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15화 (115/325)

제115화 조력자 (4)

토요일 밤.

차도도는 창밖을 감상하고 있었다.

아파트 창으로 보이는 서울 야경은 눈이 부실 만큼 화려했다. 쭉쭉 솟은 고층 빌딩 불빛 위로 반달이 도심을 밝히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이렇게 야경을 보며 명상에 잠기기를 좋아했다.

진학과 연구자의 꿈이 부모님의 반대로 막히고 난 다음부터다. 이렇게라도 저 야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곧 저 넓은 세상으로 달려갈 것 같다.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아닌 진리를 향한 깊은 탐구를 해보고 싶다.

그런데 며칠 전 강우의 강의를 듣고 난 후 저 도심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지금 환한 빛을 뿜어내는 저 불빛은 모두 인간이 이용하는 에너지다. 과거에는 무심코 넘겼던 야경이 지금은 에너지의 변환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그 에너지의 근원은 바로 태양이다.

지금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달도 태양 빛을 반사한 것에 불과하고 도심을 밝히는 가로등도 대부분 태양 에너지가 변한 전기에너지니까.

그 태양 에너지는 수소 핵융합의 증거다.

“강우는…… 수소 핵융합을 파고들고 있어.”

그 깊이가 절대 얕지 않았다. 아마 지금 강우는 세미나를 했던 그 요셉 교수에 버금가는 수준에 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어떻게 고등학생이 그럴 수 있는지. 강우를 보기 전까진 이런 고등학생이, 아니 이런 천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었다.

“알 수 없는 녀석.”

강우를 떠올리자 마음 한쪽이 칼로 베듯 아팠다. 강우와 스스럼없이 장난치던 신새벽이 아른거린다.

신새벽은 현명했다. 그녀가 신새벽이라도 강우를 붙잡아 함께 논문을 쓰자고 했을 것이다. 선생님이란 직업에 쫓기면서 대학원 과정을 마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신새벽은 논문을 완성할 쉬운 방법을 잡은 것뿐이다. 물론 그 이면에 강우를 향한 신새벽의 욕심이 숨어있음을 여자의 직감으로 눈치챘다.

그런데 신새벽의 사진을 받고 넋을 잃은 듯 바라보던 강우가 선명히 떠오른다.

단순히 고등학생이라 생각했더니 남자였나? 신새벽이 예쁘긴 하지. 하지만 그녀도 미모라면 절대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날 이후 계속 고민했다. 강우와 함께 핵융합 연구에 몰두하는 게 옳을까.

이것을 쉽게 결정하기 힘든 이유는 고곽천재에 속한 다른 세 학생의 진로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강우의 태도로 보면 그들 셋마저 같이 연구팀으로 묶어 연구실적으로 유학을 추진할 의도로 보였다.

“차희나 수아는 몰라도 대우는…… 형편이 그리 쉽지 않을 텐데…….”

단순히 공부를 잘한다고 외국 유학을 갈 수 있을까. 다른 여건도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담임으로서 내신을 포기하고 연구실적에 올인하는 그런 진학 방법을 밀어주기 어려웠다.

“어쩌면 나 자신 때문일지도…….”

대학원에 진학하려다 좌절했던 그녀의 과거사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새벽을 떠올리자 괜히 신경질이 났다. 이대로 두면 두 사람은 더 가까워지겠지? 선생님과 학생 사이, 신새벽이 절대 불장난을 할 만큼 어리석지 않은 사람임을 알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결국 견디지 못한 그녀는 노트북을 열었다.

바탕화면에 강우가 요구한 사진을 깔아봤다. 그녀가 아끼는 학생들이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그 속에서도 강우의 얼굴이 빛난다.

한동안 차도도는 강우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조금은 충동적으로 그녀는 바탕화면을 캡쳐했다. 그리고 사진 폴더에서 예전에 찍었던 사진을 하나씩 살폈다.

모두 그녀의 미모를 완벽하게 드러내는 사진이었으나 어떤 사진은 그녀가 보기에 밉상이었고 어떤 사진은 유치했다. 또 어떤 사진은 조금 노출이 심하고…….

적당한 사진을 고르기 정말 힘들었다. 이것은 그녀의 마음이 뒤숭숭해서다.

간신히 괜찮은 사진을 하나 골랐다. 예전에 친구와 함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가 그곳 사진사가 그녀의 미모에 혹해 공짜로 찍어주었던 사진이다. 조명과 반사판을 사용해서 실력 있는 사진사가 찍었기에 마치 화장품 광고 모델처럼 환상적으로 잘 나왔다. 우아한 옷을 입은 그녀의 미모를 완벽하게 담겨 있었다.

차도도는 고곽천재의 사진으로 갈아치운 노트북 바탕화면 증명사진과 스튜디오에서 찍은 그녀의 상반신 사진 하나를 첨부하여 강우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사실상 항복 선언이었다.

‘괜히 보냈나…….’

충동적인 행동을 자책하면서 몇 분 지났을까.

휴대폰이 울리고 강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 * *

이 메일을 연 강우는 눈을 떼지 못했다.

첫 첨부 사진, 고곽천재 바탕화면 사진을 본 강우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차도도가 노트북 바탕화면을 그와 같은 사진으로 바꾸었음을 의미했다. 그날 바탕화면을 왜 바꾸냐며 발끈하던 그녀였기에 이것은 그녀의 심경이 변했음을 의미했다.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했던 그였지만 그 결과를 받고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앞으로 차도도는 그를 계속 밀어줄 것이다. 아니 그와 함께 연구할 것이다.

그런데 함께 날아온 두 번째 사진은 정말 의외였다.

차도도의 개인 사진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재미 삼아 찍은 스냅 사진이 아니다. 스튜디오에서 작정하고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 차도도의 미모도 미모였지만 그에게 이 사진을 보낸 심리를 알기 어려웠다.

‘신새벽 선생님이 사진을 보내서인가?’

강우는 휴대폰을 열고 신새벽이 보냈던 사진을 띄웠다.

차도도와 신새벽. 정말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다. 특히 그에게 보낸, 심혈을 기울인 사진에서는 그야말로 미모가 돋보였다.

어쨌든 사진을 얻어 강우는 만족했다. 적어도 누군지도 모르는, 최대우가 깔아준 걸그룹 사진보다 백배 낫다.

강우는 차도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쌤?”

- 강우? 아직 안 잤네?

“고마워요.”

잠시 말이 끊어졌다.

빨리 차도도와 만나 신새벽이 있는 자리에서는 할 수 없었던 계획을 추가해야 한다. 그래야 요셉 교수의 답신이 도착했을 때 바로 연구에 들어갈 수 있다.

“내일 시간 돼요?”

그녀에게 특별한 일이 없을 일요일이다.

한참 대답이 없어 그가 다시 물었을 때야 답변이 날아왔다.

- 시간 있어.

“그럼 만나요. 제가 그쪽 동네로 갈까요?”

- 그렇게 해. 점심 후에.

“그럼 내일 봬요.”

강우는 휴대폰을 끊었다. 점심 후에 오라는 말에 그녀의 서운함이 묻어있었다. 예전이라면 점심을 사주겠다고 나섰을 그녀인데 조금 거리를 둔 느낌이다.

어떻게 앙금을 풀지 정리하고 있을 때 최대우가 물었다.

“담임 쌤이야?”

“응.”

“내일 쌤 만나게?”

“할 말이 있어서. 며칠 전에 사고 좀 쳤잖아.”

최대우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두 사람이 생각하는 ‘사고’는 서로 달랐다. 최대우는 이론물리부에서 벌어진 사고를 떠올렸고 강우는 상담실 사고를 의미했다.

약속을 잡았으니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나서 그녀를 설득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 * *

일요일 낮에 강우는 차도도네 집 부근에서 전화했다. 예전에 왔던 곳이라 집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쌤! 왔어요! 부근 카페에서 기다릴까요?”

- 아니 집으로 바로 올라오렴.

강우는 의아한 기분에 고층 아파트를 올려다봤다. 저 꼭대기에서 지금 차도도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강우는 당황한 마음을 추슬렀다. 어차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사실 호랑이도 아니지만.

차도도의 집은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남으로 난 창으로 따뜻한 햇볕이 거실을 비추었다.

예전에 방문했던 때처럼 차도도는 가벼운 티에 긴치마를 입은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다만 앞치마를 두르고 있지는 않았다.

거실 소파에 앉아 기다리자 차도도가 과일을 가져와서 탁자에 놓고 깎기 시작했다.

강우는 과도를 만지는 그녀의 긴 손가락을 조용히 응시했다.

“내가 점심을 해주고 싶었는데 알다시피 요리에 재주가 없어서…… 밥은 먹었어?”

“네, 먹었어요.”

오다가 분식집에 들러 우동으로 때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굶고 와서 라면이라도 끓여달라고 할걸. 어쨌든 지금이라도 더 먹을 수 있지만 차마 밥을 달라고 할 염치는 없었다.

그의 앞에 조각낸 사과와 배가 가지런히 놓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그날 상담실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요.”

“응? 아! 신새벽 선생님이랑 논문 쓰는 거? 네가 논문으로 진학 방향을 잡았으니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내가 담임이라고 꼭 나랑 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예의상 하는 말인지 모르지만 차도도는 신새벽과 엮이는 것을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어차피 그 문제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강우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젯밤에 요셉 교수에게 이메일을 보냈어요.”

“요셉 교수라면 그…… 강연했던 교수?”

“네, MIT의 핵융합 전문가죠. 그분에게 최근 제가 조사했던 핵융합 이론을 정리해서 보냈어요.”

차도도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유는?”

“어차피 이 분야를 계속 파고들면 만나야 할 사람이니까요. 사귀어두는 게 좋죠.”

“그쪽으로 논문을 쓸 생각이야? MIT로 유학 가려고?”

차도도가 강우의 생각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정작 더 중요한 부분이 있지만요.”

남들은 죽으라고 노력해도 쓰기 힘든 논문을 강우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으니 차도도는 이것이 고등학생의 오판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물론 그녀가 강우의 실력과 현재의 논문 수준을 비교할 수 없기에 품는 의문이다.

하지만 강우를 쳐다보고 있으면 막연하나마 가능하리란 생각이 들긴 하다.

“더 중요한 건 뭐지?”

“전 핵융합 쪽으로 프로젝트를 따올 생각이에요.”

“음, 그건 어려울 것 같아. 핵융합은 거대 산업이자 아직은 실현 가능성이 먼 기초과학 수준이라……. 특히 국내에서는 고등학생에게 그런 연구 프로젝트를 주지 않아.”

차도도의 말이 정확하다. 강우는 바로 정정했다.

“국내가 아니고 미국에서 받을 거예요.”

차도도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모르긴 해도 미국 또한 고등학생에게 연구 프로젝트를 주진 않을 것이다.

강우는 예전에 손강우가 미국 방산업체와 추진했던 프로젝트를 살릴 계획이었다. 자신이 그 손강우에 버금가는 실력자임을 확신시킨다면 프로젝트를 따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방산업체는 지금 어떻게든 그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테니까.

강우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는 차도도는 반대를 표명했다.

“강우야, 네가 천재인 건 알겠는데…… 그건 실현이 어려워. 설사 네가 실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미성년자인 고등학생은 프로젝트의 주체가 될 수 없거든. 이번에 카이스트와 맺은 계약도 법적으로는 네가 아닌 나와 계약한 거고, 정식 R&E였다면 고려 과학고가 주체가 되었을 거야.”

그렇다. 강우는 미성년자이기에 법적으로 계약 당사자가 될 수 없다. 그가 아무리 천재여도 나이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래서 전 선생님이 필요해요.”

“내가?”

“앞으로 국내, 국외에서 여러 건의 프로젝트를 수행할 생각이에요. 그 계약 체결 당사자는 제가 아닌 선생님이고요.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당연히 논문이 나올 테고…… 그 논문에는 저뿐만 아니라 선생님 이름도 올라가죠.”

차도도의 얼굴이 상기됐다. 강우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계획을 들어서다.

절대 가능하리라 생각지 않지만 강우니까 가능할 것 같은 믿음이 든다. 실현된다면 그녀 또한 학교 선생님이 아닌 과학자로서 새롭게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꿈이 현실이 되는,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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