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조력자 (2)
차도도가 노트북을 안고 들어왔다. 방금 이론물리부 수업을 끝낸 모양이다.
상담실 내로 들어온 차도도는 책상에 펼쳐진 여러 논문을 쭉 훑었다.
“여전히 고민 중?”
“아니, 결정했어.”
“어떻게?”
“강우가 찍어줬지.”
태평스럽게 대답하는 신새벽을 힐끔 살핀 차도도의 시선이 강우에게 매섭게 꽂혔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던 그녀가 한마디 툭 던졌다.
“양자화학인가 보네.”
“어? 어떻게 알았어요?”
오히려 강우가 놀랐다. 그가 양자화학을 고른 것은 다소 충동적이지 않았던가. 차도도가 물리화학까지는 짐작하더라도 그 이상 알기는 어려웠을 텐데?
“평소 너 하는 짓 보면.”
강우는 심각하게 자신의 과거 행적을 되새겼다.
차도도에게 핵융합 연구 조짐을 들키긴 했었다. 요셉 교수 강연 때 질문이라든가, 아니면 노트북에 자료 모아놓은 것이라든가. 하지만 다른 물리 분야에도 비슷한 관심을 드러냈기에 그렇게 콕 찍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하여간 귀신이라니까.’
차도도에게 감탄하는 사이 다시 질책이 돌아왔다.
“강우야! 그거 쉽지 않은 일이거든. 코 꿰일 수도 있어. 그래도 할 거야?”
신새벽 논문을 돕는 일을 말하는 거다. 강우는 어차피 핵융합을 연구할 계획이었기에 철회할 이유가 없었다.
“쌤을 돕는 건 좋은 일이잖아요? 그러다 잘 풀리면 저도 좋은 거고요.”
다소 찜찜한 눈으로 강우를 살피던 차도도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그래, 좋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거래가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무슨! 거래 없었어.”
신새벽이 질색하며 말했다.
“어쨌든. 강우가 그렇게 약속했다면 그만큼 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니까…… 자, 그럼 강우가 설명해봐. 무엇을 할 건지. 정확하게는 신 선생님 논문이 아니라 강우 네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차도도의 목소리는 다소 차가웠다. 강우는 그녀가 어디까지 추측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지난 학기를 거치면서, 또 이번 학기의 절반을 보내면서 강우는 자신의 미래를 대충 계획할 수 있었다. 당연히 고려 과학고에서 무엇을 할지도 견적이 나왔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밝혀도 되는 걸까?
선생님들이 보기에는 너무 황당한 계획일 수도 있기에 당장 만류가 들어올 가능성이 컸다.
내신과 수능을 사실상 포기한다는 작전을 어떤 선생님이 찬성할까. 또 대학원생처럼 연구에 매진해서 진로를 뚫겠다는 계획 또한 선생님들이 보기에는 어처구니없을 게 분명했다. 적어도 눈앞의 두 선생님은 학부만 졸업한, 논문이라고는 제대로 써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까.
“흠, 나도 궁금해. 강우는 까도 까도 속이 안 보이는 양파 같은 학생이니까.”
신새벽이 웃으며 강우에게 앞쪽 화이트보드를 가리켰다.
칭찬인지 아닌지 모호한 비유다. 상담실에도 작은 화이트보드와 마카가 비치되어 있었다. 강우는 두 선생님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또 두 선생님을 핵융합 연구에 동참시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참에 확실하게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물론 강우는 두 선생님 앞에서 펼칠 이 강연이 전혀 부담이 없다. 그에게는 눈앞의 선생님도 다른 학생이나 사실 별 차이 없으니까. 핵융합 분야에서 두 선생님은 사실상 비전공자니까. 설사 전공자라도 두려워할 그가 아니다.
강우는 여유롭게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앞으로 자신이 몰두할 상온핵융합 연구의 개요를 설명해줄 생각이다. 내용은 손강우가 연구했던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문제는 이 선생님들을 어떻게 이해시키고 설득하느냐는 것뿐.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상온핵융합이 실현 불가능한 뜬구름 잡기처럼 느껴질 테니까.
“20세기 초, 덴마크의 물리학자인 보어는 수소 원자 모델을 처음으로 발표했죠. 그는 이 시기에 태동한 양자역학을 이용해서 수소 원자의 불연속 스펙트럼을 설명했습니다. 알다시피 수소는 우주의 에너지 근원인, 대단히 중요한 원소입니다. 별은 수소가 융합하여 헬륨을 생성하면서 빛을 내고 이 빛이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이 수소 핵융합 반응을 연구하면 우리는 무한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강우는 또박또박 설명을 시작했다.
차도도와 신새벽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다.
“안타깝게도 수소 핵융합은 엄청난 고온과 고압에서만 일어납니다. 태양 중심부는 1500만 K, 2600억 기압이나 되고 우리가 구현하는 실험실 조건은 압력이 낮은 대신 온도는 1억 K를 넘지요. 이런 조건이 아니면 수소 원자핵 사이의 전자기력 때문에 결합이 어렵거든요.”
두 선생님의 표정에서 기선을 잡았다고 판단한 강우는 천천히 세부 내용으로 들어갔다.
“……핵융합 연구는 온도와 압력을 어떻게 낮출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른바 덜 뜨거운 인공태양을 만드는 연구죠. 이를 위해서는 플라스마 상태의 수소 원자를 좁은 공간에 붙잡아두는 토카막(tokamak) 장치가 필요합니다.”
강우의 설명은 점점 어렵고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갔다.
예상치 못한 깊이에 차도도와 신새벽이 미간을 찌푸렸으나 강우는 그럴수록 더 쉽게 내용을 풀어헤쳤다.
차도도는 이미 여러 차례 강우의 강연을 보았고 수업 시간의 질문 대답을 통해 그 능력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또 강우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 그녀는 보면 볼수록 경이로움을 느꼈다.
신새벽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경지를 접하고 있었다. 고등학생이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그 깊이에 그녀의 머릿속은 사고가 마비되어 하얗게 변했다.
예전에 손강우는 상온핵융합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사이자 첨단을 달렸던 이다. 그런 과학자의 설명이 평범할 리 없었다.
강우의 강연은 두 선생님이 그를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뒤집었다. 이제 차도도와 신새벽에게 강우는 고등학교 학생이 아니었다. 관련 전공 대학교수와 버금가는 능력을 지닌 인물로 인식됐다.
“……그래서 이 분야는 전망이 매우 밝습니다. 연구할 내용도 무궁무진하지요. 그래서 저는 신새벽 선생님께서 양자역학을 더 파고 들어가서 수소 원자핵의 결합 안정성을 화학 측면에서 연구하셨으면 합니다. 어렵더라도 제가 옆에서 도우면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음, 그게 전부는 아니지?”
차도도가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주축이 될 연구가 따로 있습니다. 저는 상온핵융합을 현실에서 구현할 예정입니다. 지난번에 강연하신 MIT의 요셉 교수님 있죠? 그분을 통해 유명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고요, 이를 바탕으로 국내와 국외의 관련 프로젝트를 맡아 연구를 진행하고…….”
강우의 입에서 장밋빛 미래가 펼쳐졌다.
고등학생으로서는 말이 되지 않는, 설사 대학교수라도 달성이 어려운 그런 계획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강우가 모든 설명을 끝냈을 때 두 사람은 침묵에 잠겼다. 가능성 유무를 그녀들이 판단하기에는 지나치게 수준이 높았다.
한참 후에야 차도도가 입을 열었다.
“그게 혼자서 가능해?”
“고곽천재 친구들이 있잖아요. 그들의 능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걔들은 너와 달리 내신도 챙겨야 해.”
“저도 알아요. 무리해서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저를 믿고 같이하는 친구에게는 확실한 실적을 안겨줄 겁니다.”
차도도는 강우의 말을 믿었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실적이 있으니까. 선택은 학생들의 문제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또 있어요.”
강우가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쓱 훑었다.
“나?”
신새벽이 눈이 동그래져서 자신을 가리켰다.
“제가 제시한 주제로 논문을 쓰시면 화학 선생님은 저랑 손을 잡으신 거고요, 우리 담임 선생님도 저와 함께 핵융합의 세계로 뛰어드시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차도도가 이마의 주름을 확 구기며 입술을 삐죽였다.
“어휴, 둘이 아주 죽이 딱딱 맞네.”
“쌤도 더 공부하고 연구하고 싶으시잖아요? 쌤이 저랑 함께하면 저도 힘이 날 거예요.”
“선생님은 수업이랑 잡무만으로도 바쁘거든?”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세요. 선생님도 더 공부하고 더 연구하고 싶으시잖아요.”
차도도는 예전에 강우에게 자신의 과거사를 괜히 털어놓았다고 후회했다. 그때 대학원 과정을 선택하고 깊이 있는 연구에 몰두하고 싶다고 말해서는……. 그런데 정말 하고 싶긴 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부모의 반대로 이루지 못한 꿈을 지금이라도 시도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난 안 해.”
“난 할 거야.”
차도도와 신새벽의 말이 엇갈렸다. 차도도가 짜증이 난 표정으로 신새벽에게 눈을 흘겼다.
신새벽이 웃으며 말했다.
“난 강우의 천재성을 믿어. 강우와 함께 연구에 매달리면 그저 그런 논문을 쓰는 게 아니라 세계적인 논문이 나올 거야. 그렇지 강우야?”
“으이구, 아예 강우를 지도교수로 삼지?”
“못할 거 뭐 있어? 크크, 지도교수 강우, 대학원생 신새벽. 뭐 나쁘지 않네. 강우야, 괜찮은 논문 한 편을 꼭 내자! 물론 내 석사 논문!”
강우는 기쁘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 대신에 각오하셔야 해요. 지도교수는 하늘과 같으니까, 갑을 관계 잘 아시죠?”
어리둥절한 신새벽에게 차도도가 악담을 퍼부었다.
“저 녀석이 너를 막 부려 먹을걸?”
“으음, 그래?”
조금은 찝찝한 표정으로 신새벽이 강우 눈치를 봤다.
예상치 않게, 완벽하게 신새벽을 아군으로 끌어들인 강우는 차도도에게 다시 물었다.
“쌤은요?”
차도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우 혼자뿐만 아니라 고곽천재 네 명의 장래가 걸린 상황에서 담임 선생님이 쉽게 결정을 내리긴 어렵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강우는 화제를 돌렸다.
“오늘 쌤 노트북 바탕화면을 보니까…… 재미가 없더라고요?”
“난 너처럼 아이돌로 도배하지는 않아.”
뒤끝 작렬이다.
“그건 대우가 한 거라니까요. 지난번에 카이스트 갔을 때 같이 찍었던 사진 있잖아요? 바탕화면으로 그거 어때요? 저는 바탕화면을 그 사진으로 바꿀 건데…….”
“내가 네 사진을 왜 바탕에 깔아!”
조금은 화가 난 듯 차도도가 바로 거절했다.
아직도 노트북 바탕화면 아이돌 사진에 화났나? 강우는 뻘쭘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언젠가는 그 사진으로 교체하겠지. 차도도를 중심으로 고곽천재 네 명이 파이팅을 외치는 장면, 그 뒤로 카이스트의 건물이 보이는 사진이다.
차도도와 고곽천재의 결속을 증명하기에 노트북 바탕화면으로는 최적이다.
그 말을 들은 신새벽이 끼어들었다.
“으응? 같은 사진으로 바탕화면? 그거 좋은 아이디어인데? 강우야, 우리도 할까? 난 휴대폰 바탕화면이 어떨까 싶은데.”
신새벽이 곧장 그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모델 같은 사진이었다. 작심하고 단장한 신새벽은 여신이 따로 없었다.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걸까? 사진이 정말 예쁘게 나왔다.
절로 입이 확 벌어졌다.
“나 예쁘지?”
“네. 연예인 하셔야 할 것 같아요.”
그의 칭찬에 차도도의 안면이 다시 확 구겨졌다.
“연예인 다 얼어 죽었니? 신새벽! 좀 적당히 해. 강우는 아직 고등학생이거든!”
“나도 알아! 고등학생이니까 놀리는 재미가 있지. 헤헤.”
두 사람이 서로 눈을 부라리며 경고를 주고 받았다. 옆에 계속 있다가는 자칫 불똥이 튈 분위기다.
눈치를 보던 강우는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그럼 전 이만 갑니다.”
재빨리 인사를 마치고 강우는 상담실을 뛰쳐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