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카이스트 (1)
“과제연구 프로그램 작성이 큰 도움이 되었어.”
“난 블로그 운영이.”
소감을 말한 윤수아와 최대우의 시선이 강우를 향했다.
“강우랑 같이 모르는 수학 문제를 풀면서 도움받았지.”
손차희마저 끼어들었다.
이 모든 성과는 입학 때부터 유지해왔던 고곽천재 활동 덕분이었다.
항상 세미나실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그들은 팀워크를 형성하게 됐다. 한때 흔들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각자의 장점을 인정하고 서로 협력하고 있었다.
그 뒤를 강우가 떠받치고 있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강우는 머쓱해져서 손을 저었다.
“조원 모두가 상을 받은 조는 우리밖에 없을걸?”
그들을 이렇게 같은 조로 묶어준 차도도에게 내심 감사했다.
차도도는 처음 조를 구성하던 그 날을 떠올렸다. 적응이 어려워 보이는 최대우와 강우를 윤수아와 손차희가 도우라고 함께 엮었는데 실상은 반대가 됐다.
차도도는 고곽천재를 응원했다.
“자, 앞으로가 중요해. 1년간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해. 이건 학교 명예도 걸려 있으니까 너희들도 엄청 바빠질 거야.”
단순히 생각하더라도 그들은 프로젝트 수행에서 대학원생과 같은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담당교사인 차도도도 대학원을 다니지 않았으니 그녀도 처음 걷는 길이다.
그 길이 두려울 법하지만 이상하게도 강우를 보면 안심이 된다. 그 이유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당연히 강우는 손강우 시절에 그런 프로젝트를 수도 없이 경험해봤었기에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마음을 새롭게 다지던 윤수아가 차도도에게 물었다.
“오늘 카이스트에 가서는 뭐 해요?”
“프로젝트 수행 연구원들의 첫 만남이야.”
“한태규 교수님 실험실 사람들요?”
“그 교수님이랑 다른 교수님 한 분. 국책 연구과제라 규모가 커서 두 교수님이 공동으로 담당하나 봐. 당연히 그 산하 대학원생 일부도 참여하지.”
오늘은 프로젝트 시작이 예정되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차도도가 관련 문건에 사인하고 카이스트 측에서 프로젝트 전체 윤곽과 고려 과학고에서 수행할 연구 내용, 일정 등을 알리는 시간이었다.
강우를 제외하고는 카이스트 대학원생을 만난다는 사실에 신이 났다. 예전에 한국대 물리학과를 견학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들은 잡담을 나눴다.
* * *
넓은 평지에 자리한 카이스트는 산 중턱에 있는 한국대와 분위기가 달랐다. 한국대에 비하면 규모가 작지만, 훨씬 조용하고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강우 일행은 곧바로 물리학과로 향했다.
그는 손강우 시절에 카이스트를 방문했던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 학교 물리학과 대학원생 중에 아는 인물이 없다. 다만 물리학과 교수들은 학회에서 가끔 만나 안면이 있는 정도였다.
회의실에 도착해서 프로젝트 개요 설명을 들었다.
프로젝트 참여 카이스트의 연구인력은 대략 10여 명, 강우네를 제외하면 교수가 둘에 나머지는 대학원 석사 박사과정 학생이었다.
코레일과 국토부가 주관하는 고속전철 성능개선 프로젝트의 위탁연구 일부로 한태규가 맡은 분야 프로젝트명은 ‘고속전철의 외형과 공기저항 연구’였다. 공기의 흐름을 제어하여 저항을 줄이는 과제로 유체역학, 그중에서도 난류의 연구다.
소용돌이라 불리는 난류는 고전 물리학에서 가장 난해한 분야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아인슈타인이 난제 중의 난제라고 언급했을 정도다. 다만 현재는 물리학계의 주된 관심사에서 다소 멀어진 분야이기도 하다.
지금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사람은 한태규 교수의 밑에 있는 박사과정 학생, 이기준으로 총괄 실무를 담당했다.
“……이상과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고속전철 성능개선의 핵심적인 문제이기에 모두의 분발이 요구됩니다. 모두 세 기관이 참여했으므로 연구 업무를 다음과 같이 나누었습니다.”
전체적인 설명을 들으면서 강우는 대략적인 프로젝트 윤곽을 알아챘다.
관련 기관은 카이스트 물리학과 한태규 교수팀과 공과대학 쪽의 장호일 교수팀, 고려 과학고 차도도팀이었다. 연구대상이 고속전철이고 물리학의 산업기술 응용 분야이기에 공대를 엮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제야 강우는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연구원들이 양쪽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자리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려 과학고에 주어진 업무는 고속전철 외형 사례 연구였다.
전문적인 연구원이 아닌 과학고 학생이기에 비교적 쉬운 주제를 맡았다. 이미 개발된 고속전철 관련 논문 자료를 수집해서 비교 분석을 하면 된다. 영어 논문을 읽을 줄 알고 관련 분야 지식을 이해한다면 어려울 게 없었다.
이것은 한태규의 배려였다. 그들 팀은 평범한 과학고 학생과 선생님으로 구성되어 있어 카이스트 연구원처럼 전문적이지 않다. 그래서 비교적 부담 없는 부분을 따로 떼어줬다.
그날 아이디어를 제공한 강우에게 보상해준 느낌이다.
물론 강우는 그렇게 쉽게 이 프로젝트를 끝낼 생각이 없었다.
‘핵융합과 관련이 없지도 않지.’
그도 한때 난류를 연구했었다. 핵융합에서 플라스마와 양자 입자의 움직임이 난류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분야에도 상당한 지식이 있다.
“모두 잘 들으셨지요? 질문 있습니까?”
전반적인 연구 소개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왔다.
한 대학원생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굳이 사례 연구를 따로 떼어내어 과학고에 위탁할 필요가 있습니까? 금액도 만만찮은데요? 내부에서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돌발적인 질문이 튀어나왔다.
참석한 사람들의 반응이 확 갈렸다. 카이스트에서도 한쪽은 당황한 표정을, 한쪽은 공격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국책 연구과제에 나눠 먹기가 많다지만 고등학교가 끼어든 것은 처음 봅니다.”
“이 연구과제가 솔직히 고등학생이 끼어들 수준은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연구 책임자를 보니…… 학부 졸업 출신의 학교 선생님……, 이게 타당하다고 보십니까?”
이의를 제기한 대학원생과 한패로 보이는 연구원들의 불평이 갑자기 쏟아졌다.
난데없는 비난에 차도도를 비롯하여 고곽천재의 안색이 확 변했다.
강우는 곧바로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챘다.
대학원생이 독단적으로 이런 식의 딴지를 걸 수는 없다. 대학원생과 지도교수는 명백한 갑을 관계이니까. 이 도발은 공대 쪽 담당 교수의 뜻이 분명했다.
“아, 그게 말이지요…….”
보다 못한 한태규가 전면에 나서려 했다.
그러자 이의를 제기한 대학원생 쪽에 앉은 교수가 바로 말을 끊었다.
“한 교수님, 국책 과제여도 연구비 집행은 참여자가 수긍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연구 가능성이 의문시되는, 자격이 부족한 사람이나 기관에 위탁해야 합니까? 이런 식의 집행이 과학기술 발전을 저해하는 겁니다.”
강우는 딴지를 거는 교수의 이름을 확인했다.
장호일. 카이스트 공과대학 교수로 이 프로젝트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실험을 맡았다.
그사이 한태규와 장호일의 불꽃 튀는 공방이 벌어졌다.
‘두 사람 사이가 별로였군. 서로 경쟁 관계인가…….’
이 프로젝트의 앞날이 걱정된다. 성격이 다른 두 학과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프로젝트인 만큼 유기적인 협조가 필요한데 출발부터 삐거덕거린다.
연구계획서를 대충 훑어본 강우는 금방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양측이 연합해서 따온 프로젝트이지만 엄연히 이 프로젝트의 총괄은 한태규이고 장호일은 수치실험 연구를 위탁받은 처지다. 상대적으로 연구비가 적었다.
그런 상황에서 연구비 일부를 고려 과학고에 지급하다 보니 괜히 딴지를 걸고 싶어진 것이다. 딱히 고려 과학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난데없이 욕을 먹으니 기분이 나쁘다. 학생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학생들 앞에서 선생님까지 자격 없다고 운운하는 행태는…….
석사,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들의 눈에 학부 졸업 출신의 어린 선생님이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위탁 연구기관의 책임자인데 너무 나갔다.
강우가 분개하듯이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차하면 다 때려치우고 나갈 분위기다.
저들이 노린 점이 바로 그것이기에 강우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장호일 교수팀 쪽을 노려보았다.
“업무 분담은 사전에 끝났습니다. 오늘은 최종 확인 서명 후 업무 개시를 위한…….”
한태규가 어떻게든 소란을 잠재우려고 할 때 강우가 벌떡 일어났다.
“방금 이의를 제기하신 분은 어디 소속이신지요?”
강우의 시선을 받은 대학원생이 비웃음을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하하, 저는 장호일 교수님 밑에서 박사과정 중인 임명덕입니다만.”
“아, 그러십니까? 잠시 업무 분담표 다시 띄워주실 수 있습니까?”
강우는 오늘 회의를 진행하는 한태규 쪽 대학원생 이기준에게 요구했다.
스크린에 장호일 교수 쪽의 연구 계획표가 쭉 떴다.
강우는 묘한 웃음을 머금고 상대를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자격 운운하셔서 제가 물어보고자 합니다. 저희가 어떤 면에서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하, 굳이 그걸 밝힐 필요가 있겠습니까? 모두 알잖아요? 제가 보기엔 이 연구과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솔직히 고등학생이 또 선생이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럼 그쪽은 잘 알고 계시는가 보죠?”
“당연하죠.”
녀석이 자신감을 드러낼수록 강우의 미소도 짙어졌다.
“그럼 제가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하하, 그러시죠. 질문도 아는 게 있어야 물을 수 있습니다. 괜히 쓸데없이 트집을 잡으면…….”
도발한 자의 사정을 봐줄 만큼 강우는 너그럽지 않다.
“고속전철의 저항을 줄이는 핵심은 알다시피 주행 중 표면에서 떨어져 나오는 유체의 박리현상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비선형 편미분 방정식을 풀어야 하고요.”
“당연하죠.”
“이 방정식을 풀려면 난류 모델링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현재 목표한 모델이 있습니까?”
예상외로 세부적이면서도 핵심을 담은 질문에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상대는 이런 경험이 잦은 박사과정 대학원생이었다.
“하하, 지금부터 알아봐야죠. 그것 때문에 연구하는 거니까요.”
“그렇긴 합니다만 난류 모델링이 과거 100여 년에 걸쳐 계속 연구되어왔음에도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한 난제임을 아시죠? 각 모델은 장단점을 갖고 있어 지금부터 고민한다면 이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도 적합한 해법을 찾지 못할 텐데요? 대표적인 DNS, LES, DES, RANS 방식 가운데 어떤 쪽을 선택해야 할까요? 그중에 우리에게 적합한 해법은 무엇인지? 또 이 해석의 검증을 실험과 어떻게 연계할 것인지…… 이 모든 대책을 임명덕 연구원께서 세워두셔야 하는데요?”
갑자기 쏟아진 전문용어에 임명덕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질문은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놀란 사람은 임명덕만 아니었다. 이곳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강우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DNS를 세부적으로 파고 들어볼까요? 아직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고요? 저로서는 임 연구원님이 과연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으으…….”
“제가 조금 힌트를 드릴까요? 일반적인 난류 해석에 사용되는 DNS 방식은 고속전철에 적용하기에…….”
이어서 강우의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동안 임명덕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장호일 교수는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한태규는 흐뭇한 표정으로 강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누가 봐도 강우의 일방적인 압승이었다. 강우네 팀을 비난하던 임명덕이 발끈한 강우의 반격에 제 무덤을 판 꼴이 됐다.
당황한 임명덕은 연신 지도교수의 눈치를 살피느라 이제는 아는 내용마저 버벅대며 대답하지 못했다.
“죄, 죄송합니다. 자격 없다는 말을 철회하겠습니다.”
견디다 못한 임명덕이 사과한 후 제자리에 앉았다.
차도도를 비롯하여 고곽천재의 안색이 돌아왔다.
또 자격 운운하는 불평이 나오면 이번에는 제대로 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