 국가대표 자리를 예약해 두었다고 볼 수 있어요. 거기에 강우 군마저 낀다면 학교 차원의 경사입니다.”
백두섭의 화답에 김윤택이 바로 추가했다.
“이민찬과 손차희 학생도 권유성과 거의 차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 두 학생이 올림피아드 겨울학교 교육을 받는다면 내년에 국가대표 발탁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럼 국가대표 6명 가운데 우리 학교에서만 5명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허허, 듣기만 해도 좋군요.”
교장실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강우는 이참에 물리 문제도 해결할 생각이었다.
“교장 선생님, 저희 물리 프로젝트 건도 허락해주시는 거죠?”
강우가 이 말을 꺼낼 줄 몰랐던 듯 백두섭과 김윤택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흠, 그게…… 차 선생님이 올린 품의서가 있긴 한데…….”
강우의 옆에 앉은 차도도의 몸이 경직됐다.
책상 위에 놓인 결재 문서를 가져온 백두섭이 서류를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카이스트에서 차 선생님에게 프로젝트 위탁연구를 요청하는 공문이군요. 차 선생님께선 이 프로젝트를 네 학생과 함께 과제연구로 수행한다는 뜻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허락해주시면 됩니다. 순전히 제가 카이스트와 일하는 것이라 겸업 허가 요청 건이니까요.”
차도도는 공무원이기에 외부 기관의 일을 맡으려면 기관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흠, 그렇군요.”
“실질적인 연구 활동은 학생들이 할 겁니다. 연구비도 대부분을 학생들에게 지급하고요. 저는 관리만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주축은 강우 군이고요?”
백두섭의 시선이 강우를 향했다.
“제가 할 겁니다. 자신 있습니다. 애초에 그 프로젝트를 한태규 교수님에게 제안한 사람이 저니까요.”
강우의 자신감 있는 대답에 백두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 김윤택이 끼어들었다.
“교장 선생님, 이 문제는 신중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이런 사유로 외부 활동을 허가해준 적이 없습니다.”
“교재 편찬 같은 일은 자주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만.”
“이건 다르지 않습니까? 자칫하면 학교의 명예를 훼손하게 됩니다. 프로젝트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그 책임을 누가 집니까? 게다가 차 선생님이 지금 카이스트 대학원을 다니는 학생도 아니고요, 또 석박사 출신이 아니라서 연구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김윤택이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나섰다.
절대 수학 올림피아드 추천서와 물리 프로젝트 모두를 양보할 수 없다는 의지가 보였다.
강우는 그의 이런 태도가 자신을 겨냥한 것인지 아니면 차도도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치사하군.’
듣고 있던 차도도가 바로 반박했다.
“카이스트에서도 가능성 없는 일에 연구비를 투입하지 않습니다.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제안서를 보낸 것이니까요. 이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이는 우리 학교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쾌거가 될 겁니다.”
국가 기관 연구 프로젝트에서 대학교가 아닌 고등학교가 참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R&E에서 학생이 연구원으로 참여하더라도 이처럼 프로젝트 일부를 통째로 위임받는 경우는 없었다.
“좋은 기회란 뜻이군요?”
“교장 선생님, 안 될 때도 생각해보셔야…….”
목소리를 높이던 김윤택이 백두섭의 싸늘한 표정에 입을 닫았다.
백두섭이 미소를 지으며 강우에게 물었다.
“강우 군, 대부분 연구를 자네가 해야 하는데…… 가능한가? 학교 내신 공부에, 수학 올림피아드 준비, 거기에 프로젝트까지. 무리 아닐까?”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강우는 한껏 자신감을 드러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교장 선생님, 꼭 해야 한다면 차 선생님 대신에 경험이 많은 제가 전면에 나서면 어떨까요?”
김윤택에게서 새로운 제안이 나왔다.
차도도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는 순간 강우는 바로 못을 박았다.
“저희 담임 선생님과 함께여야 할 수 있습니다.”
강우는 차도도를 추켜세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순간 김윤택의 안면이 일그러지는 것도 바로 감지했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백두섭이 바로 잡았다.
“하하, 그렇게 합시다. 지금 우리는 학교를 빛낼 중요한 순간에 있습니다. 강우 군이 계획대로 달성해준다면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올 겁니다. 정부에서도 영재학교 제도의 성과라고 홍보할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죠. 위험 요소가 없지 않지만 그래도 성공했을 때의 효과가 훨씬 큽니다. 그래서…….”
백두섭이 펜을 꺼내 문서에 서명했다. 차도도의 프로젝트 수행을 승인한다는 결정이다.
차도도의 안색이 밝아졌고 반대로 김윤택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끼었다.
“차 선생, 강우 군. 열심히 해주게.”
백두섭이 차도도에게 문서를 넘기면서 격려했다.
강우는 차도도를 따라 감사를 표했다.
그들 세 사람이 교장실을 떠나려고 문을 열었을 때 백두섭의 경고가 나지막이 울렸다.
“김윤택 선생님, 학교를 위한 일이니까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세요. 이번 학기 차 선생님이 맡은 과제연구 학생 수를 조정해서 부담을 덜어주면 어떨까요? 프로젝트에 매진할 수 있게 말입니다.”
역시 교장 선생님은 아군이었다.
강우는 내심 웃음을 머금고 교장실 문을 닫았다. 나라를 잃은 듯한 김윤택의 표정이 볼만했다.
* * *
경시대회 수상 명단이 발표됐다.
6개 부문, 부문별로 최우수상 1명, 우수상이 5명이었다.
구체적인 점수가 나열되지 않아 누가 얼마나 잘했는지 알 수 없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바로 최우수상이 우수상보다 점수가 높으리란 점이다.
수학 부문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강우가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국가대표이자 금메달리스트인 박일현의 수상을 의심한 사람이 없었기에 그 충격파는 예상외로 컸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만점에 경시대회 최우수상! 사실상 고려 과학고에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강우 쩐다!”
“금메달 위에 무슨 메달이 있어?”
“내신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별일이네.”
“저 자식 학원을 안 다녔다고 했잖아?”
“선행도 안 했다고 구라쳤지.”
“1학년에게 물리다니! 2학년 쪽팔린다.”
게시판 앞에서 학생들의 별별 잡담이 터져 나왔다. 그만큼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수학 부문 옆에는 과학 부문이 붙어 있었다.
최대우는 물리 부문에서 당당하게 우수상에 이름을 올렸다. 최대우의 기말고사 물리 성적이 최상위가 아니었기에 이 또한 화제를 불러왔다. 이것은 물리 문제풀이 센터 블로그를 열심히 운영한 결과였는데 고곽천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보 부문에서는 윤수아의 이름이 우수상을 장식했다. 윤수아는 컴퓨터 관련 동아리를 하지 않았기에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났다.
그들의 면면이 1학년 3반이라는 공통점을 주목한 사람은 있었지만, 그 내면이 ‘고곽천재’라는, 같은 조원이란 사실에 주목한 자는 없었다.
경시대회를 한때의 축제처럼 생각한 학생들은 수상자를 축하하면서도 내년에는 자신이 상을 받겠다는 의욕을 불태웠다.
* * *
정작 그 시각 강우를 비롯한 모두는 KTX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렇게 수업 째는 기분도 나쁘지 않은데?”
“넌 쌤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떡해?”
강우의 환호성에 윤수아가 핀잔으로 답했다.
그들의 옆에서는 차도도가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오늘은 수요일 오후, 과제연구 시간에 그들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러 카이스트로 향하고 있었다. 프로젝트 수행에 첫발을 딛고 서로 간에 인사하는 날이다.
“나도 너희 덕분에 수업을 빠져서 좋은데?”
차도도의 반응에 강우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거봐, 그렇다니까.”
어쨌든 학교를 벗어나서 모두가 즐거웠다.
“지금쯤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을 거야. 경시대회 결과가 게시됐다고 올라왔어.”
차도도의 말에 그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모두가 최우수상 아니면 우수상을 받았다. 경시대회를 준비하면서 이런 실적을 거두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다.
그나마 강우와 손차희는 수상이 가능하다고 여겼지만, 최대우나 윤수아는 수상보다 참가에 의의를 두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