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롤러코스터 (1)
강우는 눈을 부릅떴다.
이 자식은 자기 조에서 실험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왜 남의 조에 와서 찝쩍대는 걸까. 괜히 실험을 방해하면 오차가 증폭되는 법인데 말이다.
정작 고현성은 강우를 삐딱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브라더는 골키퍼냐?”
“뭐래?”
여기서 골키퍼가 왜 나오지?
강우에게 피식 미소를 던진 고현성이 손차희 앞에 우뚝 섰다.
“실험 데이터 잘 나오냐?”
“대충.”
손차희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대답하면서도 열심히 측정된 속도 데이터를 확인했다.
그녀의 무시에도 여전히 꿋꿋하게 고현성이 할 말을 계속했다.
“놀이공원 가지 않을래?”
“내가 너랑 놀이공원을 왜 가는데?”
“리포트 써야지.”
“무슨 리포트?”
“실험 안내서 마지막에 보면…….”
고현성의 지적에 강우는 재빨리 안내서를 훑었다.
-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 기구의 개략도를 그리고 실험에서 익힌 과학원리를 적용해보자. 롤러코스터가 안전할 이론값과 실제 기구의 모양을 비교하여 그 안정성을 판별해보자. 아울러 과학원리를 적용한 더 재미있는 놀이기구를 구상해보자.
강우처럼 다른 학생들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 실험이 롤러코스터의 원리를 내포한 실험이긴 하지만 마지막 과제는 롤러코스터를 설계해보라는 문제 아닌가.
생각지도 못한 과제에 손차희의 안면이 확 찌푸려졌다.
“씨스더, 그러니까 내 말은…… 리포트 쓰려면 놀이공원 가야 하니까 같이 가자 그 말이지.”
덩달아 강우도 확 안면을 찌그러트렸다.
고민하던 손차희가 최대우와 강우를 보며 말했다.
“너희 둘! 롤러코스터가 뭔지 알아?”
당연히 강우는 안다. 손강우 시절에는, 물론 어릴 때이지만 롤러코스터를 타고 소리를 질러보기도 했다.
타봤다고 말하려던 그는 최대우의 표정을 보고는 바로 입을 닫았다. 생각해보니 울릉도에 롤러코스터가 있을 리 없다. 그리고 강우네 시골에도…….
우물쭈물하는 두 사람을 보고는 손차희가 혀를 찼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놀이공원 가본 적 없지?”
졸지에 강우는 완벽한 시골 촌놈이 됐다.
손차희가 고현성에게 대답했다.
“좋아, 이번 주말에 같이 가. 단 너희가 입장료 내.”
“어?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
“지난번에 밥값 낼 거 아직 남았잖아? 싫으면 말고.”
강우는 손차희에게 무언의 응원을 보냈다. 과연 대단하다, 손차희! 프로젝트 인건비가 들어오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는데 해결책을 순식간에 마련하다니.
뭔가 억울한 표정으로 강우를 노려보던 고현성이 정작 손차희에게는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 이번 주말에 꼭 같이 가는 거다?”
“우리가 시간 잡아서 말해줄 테니까 생각 있으면 오던가.”
손차희의 수락에 고현성이 희희낙락하면서 자기 조로 돌아갔다. 물론 다음 순간부터 그쪽 조는 실험을 하는 건지 말다툼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손차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실험을 마무리했다.
실험이 끝난 후 손차희가 윤수아에게 확인했다.
“수아야, 넌 토요일이 좋아? 일요일이 좋아?”
학원을 안 다니는 손차희는 요일에 지장을 받지 않지만 윤수아는 처지가 다르다.
“난 일요일.”
“좋아, 그럼 일요일에 놀이공원 가자.”
두 여학생이 계획을 잡자 강우는 볼멘소리로 물었다.
“우리한테는 왜 안 물어?”
“너희 둘? 너흰 학원 안 다니잖아? 어차피 주말에 기숙사에 처박혀 있을 거면서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나. 그게 그거 아니야?”
“그, 그렇긴 하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강우는 찍소리도 못하고 물러났다.
역시 이럴 때의 손차희는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다. 저런 손차희가 본래의 모습이다. 중간고사가 끝난 후 침울하던 모습을 완전히 벗어버린 것 같아 강우도 기분이 흡족했다.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자니 홍준용 선생님이 학생들을 불렀다.
“실험 끝났죠? 실험 리포트는 다음 주까지고…….”
“으악!”
옆 전상철네 조에서 비명이 터졌다. 저 녀석들은 주말 놀이공원 문제로 티격태격하다가 아직 절반도 실험을 진행하지 못했다.
* * *
일요일, 강우는 최대우와 함께 과천 놀이공원으로 끌려갔다.
길을 모르는 두 사람을 위해 윤수아와 손차희는 주말에 집으로 돌아갔다가 학교 기숙사까지 와서 그들을 데려갔다. 물론 강우는 길을 알지만 입을 다물었다. 최대우랑 둘이 과천까지 가는 것보다 모두 함께 움직이는 게 훨씬 재미있으니까.
오랜만에 온 과천 서울랜드 앞에서 강우는 입을 떡 벌렸다.
몇십 년 만에 왔는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때와 지금은 의외로 많이 바뀌었다.
“으이구, 시골 소년티 그만 내.”
윤수아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렇게 표정이 이상했나? 옆의 최대우를 흘겨보니 표정이 더 가관이다. 이 녀석은 놀이공원을 처음 와보는 게 확실하다.
저쪽에서 전상철네 조 네 사람이 다가왔다.
모두 여덟 명이나 되니 북적이며 놀러 온 기분이 든다.
“어이, 씨스더. 여기 재미있는 거 많은데…….”
고현성이 만나자마자 손차희에게 작업을 시작했다.
강우는 한숨을 쉬고는 다른 학생들과 인사했다.
그 사이 고현성과 손차희는 입장권 부담을 나눴다. 자유 이용권이 제법 비싸서 모두를 전상철네 조에 부담 지우긴 힘들다.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봤다.
그들 여덟 명은 게이트에서 직원에게 티켓을 보여주고 놀이공원에 입장했다.
일단 실험 리포트부터.
강우의 눈앞에 실험실 레일과 비슷하게 생긴, 크기를 확 키운 놀이기구가 보였다.
“흠, 은하열차 888…….”
“이름이 이상하잖아? 은하철도 999는 들어봤어도 888은 또 뭐야?”
강우와 최대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고현성은 열심히 두 사람씩 조를 맞추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차희 씨스더는 나랑 타고…….”
“내가 너랑 왜 타? 기다려봐. 숙제부터 해야지.”
손차희가 윤수아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놀이공원 브로셔를 잔뜩 들고 돌아왔다.
“이게 있어야 리포트를 쓰지.”
윤수아가 브로셔를 펴고 은하열차 888을 설명했다.
“길이가 888미터라서 888이래. 최고높이 32m, 최고 속도 85km/h, 주행시간 3분…….”
순식간에 강우의 머릿속에서 저 숫자들이 재조합됐다. 높이 32m에서 자유 낙하하면 이론적인 최고 속도는 초속…… 25m/s, 시속 90km/h이다. 32미터 높이에서 미끄럼틀처럼 내려올 때 최단 시간은 사이클로이드 곡선을 따르니까 이상적인 레일 형상은…….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은하열차 888은 탑승객이 최고의 스릴을 만끽할 수 있도록 수직으로 세운 커다란 원형 레일을 두 개 구성해서 회전한다. 중간에 터널을 넣어 속도감을 높인 구성은 덤이다. 곳곳에 과학원리를 적용한 흔적이 보인다.
굳이 강우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이들도 똑똑한 과학고 학생이라 금방 그 원리를 파악했다. 실험실에서 쇠공이 굴러가던 레일과 눈앞의 롤러코스터의 레일이 겹쳐 보였다.
머릿속으로 열심히 새로운 롤러코스터를 구상하고 있자니 마치 과학자가 된 기분이다.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멋진 놀이기구를 만들면 그것 또한 괜찮은 과학자의 삶일 것이다.
“자, 이제 타러 가자!”
손차희가 윤수아의 손을 잡고 탑승 위치로 향했다.
저절로 짝이 맞춰졌다. 손차희는 윤수아와 나란히 가장 먼저 탔고 고현성은 무안하게도 전상철과 같이 타야 했다. 당연히 강우는 최대우와 함께다.
“어? 너 왜 그래?”
최대우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모습으로 자꾸 도망치려 한다.
“네 몸무게 정도로는 안 무너지거든.”
강우는 별일 아니란 듯 녀석을 끌고 열차에 올랐다.
안전바가 내려오고 강우는 바를 잡은 채 정면을 바라봤다. 하필이면 바로 앞자리가 고현성이다. 그 앞에 손차희가 있으리라고 보지 않고도 짐작했다.
그르릉-
환호성과 함께 열차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높이가 32m라고? 제법 높다. 곧 자유낙하의 스릴을 경험할 수 있다.
열차가 레일의 정상에 멈췄다. 바람이 귀를 스치며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시작한다는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높은 곳에 오르면 기분이 좋다.
“대우야? 어때?”
“으으.”
“왜 그래? 고소공포증 있어?”
그래 봐야 얼마 높지도 않은데 어째 이 녀석 분위기가 이상하다. 이 열차는 튼튼해서 웬만하면 무너지거나 부서지지 않을 텐데?
그르릉-
열차가 고점을 넘으면서 갑자기 속도가 빨라졌다.
“야아호!”
앞에서 손차희와 윤수아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 순간 최대우의 비명이 그의 귀를 때렸다.
“으아아악!”
“어?”
녀석이 하얗게 질려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제야 강우는 최대우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놀이기구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런데 이상했다. 최대우는 비명을 지르지 않고 떨고만 있는데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악!”
비명의 주인공을 찾아낸 강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바로 앞에 앉은 고현성이 죽어라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목소리가 너무 우렁차서 장난치나 싶었는데 온몸을 부들거리며 달달 떠는 모습을 보니 진짜였다. 놀이공원에 가자고 제일 먼저 주장했던 녀석이 무서워서 이 모양이라니.
열차가 뒤집혀 원을 그리고 높은 꼭대기에 다다랐다. 거의 속도가 멈추는 순간 다시 그의 옆과 앞에서 비명이 터졌다.
“으아악!”
“이거 안 무너진대도. 설계도 잘 되어 있고!”
최대우는 지금 강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다시 아래로 낙하하면서 속도가 붙었다. 이제는 비명이 앞과 옆에서 화음을 이룬다.
그 와중에 손차희와 윤수아의 신난 목소리도 들렸다.
“달려라! 달려!”
그녀들의 외침을 들었을까. 열차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다시 한 바퀴 큰 원을 그리고 터널을 쏜살같이 통과한 다음 서서히 열차가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불과 1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열차가 다시 플랫폼으로 돌아와 제자리에 멈췄다.
안전바가 올라가고 강우는 옆의 최대우를 확인했다.
하얗게 질린 안색이 마치 귀신을 보고 놀란 모습 같다. 덩치랑 어울리지 않는 그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대우야, 다 왔다.”
녀석이 여전히 부들부들 떠느라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른다.
강우는 녀석의 손을 잡고 간신히 진정시켰다.
열차에서 내리면서 고현성을 보니 이 녀석은 상태가 더욱 심해서 거의 제정신이 아니다. 녀석을 붙잡고 내리느라 옆에 앉은 전상철이 생고생 중이었다.
그 앞에는 그들을 동물원 동물 보듯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손차희가 있었다.
“놀이공원 가자는 말을 누가 먼저 꺼냈더라?”
모두의 손가락이 고현성을 가리켰다.
고현성은 헉헉대며 말을 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이, 이럴 줄은 몰랐지.”
놀이기구를 처음 타본 녀석이다. 시골 촌놈도 아니면서.
손차희의 한숨이 더욱 짙어졌다.
“으으으.”
최대우와 고현성이 서로 동지를 만난 듯 붙잡고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손차희가 다음 일정을 물었다.
“우리는 바이킹 타러 갈 건데, 탈 거야? 말 거야?”
“타, 타야지! 우리 씨스더 옆에!”
“그럼 따라와!”
인상을 확 일그러트린 손차희가 앞장섰다.
강우는 최대우를 부축하면서 뒤를 따라갔다. 고현성 저 녀석은 놀이기구도 못 타면서 왜 가자고 했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괜히 놀이공원에 와서 오히려 점수를 확 깎아 먹은 듯한데?
바이킹에서 손차희가 앉은 자리는 가장 무섭다는 뱃머리였다.
바이킹이 왔다 갔다 속도를 높이는 순간 다시 최대우와 고현성의 비명이 터졌다.
쭉 일렬로 앉는 바람에 강우의 옆에는 좌청룡 우백호처럼 최대우와 고현성이 나란히 앉았다.
덕분에 두 사람의 비명이 양쪽에서 스테레오로 들렸다. 이 순간 강우는 놀이공원에 온 것을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