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카이스트 (2)
“하하, 강우 군 역시 대단했습니다.”
한태규 교수의 연구실에서 강우는 사과를 받았다.
강우가 나서려 할 때 차도도가 슬쩍 그를 말렸다. 대신에 그녀가 운을 뗐다.
“교수님, 프로젝트 참가자들 간에 사전 조율이 안 되었나 보죠?”
“아, 죄송합니다. 그게 장 교수와 조금 문제가 있어서 말이지요. 저도 저쪽에서 그런 식으로 트집을 잡을 줄 몰랐습니다.”
같은 학과 소속이 아니기에 불협화음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내부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굳이 그들이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차도도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저쪽 업무와 분리되어 있기에 상관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런데 프로젝트가 제대로 흘러갈까요?”
“괜찮습니다. 저쪽도 맡은 일은 제대로 할 겁니다. 프로젝트 전체로 보면 장 교수 팀도 연결되어 있지만 고려 과학고에 준 프로젝트는 저쪽과 전혀 상관없지요. 오직 저와 차 선생님 간의 협약이지요. 아마 앞으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 업무적으로 다시 엮일 일이 없을 테니까.
“저는 차도도 선생님을 비롯하여 학생들에게 충분한 역량이 있다고 보기에 프로젝트를 맡겼습니다. 실제로도 그렇고요. 짐작하셨겠지만 고려 과학고에 맡긴 위탁연구 주제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각국의 개발 사례를 확인하고 그 속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꺼내면 충분하니까요. 이런 면에서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은 학생들이라서 오히려 강점이 있다고 봅니다.”
한태규가 학생들을 칭찬하며 기대감을 표시하자 모두가 흐뭇한 기분에 잠겼다.
“아울러 저는 강우 군이 이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랍니다. 즉 좋은 아이디어를 내주었으면 합니다. 지난번처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한태규의 시선이 학생들을 쭉 향했다.
“학생들이 우리 실험실에 좋은 인상을 받아서 이 학교에, 이왕이면 물리학과로 진학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대학에서 과학고와 R&E를 추진하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야 받아주신다면…….”
최대우의 입이 벌어졌다. 한국대든 카이스트든 가고 싶은 학교이니까. 특히 최대우는 물리에 재능과 관심이 있으니 훗날 이 학교로 올 가능성도 크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물리학과를 좀 둘러봐도 될까요?”
차도도가 견학을 요구했고 한태규는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허락했다.
손차희가 휴대폰을 들고 물었다.
“혹시 실험실 사진을 찍어도 되나요?”
“하하, 문제없습니다.”
손차희는 가끔 인스타를 한다. 오늘 실험실 방문을 SNS에 올릴 생각이다. 이 기회에 차도도와 고곽천재의 사진을 SNS에 남겨야겠다.
* * *
저녁까지 얻어먹은 후, 강우 일행은 KTX에 올랐다.
확실히 고속전철이 있기에 당일에 업무를 마치고 돌아갈 수 있다. 문명의 이기는 이렇게 편리하다.
올라가는 길에는 강우와 차도도가 나란히 앉았고 나머지 학생들은 옆 좌석에서 마주 앉았다.
손차희를 비롯하여 친구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엄청 부러워하네. 과제연구 시간에 카이스트 구경 갔다고.”
그새 찍은 사진을 올린 모양이다.
“‘좋아요’가 폭발했어!”
“우와! 부럽다.”
“앞으로 심심할 때마다 카이스트 가자.”
“그래도 돼?”
“R&E 시간에 대학교에 가는 2, 3학년들도 많다던데.”
고곽천재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강우도 절로 즐거워졌다. 그 혼자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라면 극구 사양했겠지만 친구들과 함께라면 충분히 할 만하다.
프로젝트 인건비가 지급되는 이번 달부터 그는 곤궁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강우는 묵묵히 그들을 쳐다보는 차도도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오늘 어떠셨어요?”
“뭘?”
“그쪽이 좀 무례해서…….”
“으응, 화는 나지만 어쩌겠지?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니까.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엄청 무시당했겠지. 대학원생 입장에서는 학부만 졸업하고 선생님이 보기에 내가 미덥지 않았을 수도 있고.”
어쩐지 차도도의 목소리에 기운이 빠졌다.
사실 강우는 많이 화가 났었다.
그에게 차도도는 단순한 선생님이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학생에게 애정이 있고 또 과학에 열정도 깊다. 그런 선생님을 무시한 그 녀석을 조금 더 혼내주어야 하는데……. 오늘 그 녀석을 물 먹인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언젠가 다시 기회가 오겠지.
물끄러미 차도도를 보고 있자니 예전에 들었던 과거사가 떠올랐다.
대학원을 진학하려다가 집안의 반대로 포기하고 선생님이 되었다고 했던가. 어쩌면 그녀에게는 물리학을 더 공부하고 싶다는 욕구가 지금도 숨 쉬고 있을지 모른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을 눈치챘을까?
차도도가 빙그레 웃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강우야 고마워.”
“네?”
“덕분에 나도 다시 공부하게 됐잖아. 나는 프로젝트 파트너이니까 내용을 모르면 안 되잖아? 오랜만에 전공 서적이랑 논문을 훑어보는데 참. 좋더라고.”
역시 차도도도 더 공부하고 싶었나 보다. 강우가 볼 때 그녀는 연구와 잘 어울렸다. 교단 앞에 서서 학생을 가르치는 모습도 예쁘지만, 책상에 앉아 서적을 뒤적이며 고심하는 그녀의 모습이 더 아름답다.
그래서 강우는 그녀를 한참 바라봤다.
“강우야?”
“네?”
“뭘 그리…….”
“아! 오늘 한 교수님 실험실 대학원생들요.”
“그 연구원들? 왜?”
“오늘 선생님 볼 때 정신을 못 차리던데요?”
괜히 어색해서 강우는 화제를 돌렸다.
실제로 그랬다. 차도도는 선생님이지만 아직 어린 나이다. 계속 진학했어도 겨우 석사 2학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군대를 다녀온 대학원생이라면 차도도보다 나이가 많았다. 박사과정 대학원생이라면 차도도와 사귀기에 나이가 적당히 어울리기도 했다.
뛰어난 미모를 지닌 그녀가 갑자기 실험실에 들이닥쳤으니 반응이 가히 폭발적이었다. 특히 앞으로 프로젝트를 같이 할 사이란 소개에 대학원생들이 의욕을 불태웠다.
옆에 있는 모두가 느낀 분위기를 차도도라고 몰랐을 리 없다.
차도도가 쑥스러운 듯 손을 내저었다.
“그렇지도 않아. 내가 무슨.”
“그래도 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생겼다고 우리를 홀대하시면 안 돼요.”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차도도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쌤.”
“응?”
“적어도 제가 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저를 밀어주셔야 해요. 이 프로젝트는 이제 처음일 뿐이거든요. 앞으로 더한 일을 벌일 생각인데…….”
차도도가 말없이 빙그레 미소로 화답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안정됐다. 언제까지든 그녀가 그의 편이 되어주기를 마음속으로 바랐다.
* * *
2학기 들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실험 수업이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실험은 물리, 화학, 생물 과목에 추가로 붙었고 덕분에 학생들은 실험 리포트를 쓰느라 바쁜 시간을 쪼개야 했다.
오늘은 물리 실험 시간.
물리 실험 담당 선생님은 차도도가 아닌 홍준용이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 선생님이다.
그동안 차도도에게 물리 수업을 듣다가 선생님이 바뀌니 신선했다. 다만 차도도가 수업할 때만큼 신이 나지 않았지만.
안내서에 적힌 실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 시지프스의 고민 : 역학적 에너지 보존 실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는 교활하고 못된 지혜가 넘친 코린토스의 왕이다. 시지프스가 이 실험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자, 모두의 앞에 놓인 실험장치를 살펴보면…….”
담당 선생님인 홍준용의 설명에 강우는 테이블 위를 쳐다봤다.
놀이공원에서 보는 듯한 레일이 세워져 있었다. 한쪽 위에서 경사를 타고 내려온 레일이 중간에 크게 원을 그린 후 다시 수평으로 뻗어있다. 마치 롤러코스터 레일을 닮았다.
“레일을 따라 공을 굴리는 실험이다. 이 실험은…….”
강우는 선생님의 설명을 한쪽 귀로 흘렸다. 딱히 물리학 실험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학고의 실험은 대학교 일반물리학 실험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는 대학원 조교 때 학부생들이 써온 실험 리포트만 한 트럭이나 채점한 경험이 있었다. 웬만한 실험은 눈 감고도 수행하고 설사 실험하지 않더라도 리포트를 완벽하게 써낼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그가 속한 고곽천재가 어떤 조인가.
무엇보다 손차희는 성적에 목을 매는 학생이다. 절대 실험을 대충 허투루 하지 않는다. 실험 예습부터 수행, 결과 정리까지 누구보다도 꼼꼼하다.
그래서 다른 학생들은 손차희에게 묻어가면 된다. 괜히 실험에 끼어들면 오히려 완성도가 떨어질 판이니까.
강우에게는 딱 적합한 환경이었다.
“사전에 나눠준 실험 소개를 잘 읽어보고 지금부터 실험 방법을 구상해보자. 여러분에게는 모두 세 개의 공이 있다. 무거운 쇠공, 가벼운 쇠공, 고무공. 이 세 공을 각각 레일 위에 굴려서 이 공이 중간에 떨어지지 않고 완벽하게 레일을 굴러가는 출발점 최소 높이를 구하면 된다. 포토게이트를 이용해서 공의 속도를 측정하고…….”
대략적인 실험 방법을 설명한 홍준용이 쇠공을 레일 위에 얹고 시험적으로 아래로 굴렸다. 쇠공이 레일을 따라 내려가다가 원형궤도를 돌아 굴렀다. 만일 쇠공의 속도가 느리면 원형궤도를 타고 흐르다가 중간에서 중력 때문에 아래로 떨어진다.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 레일을 달리는 열차가 중간에 위로 솟았다가 뒤집힌 채 레일을 타고 360도 돌면서 아찔한 스릴을 제공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자, 이제 조별로 실험을 해봅시다.”
시범을 끝낸 홍준용이 실험 개시를 선언했다.
역시 손차희가 주도적으로 나섰다. 그녀는 포토게이트와 연결된 사이언스워크샵 장비를 점검하고 준비를 완료했다.
“자, 준비됐어?”
손차희가 눈을 부릅뜨고 다른 조원을 향해 물었다.
강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험 자체는 레일을 구르는 쇠공 소리가 거슬리는 것만 빼면 딱히 어렵지 않다. 위험하지도 않고 원리 역시 단순명료하다.
실험을 시작하면서 손차희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 실험은 역학적 에너지 보존을 확인하는 실험이니까…… 처음 공이 출발한 지점의 위치에너지가 나중에는 공의 위치에너지, 운동에너지, 또…… 회전운동에너지의 합과 같아야 해.”
이어서 조원들에게 각 에너지를 실험에서 측정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사실 물리를 배웠다면 어렵지 않은 내용이다.
강우는 회전운동에너지란 말에 기억을 더듬었다.
공이 구르기 때문에 회전운동에너지가 발생한다. 이 에너지는 관성모멘트의 영향을 받는다. 관성모멘트는 강우가 손차희를 만난 첫날 카페에서 설명해주었던 바로 그 개념이다. 돌고 돌아 다시 거기까지 왔다.
이제는 손차희와 윤수아가 그 개념을 제대로 알까?
손차희도 그때를 떠올렸는지 움찔하면서 강우의 눈치를 봤다.
“이제 관성모멘트는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 거야?”
“당연하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어.”
손차희가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주먹을 콱 쥐었고 옆에서 윤수아도 웃으며 동조했다.
“이젠 나도 알아.”
정작 최대우는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실험을 통해 직접 눈으로 현상을 관찰하면 과학이 쉬워진다. 얼핏 보기에는 별것 아닌 실험처럼 보일지라도 직접 보고 느낀 것과 책으로만 본 것은 차이가 크다.
손차희가 쇠공을 들고 막 실험을 시작하려 할 때 옆 조인 고현성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어이, 씨스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