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이론물리부 (2)
노트북에 예전에 정리해둔 관련 문제를 찾아낸 차도도가 모두에게 설명했다.
강우, 최대우, 김창식, 박호재. 네 사람은 가장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최근 출제 문제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아마 풀어봤을 거야. 아! 1학년은 아직 이른가? 창식이는 어디까지 풀어봤지?”
“최근 3년 것까진 다 풀어봤습니다. 호재도 비슷하고요.”
“너희는?”
“저는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요?”
최대우의 대답에 주위 학생들의 웃음이 터졌다. 아직 1학년이라 입시 논술에 신경 쓸 단계가 아니었기에 당연했다. 여기 있는 2학년도 1학년 때는 마찬가지였으니까.
물론 강우는 달랐다.
가장 최근 2년의 문제는 그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전은 손강우가 한국대 물리학과 대학원에 있을 때다. 당연히 물리 논술문제를 관심 있게 봤다. 물론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렇다고 풀어본 문제라고 털어놓을 수는 없다. 어차피 버릇없는 이놈들을 정직하게 상대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고심하던 차도도가 결론을 내렸다.
“그럼 공평성을 위해 아무도 공부하지 않았을 문제, 즉 오래된 문제로 할게. 대략 10년 전 한국대 논술 고사와 구술시험에 출제된 물리 문제로 해서…… 모두 5문제를 풀까? 어때?”
“상관없습니다.”
양쪽 팀에서 동시에 대답했다. 그만큼 상대방을 얕보고 있어서 작은 규칙에 연연하지 않았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다른 학생들도 같이 풀어보세요. 문제 수준이 높고 질도 꽤 좋거든요. 공부가 많이 될 거예요.”
차도도가 노트북에 문제를 띄웠다.
노트북 화면에 뜬 문제가 스크린에 동시에 떴다.
강우를 비롯한 네 사람은 재빨리 문제를 읽었다. 역시 문제는 만만치 않다. 스피드 게임이라고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답을 구하려면 어차피 시간이 꽤 걸린다.
관전 학생들도 스스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덕분에 실험실 내부는 적막이 감돌았다.
강우는 문제를 읽으면서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 풍력발전기는 바람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풍력발전기를 단순화한 모델에서 운동에너지 식, 일률 식, 발전기의 효율 식을 주고 효율의 최댓값과 속도비를 구하는 문제다. 또 속력의 분포를 나타내는 확률밀도함수를 이용하여 일률의 평균값을 계산해야 한다.
예전에 본 기억이 있다. 풀이과정이나 해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금 강우는 곧장 앞으로 나가서 단번에 이 문제를 완벽하게 풀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두 5문제니 첫 문제는 충분히 양보할 수 있다. 물론 최대우에게.
강우는 최대우를 확인했다. 이런 유형의 논술 문제를 처음 접했는지 꽤 당황한 눈치다. 그러기도 잠깐 최대우는 열심히 백지를 놓고 연필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풀이가 막혔는지 고개를 까닥이며 연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강우는 건너편 선배 두 사람의 동정도 살폈다. 둘 다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 스크린을 쳐다보면서 뭔가를 끄적였다.
풀지 않고 놀고 있는 학생은 강우뿐이었다.
그에게 차도도의 시선이 꽂혔다.
강우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눈빛을 보냈다. 못 말리겠다는 듯 차도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강우는 최대우가 먼저 풀기를 기다렸다.
일단 논술 유형에 최대우가 적응할 시간을 줘야 한다. 안타깝게도 최대우가 미처 풀기 전에 김창식이 벌떡 일어났다.
“다 풀었습니다만.”
“답 나왔어?”
“답은 아직인데 풀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면 앞으로 나와서 설명해봐.”
일종의 구술시험 형태다. 구술시험에서는 주어진 문제를 보고 심사위원 앞에서 풀어야 한다.
지금은 학생 앞이다. 이 과정에서 관전 학생들도 연습할 수 있기에 오늘 대결은 공부하기 좋다.
김창식이 마카를 들고 화이트보드에 수식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논술 문제는 해답의 절반이 지문에 있습니다. 지문을 잘 읽어보면…….”
그는 지문에 나온 수식을 먼저 나열한 다음 중간에 생략된 수식을 전개했다. 이어서 기본적인 물리법칙을 표현한 수식을 대입하고 치환한 다음 각 항을 미분했다.
그가 수식을 전개하면서 설명을 계속하자 칠판이 한가득 수식으로 가득 찼다.
후반부에서는 확률밀도함수를 적분하고 정의에 대입하여 요구하는 답을 구해냈다.
“이 과정을 거쳐 다음과 같이 발전기 일률의 평균값이 구해졌습니다.”
김창식이 구한 풀이과정은 완벽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금방 그 풀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주어진 문제가 쉽지 않아 한참 쳐다보면서 수식을 확인하기 바빴다.
학생들의 반응을 기다리다 못한 김창식이 차도도에게 물었다.
“어때요? 선생님?”
“맞게 풀었어.”
김창식과 박호재가 주먹을 쥐고 환호성을 터트렸다. 이론물리부 소속 학생들도 호응했다.
“역시 2학년이 질 리가 없지.”
“1학년이 2학년보다 낫다는 소문은 와전된 거야.”
“국가대표는 역시 달라.”
긴장했던 학생들은 김창식과 박호재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첫 대결에서 강우와 최대우보다 김창식이 월등히 빠르고 정확하게 풀었다. 비록 강우가 내신 시험에서, 최대우가 경시에서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지만 아직은 풋내기일 뿐이라고 쑥덕였다.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최대우가 강우를 돌아봤다.
강우는 빙그레 웃으며 여유로운 표정을 보냈다. 실제로 강우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이런 문제와 테스트 방식이라면 언제든지 뒤집을 수 있으니까.
“첫 문제는 2학년 팀이 이겼어. 계속할까?”
차도도는 두 번째 문제를 스크린에 띄웠다.
“자, 그럼 다음 문제. 이 문제도 모두 같이 풀어보세요.”
- 원자핵은 핵자로 불리는 양성자와…….
핵자 당 결합에너지 그래프가 띄워졌다. 여기에 기체의 흡수선 스펙트럼까지. 항성 내부에서 원자 핵융합 반응이 일어날 때 핵자 간 작용하는 전기력과 양성자의 평균 운동 속도 등의 수식이 주어지고 이를 이용해서 고전 물리 방법으로는 핵융합 반응이 일어날 수 없음을 증명하는 문제였다.
핵융합이라는 용어가 보이는 순간 강우는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전공 분야이자 그에게는 가장 기초적인 내용이다. 눈을 감아도 손을 쓰지 않아도 저 문제는 저절로 풀린다.
문제를 보자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다.
‘대우도 풀 수 있지 않을까?’
역시 최대우가 앞 문제보다 훨씬 집중해서 문제를 풀고 있었다. 천문학의 관심이 물리의 핵융합 반응으로 연결되었을 테니까.
이 문제는 전기력을 적분해서 구한,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의 관계를 이용해서 핵자의 유효거리를 구해야 한다.
강우의 머릿속에서 가장 효율적인 풀이과정이 쭉 펼쳐졌다.
김창식과 박호재는 한참 스크린을 노려보더니 백지에 수식을 풀기 시작했다.
‘대우가 더 빨리 풀어야 할 텐데…….’
강우는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문득 무언가 머리를 찌르는 기분이 든다. 강우가 슬쩍 시선을 돌리자 차도도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얼른 풀지 않고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거냐는 표정이다. 강우는 평소처럼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차도도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대충 상황을 보니 최대우와 김창식의 풀이 속도가 비슷한 듯했다.
옆을 힐끔 훔쳐본 최대우가 마음이 급했던지 벌떡 일어났다.
“풀었습니다.”
“답 나왔어?”
“답은 아직…….”
그때 김창식도 손을 들었다.
“저도 다 풀었는데요?”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풀었다. 하지만 최대우가 먼저 손을 들었기에 차도도는 최대우를 지명했다.
“먼저 대우가 나와서 풀어봐. 대우가 틀리면 창식이가 풀고.”
최대우가 풀이를 들고 앞으로 나갔다.
“하아! 이, 이 문제는 항성 내에서 에너지를 생성하는 핵융합 반응을 묻는 문제입니다. 야, 양성자는 플러스 전하를 띠고 있기에 서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서로 만나지 않으면 핵융합 반응이 일어날 수 없지요. 그래서…….”
그나마 처음에는 그럭저럭 설명한다 싶더니 뒤로 갈수록 엉망이었다.
학생들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김창식은 우습다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으구, 대우 저 자식, 발표는 영 엉망이네.’
따지고 보면 대우가 발표한 적이 거의 없다. 조에서 발표할 일이 생기면 대부분 손차희 선에서 처리했고 어려운 문제는 강우가 해결했으니까.
앞으로는 최대우에게도 기회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강우는 풀이에 집중했다. 전개는 틀리지 않았다. 이대로 특별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정답이 구해질 것이다.
버벅거리면서 간신히 최대우가 마지막까지 답을 구했다. 앉은 자리에서는 답까지 구하진 않았다고 했는데 문제없이 풀어냈다.
답을 확인한 차도도가 웃으며 선언했다.
“답이 맞아요. 최대우 학생이 풀었네요.”
학생들의 반응은 앞 문제처럼 열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김창식 팀이 아쉽다는 의견이 많았다. 거의 동시에 문제를 풀었고 최대우의 설명이 너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다음 문제에서는 김창식이 이길 거라고 믿는 분위기였다.
“자, 일대일. 지금까지 어때요? 여러분도 풀 수 있나요?”
차도도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대결도 대결이지만 그녀는 다른 학생도 신경 써야 했다.
학생들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끝나고 지금 푸는 문제들을 다시 공부하세요. 클래스룸에 문제를 올려놓을 테니까요.”
세 번째 문제가 떴다.
이번 문제는 페르마의 원리를 다뤘다. 페르마 원리는 한 마디로 ‘자연은 낭비를 싫어한다.’라고 요약한다. 이를 빛의 진행과 연결하면 스넬의 법칙이 유도된다.
좌표축에 점 P와 Q를 찍고 두 점 사이를 진행하는 최소시간을 식으로 구하여 스넬의 법칙을 증명한 후 이를 실생활에서 응용하는 문제다.
물리를 심도 있게 수학과 연계해서 공부했다면 한 번쯤 다뤄보았을 문제였고 역시나 이를 눈치챈 김창식이 바로 손을 들었다.
“제가 풀겠습니다.”
“답이 나왔어요?”
“아니요, 하지만 풀 수 있습니다.”
한발 늦게 손을 드는 바람에 바로 전 문제를 놓친 김창식이 이번에는 작정하고 일단 지르고 봤다.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차도도가 허락했다.
김창식은 칠판에 좌표축을 그리고 2사분면과 4사분면에 점 P, Q를 찍었다.
“두 점을 잇는 가장 가까운 거리는 직선이죠. x축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의 매질이 다를 때 빛이 P에서 Q로 진행한다면 직진성을 가진 빛은 매질 사이에서 굴절을 일으키게 됩니다.”
김창식이 P, O, Q 세 점을 잇는 직선을 그리고 수식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수식으로 표현한 후 시간이 최소가 되는 점, 즉 수식을 변수 x로 미분해서 0이 되는 식을 구하고 이를 각도로 변환하면 스넬의 법칙이 완성된다.
그 과정은 다소 복잡하지만, 원리대로 푼다면 그리 어렵지 않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아니면 급하게 서두른 탓일까. 김창식은 수식을 미분하는 지점에서 막혔다. 제곱근이 포함된 분수함수를 미분하려니 이상하게 수식이 꼬였다.
분명히 예전에 풀었을 때는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었다. 한번 당황하니 칠판 앞에서 해결이 되지 않았다. 급기야 미분 공식마저 가물가물했다.
“으으…….”
수식을 쓰던 김창식의 손이 멈췄다.
강우는 어느 지점에서 실수가 발생했는지 곧바로 눈치챘으나 일단은 기다렸다.
김창식이 땀을 뻘뻘 흘리다가 뒤로 돌아 박호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박호재는 급히 백지에 수식을 전개하면서 틀린 지점을 찾기 시작했다.
강우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제가 풀어볼까요?”
“자, 잠깐만!”
김창식이 열심히 수식을 쳐다봤지만 당황한 마음에 도무지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계속 신음을 터트리던 김창식이 어쩔 수 없이 마카를 놓고 뒤로 물러났다.
강우가 나섰다.
오늘 이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모두가 궁금해하는 실력자가 세 번째 문제에서 그 정체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