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롤러코스터 (2)
“넌 저쪽!”
손차희가 고현성을 노려보며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
풀이 죽은 고현성은 한 마디도 못하고 옆 테이블에 앉았다. 좁은 좌석을 핑계로 두 조는 정확하게 나누어졌다.
강우의 앞에는 음료수와 햄버거가 놓였다.
그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메뉴이지만 국밥을 구하기 어려운 이곳에서는 차마 다른 것으로 바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늘따라 손차희의 눈초리가 더욱 매서웠다. 생각해보니 고현성이 옆에 있으면 꼭 저런 표정이다.
고현성네 조를 옆 테이블로 완벽하게 쫓아낸 손차희가 감자튀김을 늘어놓고 미소를 머금었다.
“자, 우리도 먹자!”
배가 불러야 더 재밌게 놀 수 있다.
다행히 최대우는 먹을 것을 앞에 둔 후부터 제정신이 돌아왔다.
“자, 리포트 쓸 내용 생각해봤어?”
손차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과연 손차희다. 롤러코스터와 바이킹을 타는 그 어지러운 순간에도 리포트를 챙기고 있었다니!
“속도를 재보진 않았지만 이론 속도가 90km/h인데 실제 최고 속도가 85km/h이면 나머지는 마찰 손실이라 봐야겠지?”
윤수아가 제법 그럴듯하게 분석을 시도했다.
“그럼 바이킹은?”
“바이킹은 구조물 최고높이가 19.6m이고 스윙 최고 속도는 15.7m/s라는데?”
브로셔를 뒤져 윤수아가 바이킹의 재원을 찾아냈다.
최대우가 금방 계산했다.
“진자운동이라고 가정하면 이론적인 최대 속도는 19.6m/s야.”
또 19.6이란 숫자가 나왔다. 중력 가속도 9.8 때문이다.
바이킹은 이론 최고 속도와 실제 최고 속도 사이에 차이가 제법 난다. 육중한 배의 길이와 배의 하부에서 가속과 감속하는 시스템 영향이다.
“왕복 시간은 8.27초라는데?”
“단진자의 주기를 이론적으로 계산하면 8.8초…… 이것도 오차가 크네.”
“그건 최고높이를 단진자의 길이에 대입해서 그럴 거야.”
단순히 놀이기구를 타는 것도 재미있지만 이런 식으로 과학 이론을 대입해서 해법을 찾는 것도 재밌다.
“더 무서운 바이킹을 만들려면 배를 더 높이 올려야 하니까…… 결국 중앙 지지대를 더 크게 만들어야 해.”
“은하열차도 마찬가지야. 더 높은 곳에서 시작해야지. 그럼 레일 길이도 888m가 아닌 999m가 될 수 있을 건데. 나라면 1km 채웠어.”
이런저런 의견이 오갔다.
열심히 떠들던 그들의 시선이 힘이 빠진 최대우에게 모였다.
“근데 대우는 상태가 왜 이래?”
“난 열차도 바이킹도 도저히 못 타겠어. 특히 바이킹이 내려갈 땐…….”
“그건 중력이 사라져서지.”
손차희가 바로 이유를 설명했다.
자유낙하 순간에는 무중력을 경험하게 되니까. 바이킹이 완벽한 자유낙하는 아니지만 비슷한 환경이 만들어진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때 윤수아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 강우야. 영화를 보면 우주인들 말이야. 로켓 발사될 때 엄청난 압력을 견디는 장면이 나오잖아?”
“응, 그것도 중력 때문이지. 따지고 보면 바이킹이랑 비슷하긴 한데…….”
강우는 설명을 시작했다.
사실상 힘은 가속도다. 물리학에서 보자면 대부분 물체는 질량을 갖고 있고 질량과 가속도의 곱이 바로 힘이니까.
관성의 법칙을 발견한 갈릴레이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큰 차이는 속도와 가속도의 구분에서 발생했다.
“땅을 딛고 선 우리에게는 항상 중력이라는 힘이 아래로 작용해. 이 중력의 크기를 1g라고 표시하면…….”
자유낙하하는 물체는 아래로 1g의 가속도가 작용한다. 반대로 로켓을 타고 올라갈 때는 같은 가속도라면 위로 1g의 가속도가 가해진다.
차가 비포장도로를 심하게 요동치며 달리면 순간적으로 1g의 가속도가 위나 아래로 걸린다. 이 요동이 심해지면 사람은 견디기 어렵다.
로켓을 타고 대기권을 탈출할 때는 대략 5g의 가속도가 걸린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최악의 환경은 대략 10g라고 알려져 있다. 영화에서 흔히 보는 장면은 이런 가속도가 걸린 상태를 상정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 우주비행사들은 어떻게 훈련하지?”
미국과 러시아, 중국 등에는 우주비행사 훈련 센터를 운영한다. 다만 중력은 지구 전체에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치기에 중력이 없는 환경을 만들기는 어렵다.
무중력 상태는 물을 이용한다. 물속에서는 부력이 작용해서 중력을 일부 상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켓 발사 때처럼 중력이 더 가해진 환경은 원운동 기구를 이용한다. 원운동을 하면 구심력이 작용해서 탑승자는 강하게 밖으로 튕겨 나가려는 힘을 느끼니까. 빨리 회전할수록 이 힘이 강해지므로 대기권 탈출 시와 비슷한 훈련 환경을 만들 수 있다.
고개를 끄덕이던 손차희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자! 말이 나온 김에 또 타러 가야지?”
“응?”
“오다 보니 빙빙 도는 놀이기구가 제법 많았어!”
“으악!”
최대우가 비명을 터트리며 격렬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손차희와 윤수아만 열심히 놀이기구를 탔다.
강우는 간신히 회전목마를 타는 최대우를 옆에서 보살펴야 했다. 그런 최대우 옆에서 똑같이 좋아하는 녀석이 있었다. 바로 고현성이다.
* * *
기숙사 휴게실.
놀이공원에서 돌아온 고곽천재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휴게실에서 마지막 마무리를 했다.
그들은 손차희의 주도하에 실험 리포트를 정리했다.
그사이 강우는 손차희와 윤수아가 열심히 롤러코스터를 타는 사진을 차도도에게 보냈다.
곧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 차도도 쌤 : 강우야, 어디야?
- 강우 : 기숙사요. 서울랜드 다녀왔어요.
- 차도도 쌤 : 거긴 왜? 고곽천재 전부가 갔어?
- 강우 : 네. 실험 리포트 쓰려고요.
- 차도도 쌤 : 뭔 리포트를 놀이공원에서 써?
- 강우 : 시지프스인가 뭔가 하는 실험 때문에요.
- 차도도 쌤 : 부러워라. 나도 데려가지.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차도도의 얼굴이 그려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가시자고 말이라도 해볼 걸 그랬다. 그러면 맛있는 거라도 사줬을 텐데. 왠지 후회가 일었다.
- 강우 : 쌤, 놀이공원 안 가봤죠?
- 차도도 쌤 : 그럴 리가. 나 많이 가봤어.
- 강우 : 누구랑요?
- 차도도 쌤 : 누구긴. 남친이지.
- 강우 : 에이, 한 번도 못 가봤구나.
- 강우 : 다음에 저랑 놀이공원 한번 가요.
- 차도도 쌤 : 오늘 재밌었나 보네. 그래, 시간 나면 가자.
- 강우 : 놀이기구 잘 타세요?
- 차도도 쌤 : 프로지. ㅋㅋㅋ.
- 강우 : 기대하겠음.
- 차도도 쌤 : 파이팅(이모티콘).
차도도는 손차희처럼 놀이기구 앞에서 용감할까 아니면 최대우처럼 무서워할까? 그 답이 무척 알고 싶어졌다.
대충 결과를 정리한 그들이 강우에게 마지막 문제를 내밀었다.
과학원리를 적용한 놀이기구 구상.
웬만한 놀이기구는 이미 다 만들어져 있어서 딱히 특별한 것이 생각나지 않는다.
“강우야, 생각해봤어?”
있을 리가 있나. 강우는 바로 고개를 저었고 모두가 실망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강우의 시선이 최대우에게 옮겨졌다.
최대우는 노트북을 들고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대우야, 넌 뭐하니?”
“아! 오늘 사진 찍은 거 올리는 중.”
“어디에?”
“물리 문제풀이 센터. 놀이공원의 과학이라는 특집으로 과학원리 설명을 붙여서 올리려고.”
블로그에서 문제풀이 외에 간략한 과학 개념 게시물도 올려 왔기에 놀이공원이란 주제는 블로그에 싣기에 아주 적합했다.
특히 이런 주제는 학생들의 흥미를 끌기 만점이다.
“대우야, 리포트부터 먼저 끝내고…….”
다시 고곽천재의 머리가 모였다.
마치 브레인스토밍을 하듯이 각자가 아이디어를 던졌다.
“위치에너지를 이용하려면 낙하운동이 필수겠지?”
“360도 도는 바이킹은 어때?”
“360도 회전하면서 전진하는 롤러코스터는?”
“그냥 줄 끊어진 엘리베이터처럼 위에서 자유 낙하시키자.”
제시된 의견을 이용해서 그럴듯하게 그림을 그렸다. 놀랍게도 별별 놀이기구가 구상되었다. 이미 존재하는 것도 있었지만 이 모든 게 순수한 상상력의 결과였다.
강우는 이처럼 창의력을 발휘하는 학생들이 반가웠다. 이런 창조성이야말로 과학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 과연 과학고 학생답게 그들의 상상력에는 끝이 없었다.
그냥 툭툭 던져도 이론적인 기반을 갖추고 있기에 조금만 다듬으면 현실성이 높아졌다.
제시한 아이디어를 복합하자 흥미로운 형태의 놀이기구가 만들어졌다.
이것만으로도 이번 실험 리포트는 성공이라 할만했다.
* * *
수요일 오후.
다시 과제연구 시간이 됐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고곽천재는 세미나실에 모여 별도의 시간을 보냈다.
학생들은 지정한 지도교사 강의실에 모여 주제를 정하거나 간략한 이론 수업을 들었다. 지난 학기에 강우는 이 시간을 김선호 선생님과 함께했고 주로 천문대에서 보냈다.
천문대에 가는 시간이 줄어 아쉬웠으나 고속전철 위탁연구를 수행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는 차도도도 함께여야 했지만 그녀가 맡은 지도 학생이 그들만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세계 각국의 고속전철 자료를 뽑아왔어.”
고속전철의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의 ICE와 프랑스의 TGV, 일본의 신칸센 등에 대한 자료였다. 한국의 KTX와 SRT는 그 원형이 프랑스의 TGV다.
다양한 자료를 분류해서 정리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린다. 이 자료에서 필요한 부분은 저항을 줄이기 위해 각 열차에서 채택한 방법이다.
“할 일이 생각보다 많네.”
“돈을 받으니까.”
강우가 씨익 웃었다.
그들은 이 연구수행 대가로 한 사람당 대략 한 달에 100만 원 정도를 받는다. 기껏 수요일 오후를 투자하는 정도로 받는 돈이 그 정도였다. 마침 이번 주에 과제연구비가 차도도에게 지급됐고 차도도는 이를 각자의 통장에 나누어 넣어주었다.
덕분에 그들 모두는 당당하게 월급을 받는 연구원이 됐다. 보통 고등학생들과는 조금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우리 부모님도 깜짝 놀라셨어.”
“난 어머니께 선물해드렸다!”
손차희와 윤수아의 말에 강우와 최대우는 반성했다. 선물은커녕 돈을 벌게 되었다고 집에 알리지도 않았으니까.
강우는 즐거워하는 친구들을 보며 마음이 뿌듯해졌다. 앞으로 그는 이런 연구 활동 비중을 더욱 늘릴 생각이다. 동조하는 친구들은 함께 하고 아닌 친구들은 어쩔 수 없다.
내신이나 수능으로 진학할 학생이라면 굳이 연구에 뛰어들 이유가 없지만, 자기소개서를 이용한 수시입학이나 외국 유학을 노린다면 학교 내신만큼이나 이런 연구 활동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이 고속전철 자료를 분류하고 있을 때 차도도에게서 전화가 왔다.
“강우야, 교무실 선생님 책상에서 노트북 좀 갖다줄래? 선생님 지금 물리실험실에 있어.”
담임 선생님 심부름이니 어쩔 수 없었다.
차도도는 오늘 김윤택이 출장을 간 관계로 물리 과제연구 학생들을 모아서 수업을 한다고 했었다.
“다녀올게.”
강우가 일어서자 최대우도 따라서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갈까?”
그걸 왜 물어? 당연히 실이 가면 바늘도 가야지.
강우는 최대우와 함께 교무실에서 차도도의 노트북을 챙겼다.
문득 차도도의 노트북이 궁금해졌다. 이 노트북의 바탕화면은 뭘까? 노트북 바탕화면 때문에 한바탕 곤욕을 치렀던 그였기에 궁금증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