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조력자 (1)
2학기 들어서는 신새벽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다른 학생들처럼 수업 시간에 보는 것이 전부였다.
기말고사에서 강우의 화학 성적이 별로였기에 크게 들볶일 줄 알았는데 방학 덕분에 흐지부지됐다.
최근에는 하루 공부한 것마저 보고할 일이 없어서 화학과 사실상 담을 쌓았던 강우였다.
신새벽의 성격을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몸이 긴장한다.
상담실 앞에서 깊은숨을 쉰 강우는 마음을 잡고 노크했다.
“들어와.”
상담실 내부에는 신새벽 혼자 있었다. 그런데 그 풍경이 강우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커다란 상담실 테이블 위에는 각종 책과 논문 복사본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마치 대학교수 연구실을 보는 기분이었다.
상담실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강우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런데 신새벽은 전혀 그를 의식하지 않고 책장을 넘기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표정이 사뭇 심각했다.
강우는 감히 말을 걸지 못하고 그녀를 지켜봤다.
어깨 뒤로 웨이브 치며 넘어간 머리카락이 창으로 들어온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뽀얀 얼굴이 아름답게 빛났다.
‘신새벽도…… 여신 맞네.’
그녀에게는 차도도와 다른 매력이 물씬 풍긴다. 조금은 차가운 차도도와 달리 신새벽은 사람을 포근하고 즐겁게 하는 경향이 있다. 가끔 오버해서 그를 너무 구박해서 문제지. 물론 그것 또한 미움이 아니라 스승의 사랑이라 생각한다.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되면서 기분이 편안해진다. 역시 외모지상주의니 뭐니 해도 그녀의 얼굴과 자태가 즐거움을 준다는 점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강우는 그녀의 어깨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 나노물질이 바이오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
- 효소 촉매를 활용한 반응속도론
- 헬륨 원자 안정성의 양자화학적 고찰
펼쳐진 논문의 제목을 훑어보던 강우는 공통점을 깨달았다.
‘물리화학!’
지금 신새벽이 열심히 고민하는 논문들은 하나같이 물리화학의 연구과제였다.
물리화학은 물리와 화학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학문으로 19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화학의 한 분야였다. 즉 물리적 원리를 이용하여 화학계의 거동을 해석하는 학문이다.
신새벽의 관심사가 물리화학이었던가? 의외로 놀라웠다.
그가 알기로는 신새벽도 차도도처럼 학부만 졸업했다. 젊은 나이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학부에서는 저렇게 세부 전공을 나누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하는 걸까? 과학고라지만 학생들에게 가르칠 내용치곤 지나치게 전문적이다.
인상을 쓰다 펴던 신새벽이 뒤를 돌아봤다.
“아! 왔어?”
들어온 지가 언제인데? 게다가 들어오라고 대답까지 해놓고. 강우는 팍 인상을 쓰며 그녀를 노려봤다.
“어쭈? 이게 눈을 야리네? 야! 선생님이 너 기말고사 성적 보고 기절할까 하다가 참았는데 그렇게 인상 쓰기 있어?”
지난번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인상 쓰는 신새벽은 엄청 귀엽다.
“한참 기다렸다고요.”
“그래, 그래, 알았어. 쌤이 고민 좀 하느라.”
“무슨 고민인데요?”
“그건 알 것 없고! 흠, 널 부른 이유는 요즘 화학 공부 얼마나 하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설마…… 전혀 안 하는 건 아니지? 중간고사가 다가오는데…….”
신새벽이 미소를 가득 머금고 다정하게 물었다.
눈 딱 감고 거짓말하고 싶었지만, 저 얼굴 앞에서 차마 거짓을 말할 수는 없다. 그것보다 신새벽이라면 금방 그의 말투나 표정에서 거짓을 알아차릴 것이다.
“……실은, 전혀 안 하고 있는데요.”
“너! 그러기 있어?”
역시나 신새벽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네?”
“왜 물리만 공부하고 화학은 공부 안 하니?”
그야 물리가 더 재미있기 때문인데 그렇게 대답하면 혼날 것 같아서 열심히 다른 변명을 머릿속에서 골랐다.
“야! 설마 내가 물리 선생님보다 더 못생겨서야? 나도 꽤 예쁘다고 소문났거든?”
갑자기 답이 왜 그쪽으로 튀는지 모르겠다.
“그, 그건 아니고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굴에 딱 쓰여 있잖아! 그러잖아도 올해의 고곽 여신에 너희 담임 선생님이 뽑혀 화나는 판에!”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는 강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신새벽이 다시 설명했다.
“학생들이 SNS에서 고곽 여신 투표를 했나 봐. 근데 이것들이 나를 안 뽑고 너희 담임을 뽑아서 내가 2등 했거든. 투표한 녀석들을 단체로 패버릴 수도 없고.”
“그런 것도 있었어요? 근데 애들이 눈이 제대로 달린 것 같은…….”
“이게! 야!”
신새벽이 주먹을 들고 그의 가슴을 팍팍 쳤다. 물론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래도 밀렸다니까 달래주긴 해야 할 것 같다.
“쌤, 쌤도 내년엔 할 수 있어요. 저희 담임 쌤을 시집보내버리거나 아니면…….”
“이게 큰일 날 소리만 하네. 너희 담임 시집가려면 삼만 년 남았어! 그 성질에 가겠냐? 내가 가는 게 더 빠르지!”
한바탕 떠들썩하게 웃던 신새벽이 다시 진지한 모드로 돌아왔다.
“그래서 화학은 왜 공부 안 했어?”
“제가 요즘 조금 바빴거든요.”
“뭐 때문에? 카이스트 위탁 연구과제 하느라?”
역시 카이스트와의 R&E가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화제였었나 보다.
“그건 아니고요, 최근에 도장 깨기를 했거든요.”
“도장 깨기? 도장을 왜 깨? 태권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강우는 수학연구반과 이론물리부에서 있었던 대결을 상세히 설명했다.
우려 섞인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던 신새벽이 깔깔 웃으며 그의 어깨를 정답게 쳤다.
“캬! 우리 강우 잘하네! 애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겠는데? 국가대표를 연달아 깼단 말이지? 너, 우리 이론화학반에도 와서 한번 깨주라. 거기에도 메달리스트들이 폼 잡고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있거든.”
“그건 제가 화학을 잘못해서…….”
“못하면 열심히 하면 되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강행군해야겠다, 응?”
어? 그게 또 그렇게 돌아가나? 아무래도 신새벽의 술수에 말려든 것 같다.
“강우야, 너 오늘부터 화학 공부한 거 다시 보고해. 물리는 아직도 보고하고 있다며? 화학도 하자, 응?”
물론 밤마다 차도도에게 보고하고 있다. 다만 요즘은 과거와 조금 내용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물리 공부한 것만 보고했다면 요즘에는 다른 과목 공부한 것도 끼워 넣고 때로는 공부가 아닌 인생 잡담도 하고 그러니까. 처음에 비하면 엄청 편하게 톡을 주고받고 있다.
화학 공부를 거의 하지 않으니 신새벽에게는 톡을 보낼 내용이 없고 그렇다고 신변잡기를 보고하기엔 아직 신새벽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안 하면 안 될까요?”
“안 돼. 그거 안 하면 너 이번 중간고사에서 다시 끝에서 손가락 셀 점수 받을 거잖아.”
정곡을 딱 찔렸다. 이번에도 화학 공부를 거의 안 하고 시험 칠 생각이었으니까. 그나마 1학기 기말고사는 중간고사 때 해놓은 것이 있어서 중간은 갔지만 이제는 그 약발마저 떨어져서 평균을 한참 밑돌 게 뻔했다.
“내가 그 꼴은 못 보거든? 내가 너만은 꼭 인간으로 만들고 만다!”
문제 학생들 훈계할 때 쓰는 멘트를 이 순간에 듣게 됐다. 왜 투철한 교육자 정신을 이때 발휘하는 건지.
어쩔 수 없이 일일보고의 고난에 발을 디뎌야 하나. 한숨을 쉬던 강우의 눈에 책상 위에 펼쳐진 여러 논문이 들어왔다. 일단 말 돌리기부터.
“쌤, 근데 저건 뭐예요?”
신새벽의 시선이 책상 위를 향했다.
“아, 이거? 슬슬 논문 주제 잡을 때가 되어서 어떤 걸 할지 고민 중이었어.”
“무슨 논문요?”
“몰랐어? 나 요즘 대학원 석사과정 다니고 있거든. 그래서 지난겨울에 해외연수도 다녀왔고.”
신새벽이 엄청 바쁘게 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새벽은 작년 여름에 대학원에 입학했다. 물론 파트로 다니는 거라 일주일에 하루 정도 학교를 비우고 주로 오후 늦게 또는 야간 수업을 활용하긴 했지만. 이번 학기가 끝나면 1년 반을 다닌 셈이고 이수해야 할 학점이 조금 남았다고 했다.
“난 졸업까지 3년을 잡았거든. 직장이랑 병행하니까 1년 만에 논문을 쓰긴 어려워서 논문 작성 기간을 1년 반으로 계획했어. 그래서 올해 말부터는 논문을 시작해야 해.”
남들은 2년 만에 석사를 졸업하지만, 그녀는 교사를 병행하니 3년으로 계획하고 있다는 뜻이다.
“물리화학으로 하시게요?”
“어? 잘 아네. 역시 강우다워. 마침 지도교수님이 물리화학을 하시는 분이라 나도 이쪽으로 논문 주제를 잡긴 해야 하는데…….”
논문을 넘기면서 신새벽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신새벽이 놀란 눈으로 그와 논문을 두리번거렸다.
다소 충동적이긴 했지만 강우도 무작정 뱉은 말은 아니었다.
물리화학은 화학에서도 물리와 가장 가까운 분야이고 특히 양자화학은 강우가 연구하는 상온핵융합과 무관하지 않다.
물리와 전혀 무관한 화학에서도 그가 조금만 공부한다면 천재성을 발휘해서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는 이처럼 새로운 탐구를 시도하는 과학자를 보면 응원하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다.
한참 고민하던 신새벽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강우야, 이거 화학인데…… 할 수 있어? 네가 물리를 잘하는 건 알지만 화학은 영 아니잖아? 주기율표도 제대로 못 외우면서.”
“으아, 여기서 주기율표가 왜 나와요? 1번 수소, 2번 헬륨만 알면 되는 주제도 있어요.”
“하긴, 나야 강우가 도와주면 좋지. 원래 자연계 논문은 혼자 쓰기 힘들잖아? 교수들도 모두 대학원생 데리고 협력해서 쓰니까.”
“그러니까요. 제가 조금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흐응, 좋아. 난 강우만 믿는다?”
신새벽이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심코 손을 잡으려던 강우는 멈칫했다.
신새벽의 내심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비록 그가 고등학생에 불과하지만 최근에 보여준 활약은 대학생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아마 신새벽은 강우가 제주도 물리학회에서 보인 행동을 차도도에게서 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강우는 열심히 하는 과목에서 확실하게 성적을 냈다. 그래서 그 능력이 어느 정도 검증되어 있다. 화학 논문도 처음에는 헤맬지라도 금방 익숙해지리라는 믿음이 있다.
무엇보다 최근 들어 강우는 내신에 연연하지 않고 연구실적을 쌓으려고 노력한다. 즉 강우와 함께 논문에 집중하더라도 강우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판단하니까.
“뭐해? 무안하게. 레이디가 손을 내밀면 기사라면 잡아야 하는 거 아냐?”
“네?”
레이디와 기사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강우는 어쩔 수 없이 신새벽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느낌이 손에 확 감겼다.
“보통 이럴 때 기사는 레이디 손등에 키스도 하거든?”
“예?”
놀란 강우가 후다닥 손을 놓았다.
“킥킥, 뭘 놀래? 농담이야.”
까르르 웃던 신새벽이 골라놓은 논문을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래서 네 생각에는 어떤 주제가 좋을 것 같아?”
“양자화학요. 그거라면 제가 확실하게 도울 수 있어요. 게다가 요즘은 융합과학이 인기잖아요? 물리와 화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주제! 장래도 밝아요.”
“아하! 양자물리에 관심 있나 봐? 그럼 그쪽으로 해서 지도교수랑 주제를 잡아볼게. 강우야, 앞으로 나를 조금만 도와줘. 할 수 있지?”
“물론이죠. 그 대신에 일일보고는 안 해도 되는 거죠?”
“흐음, 난 보고해주면 더 좋은데. 부담되면 뭐……. 하지만 앞으로 논문 때문에 나랑 톡 할 일 많을걸? 그때 같이하자, 응?”
완전히 잘못 엮인 느낌이었으나 마지 못해 강우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적어도 융합과학의 미래는 어마어마하니까.
그때 뒤에서 상담실 문이 열렸다.
“둘이 잘 놀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