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14화 (114/325)

제114화 조력자 (3)

야간자습을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은 학생들로 붐볐다.

손차희는 윤수아와 나란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강우와 최대우가 일정 간격을 두고 떨어져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하루의 절반을 과제연구에 투입하고 절반을 중간고사 대비에 썼다. 카이스트의 과제연구는 처음에는 신이 났지만 서서히 막막한 벽을 느끼고 있었다. 고등학생인 그녀에게는 아직 쉽사리 넘보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다행히 친구들이 모두 즐겁게 임하고 있고 아직은 공부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았다. 이번 주가 지나면 당분간은 중간고사에 집중할 생각이다.

그녀는 지난 기말고사의 기세를 이번 2학기 중간고사에서도 이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열심히 해야지.”

다짐하던 손차희는 옆에서 걷는 윤수아를 슬쩍 봤다. 윤수아가 뒤를 힐끔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왜?”

“오늘 저 녀석들 좀 이상하지 않아?”

“똑같은데?”

손차희는 오늘 공부에 집중하느라 다른 사람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중간에 잠시 나갔다가 온 것을 빼면…… 최대우는 평소처럼 블로그를 잡고 씩씩대고 있었고 강우는 노트북 바탕화면을 바꾼다고 윤수아를 괴롭혔으니까. 그러다가 최대우에게 자기의 우상을 왜 버리느냐고 갈굼을 당하긴 했었지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아냐, 오늘 강우가 좀 이상해. 어딘지 모르게 들떠 보여.”

한 발짝 뒤에서 두 사람을 따라가던 강우는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 역시 여자의 직감을 무시할 수 없어. 윤수아가 알아채다니!’

저녁에 상담실에서 두 선생님에게 열강을 펼쳤던 강우는 다소 기분이 붕 뜬 상태였다. 신새벽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차도도도 가능성이 꽤 커졌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도 두 사람은 같은 편이었지만 오늘 이후 더 확고해졌다.

덕분에 상담실에서 돌아온 후 평소처럼 차분하게 몰두하지 못하고 있던 강우였었다.

그 사이 손차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의 직감은 믿지만 윤수아의 직감만은 믿을 수 없는 손차희는 피식 웃으며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 녀석 원래 저래, 가끔 뭔가 혼자서 골똘히 생각하다가 정신없이 백지에 수식을 전개하고 그러잖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또라이처럼 보이겠지.”

강우의 기행이 한둘이 아니어서 이제는 그 행동을 천재의 속성으로 대충 이해하는 그녀였다.

어쨌든 그녀는 중간고사에 관심이 없는 강우를 과감히 경쟁상대에서 제쳐 놓고 다른 녀석을 떠올렸다.

역시 가장 신경 쓰이는 경쟁자는 이민찬이다.

이민찬을 떠올리며 슬그머니 입술을 깨물었을 때 맞은편 가로등 아래에서 고독을 씹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강우도 금방 이민찬을 발견했다.

‘저 자식이 왜 여기 있지?’

이민찬은 평소처럼 편의점에서 산 주스를 빨대로 쭉쭉 빨며 지나가는 학생을 훑어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저 녀석이 찾을 사람은 손차희가 유일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손차희와 눈이 마주친 이민찬이 손을 흔들었다.

“차희? 나 좀 볼래?”

그러잖아도 이민찬의 공부 진도를 의식하던 손차희는 두말없이 다가갔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시험 직전에 이처럼 서로를 탐색하는 경우가 흔했다.

“왜?”

“요즘 과제연구 열심히 한다며?”

“돈 받았으니까.”

모든 것은 돈이란 말로 설명이 됐다. 그들이 연구비를 받으면서 과제연구를 한다는 말에 모두가 부러운 시선을 보냈었다.

“그거 너무 열심히 하면 안 돼. 그러다가 내신 망친다.”

이민찬이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충고했다.

“야, 네가 착각하나 본데 지난 기말고사는 내가 훨씬 더 잘 쳤거든?”

“그때 내 컨디션이 별로였던 탓이야. 중간고사는 내가 압도적이었지.”

이민찬이 얼른 반박했다.

“나야말로 중간 때는 아직 적응이 안 돼서 그랬던 거고. 이젠 절대 너한테 안 져.”

“크크, 그러니까 과제연구 그만하고 열심히 공부해. 나중에 지고 난 다음 과제연구 때문에 못 했다는 둥 변명하지 말고.”

“뭔 소리야? 내가 넌 줄 알아?”

“열심히 하란 말이지.”

둘의 툭탁거림이 커졌다.

강우는 둘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저런 내용으로 싸우다니. 손차희와 이민찬은 중학교 학원 시절부터 유명한 라이벌이었으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경쟁자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동기부여가 되기에 좋은 일이 분명하다.

굳이 말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지나치려던 강우의 눈에 두 사람에게 접근하는 새로운 녀석이 보였다.

‘저 자식은 누구더라?’

눈에 익기는 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이, 여기서 뭐해?”

안경을 끼고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남학생을 본 이민찬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심히 거슬린다는 표정이다.

“영식이? 넌 또 왜?”

주영식. 3등으로 입학해서 지난 1학기 성적 종합 1위인 녀석이다. 손차희와 이민찬이 한 번씩 시험을 망치는 바람에 어부지리를 탄 장본인이기도 하고.

“하하, 너희 둘이 떠드는 것을 보니 우스워서.”

“뭐? 우스워?”

이민찬이 발끈해서 노려봤다.

주영식이 피식 웃으며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생각해봐. 정작 1등은 여기 있는데 말이야. 너희 둘이 서로 1등이라고 싸우는 게 가관이라…….”

“어휴 이게…….”

이민찬이 발끈하다가 숨을 골랐고 손차희도 분노를 뿜어냈다. 따지고 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성적은 학기별로 합산되고 1학기 성적은 주영식이 1등이니까.

평소 주영식을 라이벌로 간주하지 않았던 두 사람은 기분을 확 잡쳤다.

두 사람의 내심을 눈치챈 주영식이 이민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번 중간고사는 너희가 잘할지 모르지만…… 기말고사까지 합하면 결국 내가 1등일걸?”

주영식의 말솜씨도 만만치 않다. 단 한 문장으로 경쟁자의 기분을 확 꺾어버렸으니까.

적을 한 방에 쓰러트리고 흡족해하던 주영식은 곧바로 앞을 막아선 한 녀석과 맞부딪쳤다.

그의 앞에 강우가 서 있었다.

“강우?”

“네가 1학기 1등이야?”

“어…… 그런데?”

“그래서 수학과 물리가 몇 점인데?”

갑자기 주영식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제일 마주치기 싫은 녀석과 만났다.

강우는 비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암기 과목 잘 쳐서 점수 좀 받았나 본데…… 그렇다고 나를 제쳐두면 섭섭하지.”

주영식도 강우가 수학연구반과 이론물리부에 가서 했던 기행을 들었다. 자신이 아무리 1등이라지만 수학과 물리를 모두 만점 받은 강우를 상대하기는 부담스러웠다.

그만큼 과학고에서는 수학과 물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다. 국어나 영어에서 만점을 받아도 천재라는 말을 듣기 어렵지만, 수학과 물리는 조금만 잘해도 천재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이제는 은연중에 1학년 중에서는 강우가 최고 천재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다른 녀석이라면 주영식도 한번 겨뤄볼 의향이 있었지만 강우만은 사양이었다. 도무지 대적 불가인 녀석이니까.

“이번 중간고사에서 분발해봐. 수학, 물리!”

“크으윽!”

주영식의 면전에서 비웃음을 날린 강우는 손차희의 소매를 잡았다.

“가자! 차희야.”

강우가 손차희를 끌어당기자 윤수아와 최대우도 연달아 끌려왔다.

기숙사로 가는 길에서 강우는 연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공부 잘하는 녀석들이 하는 짓이 귀여워서 한번 끼어든 것뿐인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손차희가 할 말을 잊은 듯 고개를 저었다.

강우는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너무 남을 신경 쓸 필요 없어. 공부는 장기전이고 본인과 싸움이니까. 그러니 편하게 마음먹고 열심히 공부해. 남이 얼마나 공부하는지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맞는 말이긴 한데 지금까지 손차희는 남과의 경쟁을 통해 공부해왔다.

그런데 강우의 말을 듣자니 자신이 중간고사에서 왜 망했는지 그 원인이 보인다. 그녀는 앞으로 더 넓은 시야를 갖고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민찬이나 주영식이 아니라 지난 시험보다 잘 치는 것을 목표로 삼자! 강우보다 물리와 수학을 잘 치는 목표는…….’

슬쩍 강우 눈치를 본 손차희가 고개를 흔들었다.

* * *

토요일 저녁.

강우는 기숙사에서 열심히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중간고사가 임박해서 그런지 평소와 달리 이번 주말에는 기숙사에 남은 학생이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손차희와 윤수아도 기숙사에 남지는 않았다.

손차희는 집에서 공부한다고 했고, 윤수아는 학원에 가기 위해서 돌아갔다.

강우는 최대우와 세미나실에 있다가 사용 시간이 끝나서 기숙사로 돌아온 상황이었다.

지금 그는 예전 손강우의 계정에서 받은 자료 파일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손강우의 마지막 논문을 일부 재정리하는 중이었다.

중간고사 대비 기간은 그에게 좋은 시간을 제공한다. 다른 학생들이 내신 공부에 몰두하는 동안 강우는 자신만의 연구에 집중했다. 바로 핵융합 연구다.

지금은 스스로 공부하기 바빠서 강우가 무엇을 하는지 딱히 관심이 없는 때이기도 했다.

‘요셉 교수에게 이 메일을 보내야지.’

일전에 요셉 교수와 연구자료를 핑계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손강우의 논문 중에서 요셉 교수의 흥미를 끌 내용을 재정리해서 서신을 작성했다. 이 서신은 그가 상온핵융합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두고 있는지 설명해줄 것이다.

예상대로라면 이 서신을 받은 요셉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동안 요셉은 손강우의 연구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할 만큼 열성적이었으니까. 그때 요셉 교수의 노력은 전혀 결실을 보지 못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손강우와 유사한 생각을 품은 천재 고등학생이 나타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일전에 그를 본 적도 있으니 터무니없는 서신이 아님을 요셉도 알 것이다.

요셉 교수의 반응에 따라 앞으로의 전략이 정해진다.

그렇기에 이번 서신은 대단히 중요했다. 또 핵융합 연구계에 강우라는 신성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했다.

‘요셉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야.’

어쩌면 이 서신의 결과는 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요셉의 움직임이 예상과 다르면 다른 교수를 찾으면 되니까. 단지 조금 더 번거로워질 뿐.

머릿속으로 미래를 설계하면서 강우는 보낼 서신에 첨부할 파일을 완벽하게 작성했다.

“뭐해?”

맞은편 침대에서 최대우가 물었다. 녀석은 평소처럼 침대에 기대어 공부하고 있다. 그러다가 강우가 노트북을 들고 뭔가에 열중하자 호기심에 물어본 것뿐이다.

“인터넷 서핑 중, 자료 찾으려고.”

“시험 끝나고 해.”

“난 시험이 그리 중요하지 않아서.”

“하아! 나도 여유 좀 부리고 싶다.”

역시 시험은 학생을 옭아맨다. 지금, 이 순간 기숙사 안에서 여유로운 사람은 강우 외에는 없을 것이다.

강우는 첨부를 꼼꼼하게 확인한 다음 이메일의 엔터를 눌렀다.

이제 버스는 떠났다.

강우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노트북 바탕화면으로 향했다. 차도도와 고곽천재 넷이 파이팅을 외치며 찍은 사진이다. 그가 보기엔 걸그룹 사진보다 훨씬 낫다. 그들의 미래를 보여주는 기분도 들었고.

바로 그 미래가 방금 보낸 이메일을 기점으로 펼쳐지게 될 것이다.

‘쌤한테 연락 올 때가 됐는데…….’

그날 상담실에서 열강을 토한 후 차도도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다. 삐친 것은 아닐 텐데……. 생각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무한정 길어지면 곤란하다. 주말이 지나면 차도도의 결정을 확인해 봐야 한다.

노트북 화면을 닫으려는 순간이었다.

메일이 날아왔다. 차도도였다.

강우는 반갑게 메일함을 열었다.

화면에 뜬 커다란 사진을 본 순간 강우의 눈이 번쩍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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