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이론물리부 (1)
최대우와 함께 물리실험실에 도착한 강우는 실험실을 채운 학생들을 만났다.
물리를 과제연구로 선택한 학생 가운데 김윤택과 차도도 밑에서 지도받는 학생이 의외로 많았다. 특히 김윤택의 아래에는 뛰어난 학생들이 많기에 여기 모인 학생의 수준 또한 평균 이상이었다.
학생들의 면면을 보며 강우는 이들 상당수가 이론물리부 학생임을 눈치챘다. 물리와 관련된 동아리는 체험학습 동아리인 물리실험반과 자율 동아리인 이론물리부가 있다. 사실상 둘은 활동에서 차이가 없으나 교육 행정상의 문제로 구분되어 있을 뿐이다.
안면이 익숙한 학생 가운데 그나마 그의 눈길을 끄는 학생은 이민찬이 유일했다. 이민찬은 김윤택과 과제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가져왔는데요?”
복잡한 수식을 쓴 칠판 앞에서 차도도가 열심히 설명 중이었다.
“연결 좀 해줄래?”
강우는 최대우와 함께 노트북과 프로젝션을 연결했다. 스크린에 노트북 화면이 떴다.
윈도 기본 바탕화면.
차도도의 노트북은 기대와 달리 별것 없었다.
연결이 완료된 후 차도도가 자료를 보여주려고 노트북을 만지는 순간이었다.
한 학생이 손을 들며 벌떡 일어섰다.
“혹시 지금 온 학생이 그 유명한 강우입니까?”
그 유명한? 갑자기 호명된 강우는 얼떨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상대를 주시했다.
차도도가 작업을 멈추고 질문한 학생에게 물었다.
“강우 맞는데, 왜?”
“이래저래 유명해서요. 아직 1학년인데도 카이스트와 R&E를 한다는 소문도 있고요. 누군지 궁금했습니다.”
딱히 이상한 답변은 아니었지만, 강우는 묘하게 그 학생의 말이 거슬렸다. 그가 대답하려는 순간 차도도가 다시 나섰다.
“R&E를 하는 건 맞아. 카이스트 한태규 교수님이 먼저 제안하셨지. 물론 1학년은 R&E가 금지되어 있어서 행정상으로는 과제연구이지만.”
“아! 카이스트 교수님이랑 연줄이 있나 보네요. 어쩐지…….”
약간은 빈정대는 목소리다. 그나마 선생님 앞이라 저 정도에서 그쳤으리라.
차도도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그건 아냐. 그 교수님이 강우를 높이 평가해서 그런 거지.”
“높이요? 물리 올림피아드 국가대표인가요? 아니면 물리학회에 논문이라도 발표했나요? 단지 내신 시험에서 만점 받았을 뿐인데…….”
내신 시험 만점도 지난 학기에는 1학년에서 강우밖에 없었으니 헐뜯을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차도도는 질문한 학생의 의도를 명확하게 눈치챘다.
“그 교수님의 높은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니? 그 교수님이 강우를 콕 찍어서 위탁연구 파트너로 지목했으니까 우리가 상관할 일은 아니야.”
논란이 되어봐야 좋을 일이 없기에 차도도는 두루뭉술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정작 강우는 상대를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욕을 먹을 이유가 없는 데다 차도도까지 돌려 까고 있었으니.
“제가 강우입니다만 그쪽은 누구시죠?”
“나? 2학년 김창식. 현재 2학년 이론물리부 부장을 맡고 있지.”
“아, 선배님이군요.”
강우는 상대를 노려봤다.
김창식의 머리 위에 숫자가 떴다.
- 김창식, 수학 A, 물리 A, 화학 B, 생물 C, 지구과학 C.
대충 수학과 물리에 특화된 녀석이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천재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다. 잘해야 손차희 정도나 될까.
옆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리 국가대표 나섰네.”
“물리 국제 올림피아드 금메달인데…….”
지금 2학년이고 지난여름에 국제 올림피아드에 나가서 금상을 받았다는 뜻이다. 어찌 되었건 물리에서는 한가락 하는 학생이다.
최대우가 물리에서 S등급이니 이 자식은 최대우보다도 잠재력이 떨어진다. 같은 2학년인 권유성이 오히려 물리에서 더 낫다. 다만 권유성은 물리가 아닌 수학 올림피아드에 매진하고 있어서 물리에서는 그리 유명하지 않았다.
어쩌면 김창식은 그 틈새를 잘 공략했다고 볼 수 있었다. 아니면 과도한 사교육으로 재능 이상의 성과를 거뒀거나.
굳이 상대를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녀석의 태도를 보니 존중해주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났다.
“흠, 그래서 뭐가 그렇게 궁금하신가요? 전 한태규 교수님과 전혀 연줄이 없습니다만.”
“그것참 이상한데? 연줄도 없이 왜 너를 지명했을까? 실력도 의문인데……. 설마 차도도 선생님께서 추천하셨어요?”
김창식이 차도도를 약간 삐뚜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강우는 상대가 차도도를 걸고넘어지자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어디에서부터 녀석의 버릇을 고쳐줄까.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그 말은…… 제 실력을 의심한다는 뜻이죠?”
“의심하고 말고 할 게 없잖아. 내신이야 범위가 좁으니까 그럭저럭하면 되고 올림피아드 실적 있어?”
강우는 수학 올림피아드는 신청했다가 시험을 치지 않았고 물리 올림피아드는 아예 시험 접수를 하지 않았다.
당연히 답변이 궁색해졌다. 그 순간 최대우가 끼어들었다.
“난 있는데?”
“넌 누구지?”
“최대우. 이번에 카이스트 위탁연구 같이하거든요.”
“아하!”
김창식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우는 지난 교내 경시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기에 물리에 관심 있는 학생이라면 모를 수 없다.
“넌, 꽤 하는구나? 그때 내가 최우수상 받았었는데.”
국제 올림피아드에서 금상을 받은 학생이라면 교내 경시 최우수상이 그리 놀랍지 않다. 국가대표로 발탁될 때까지 경시대회 문제를 열심히 풀어봤을 테니까.
“아, 그때 최우수상이셨나 봐요?”
“그래, 바로 나지. 근데 넌 나보다 못하면서 어떻게 카이스트와 위탁연구를 해?”
비교 접점이 없는 강우와 달리 같은 시험을 치른 최대우를 김창식이 살쾡이처럼 물고 늘어졌다.
최대우도 할 말이 사라져 버벅댔다.
“요즘 네가 운영하는 물리센터인가 뭔가 하는 블로그가 화제던데 그렇게 중학생들 문제나 풀어주고 그래서는 제대로 물리를 공부할 수 없지. 그런 쓸모없는 일로 시간 낭비하면 안 돼.”
“그건 쓸모없는 일이 아닙니다.”
“과연 그럴까? 너도 국내 올림피아드 시험 쳤지?”
“1차 통과했습니다.”
“크크, 1차도 통과 못 하는 바보도 있나? 하지만 최종은 쉽지 않아. 그 전에 여름학교, 겨울학교에서 떨어질지도 모르지. 네가 풀어주는 그런 문제와 질적으로 다르니까. 너도 국가대표가 되고 싶으면 일찌감치 방향을 바꾸는 게 좋아.”
최대우는 얼굴이 벌게져서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버벅대는 최대우를 안정시킨 강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호오, 그러시군요. 저는 반대로 물리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의 실력이 궁금합니다만.”
선을 넘은 녀석을 강우는 용서할 마음이 사라졌다. 이제 외나무다리 위에 섰으니 둘 중에 누군가는 피를 봐야 한다.
호전적인 강우의 대응에 김창식이 발끈했다.
순간 옆에 있는 학생이 김창식을 말렸다.
“창식아, 수학연구반 이야기 못 들었어? 괜히 덤볐다가 코 깨졌다던데?”
“그건 그 자식들이 멍청해서 그렇지.”
“일현이도 수긍한 실력자라잖아!”
“그건 수학일 뿐이야. 물리는 다르지.”
김창식의 자신감이 넘쳤다.
수학과 물리에 동시에 재주가 있는 과학고 학생은 많다. 하지만 그 둘을 동시에 도전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하나에 집중해야 올림피아드에서 수상하기 유리하기 때문이다. 둘을 모두 하기엔 어느 하나도 녹록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강우가 수학 경시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으니 물리에서 이룬 성과는 별것 아닐 가능성이 컸다. 만일 물리를 더 잘한다면 애초에 경시대회에 물리로 출전했으리라고 생각했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김창식의 자신감이 확 늘었다.
“자신 있다면 물리를 얼마나 하는지 확인해 봐도 되나?”
당연히 강우는 마다할 생각이 없다. 일단 그는 차도도의 눈치를 살폈다. 차도도의 우려 섞인 눈빛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서서 말리지는 않는다.
강우는 그녀에게 한심하라는 듯한 눈짓을 보낸 후 다시 김창식에게 집중했다.
“좋죠. 바라던 바입니다. 저도 금메달리스트의 실력이 궁금하던 차였거든요.”
선배를 향한 후배의 반격에 김창식이 주먹을 꾹 쥐었다. 자신감 넘치는 강우의 태도에 살짝 주눅이 들었으나 이미 기호지세다. 여기에서 물러나면 금메달리스트의 체면이 손상된다.
“좋아. 그럼 어떻게 승부를 겨룰까?”
김창식이 강우를 노려보는 사이 차도도가 끼어들었다.
“선생님 입장에선 학생들이 다투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두 사람이 굳이 겨뤄야겠다면 예전 한국대에서 출제했던 물리 논술 문제로 승부를 보면 어떨까 생각해요.”
마침 한국대 물리 논술 문제로 수업을 진행하던 차였기에 학생들은 차도도의 제안을 반겼다.
강우는 제안을 수락하면서 덧붙였다.
“우리 두 사람뿐 아니라 대우도 포함했으면 합니다. 대우도 위탁연구 당사자니까요. 애초에 위탁연구를 맡은 학생들이 탐탁지 않다고 시비를 걸어온 것이잖아요.”
정작 당사자인 최대우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강우는 빙그레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가 판단하는 최대우는 이제 김창식에 버금가는 능력을 지녔을 테니까. 잠재
력 면에서도 S와 A로 차이가 나는 데다 최근까지 최대우는 블로그 때문에 별의별 문제를 다 다뤄봤었다. 절대 쉽게 밀리지 않으리라고 자신했다.
강우는 차도도가 논술 문제를 제안한 이유를 헤아렸다.
내신 문제로 실력을 겨룰 수는 없으니 경시대회 문제로 하는 편이 변별력이 있었다. 이 경우 많은 경시 문제를 다뤄본 김창식이 훨씬 유리할 것이다. 상대가 강우가 아니었다면.
“그럼 이쪽에도 한 사람이 붙어야 하는데…….”
“제가 하겠습니다.”
김창식 옆에 있던 학생이 자원했다. 안경을 끼고 키가 작지만 또렷또렷하게 생긴 짱구 이미지의 학생이다.
“아! 그럼 박호재 학생도 같이 해봐요. 박호재 학생은 국제 물리 올림피아드에서 동상을 탔었지?”
“예, 그렇습니다. 올림피아드 수상자의 명예, 아니 이론물리부의 명예를 걸죠.”
강우는 박호재의 머리 위를 쳐다봤다.
- 박호재, 수학 B, 물리 A, 화학 C, 생물 C, 지구과학 B.
김창식과 거의 다르지 않다. 아마 김창식과 박호재는 같은 학원에 다니면서 함께 올림피아드를 준비한 사이일 것이다.
강우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박호재의 참전을 수락했다.
실험실 내부에 전운이 감돌았다.
김창식과 박호재는 사실상 이론물리부의 에이스다. 2학년 가운데 가장 물리에 재능을 보이고 있기도 하고 김윤택의 소개로 한국대와 R&E를 수행하고 있는 유망주다.
덕분에 이 대결은 2학년과 1학년 물리 우수자의 대항전처럼 되어버렸다. 또 물리연구반과 비물리연구반의 경합이기도 했다.
사실 강우와 최대우는 전혀 부담이 없다. 반면 김창식과 박호재는 2학년이고, 그들의 장기인 물리로 겨룬다는 점에서 부담이 크다.
그런데도 무리하게 싸움을 건 이유는 최근 들어 강우의 명성이 높아진 탓이다. 강우가 내신에서 만점을 받은 데다 수학여행 때 놀라운 강연을 했고 여기에 물리로 프로젝트까지 하니 한 번쯤 그 기세를 꺾어줄 필요가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김창식은 진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방식은 어떻게 할까?”
차도도가 양쪽에 의견을 물었다.
“시험을 칠 수도 없으니…… 스피드 게임으로 하죠.”
김창식이 호기롭게 말했다. 빨리 대답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물론 한국대 물리 논술문제라면 난도가 굉장히 높아서 어쩌면 스피드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한국대 구술시험 고사장에서는 15분의 사전 준비 시간을 주거나, 필답시험에서는 30분에 1문제를 풀게 하니까.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강우는 상대를 노려보며 시선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