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조력자 (5)
강우의 설명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그가 미성년자이기에 대리인으로 차도도가 연구 책임자로서 대신 계약을 맡아달라는 뜻이다.
함께 연구한다는 것은 어쩌면 듣기 좋은 말일지도 모른다.
차도도는 한국대를 졸업한 재원이다. 그녀도 학창 시절에는 나름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솔직히 학습이든 머리이든 타인에게 밀려본 기억은 없다. 그만큼 그녀는 뛰어났고 또 성실하게 학창 생활을 보냈다.
그렇기에 지금 강우의 제안에 그녀는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었다. 자칫 들러리만 서야 할지도 모른다.
만일 강우가 아닌 타인이었다면 단번에 일축했을 것이다. 그런데 강우이기에 그럴 수 없었다.
지금까지 강우가 보여준 능력은 그녀의 상상 밖이었다. 함께 연구하면 그녀가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더 컸다.
무엇보다 그녀가 교육자라면, 강우의 능력을 믿는다면 당연히 꿈나무를 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엔……. 여러모로 걸리는 게 많다.
그녀의 꿈과, 그녀의 미래와, 이상하게 신경 쓰이는 신새벽까지.
차도도가 표정을 굳히자 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요셉 교수님께 보냈던 연구 요약본과 관련해서 설명해드릴 게 있어요. 혹시 칠판이나…… 그 런 게 있을까요?”
“있어. 따라오렴.”
차도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우가 도착한 곳은 위층의 서재였다. 그녀의 아파트는 복층이고 아래층은 거실과 주방 공간 위주, 위층은 침실과 서재다.
비교적 넓은 서재 한쪽에 투명 아크릴 칠판이 세워져 있었다. 거의 한쪽 벽면을 차지할 정도로 넓은 투명판이다.
“우와, 멋지다.”
강우의 감탄에 차도도의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설명해보렴.”
차도도가 의자에 앉아 집중하자 강우는 호흡을 골랐다.
강우가 노렸던 순간이 왔다. 이 설명이 끝날 때까지 차도도를 완전히 그의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강우는 펜을 들고 투명칠판에 그림을 그렸다. 투명칠판에 흰 글씨가 적혔다.
“그날 핵융합의 기초 지식을 설명해드렸고요, 요셉 교수와 합동 연구를 추진하려면 기초를 벗어나 최신 연구 주제를 다루어야 해요. 선생님께서 논문과 프로젝트의 주체가 되셔야 하기에 제가 설명하는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셔야 해요. 그래서 오늘 시간을 잡은 거예요.”
강우는 차도도라면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예상했다. 비록 그녀의 재능을 그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간접적으로 겪어 본 결과, 그녀는 매우 뛰어난 연구자였다.
“인류는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사투를 벌여왔고 그 궁극적인 해결책이 바로 핵융합입니다. 핵융합에는 어마어마한 온도와 압력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고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연구가 바로 상온핵융합 반응이죠. 제가 연구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이어서 강우는 요셉 교수에게 보냈던 편지 내용을 하나하나 요약해서 설명했다.
당연히 차도도는 처음 접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궁금한 세부 사항은 나중에 강우에게 다시 묻거나 관련 책과 논문을 찾아보면 된다.
‘이게 바로 첨단 과학이야.’
차도도는 내심 감탄하며 강우의 설명에 집중했다.
강우는 핵융합 연구 진행 상황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바로 손강우가 모아 두었던 그 자료다. 차도도는 앞으로 그와 함께 연구해야 할 핵심 인물이기에 단순히 내용을 이해하는 수준에 머무르면 곤란하다. 앞으로 주도적인 연구수행을 위해 그녀는 완벽하게 습득해야 한다.
당연히 강우는 상세하고 세세하게 설명을 반복했다.
그렇게 칠판 가득 설명하고, 지우고 다시 설명하는 동안 차도도도 자세를 풀지 않고 집중했다.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요셉에게 보낸 내용을 거의 설명한 순간이었다.
마지막 수식을 알려주는 순간 강우는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지금 이 부분은 수소 플라스마의 거동을 예측하는 복잡한 수식으로 예전 손강우 시절 별도의 해법이 존재하지 않아 연구를 중지했던 그 지점이었다.
오늘 다시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수식을 전개하는 동안에 어렴풋하게 이 문제를 풀 해법이 떠올랐다.
“으음?”
강우의 시선이 칠판에 적힌 수식을 다시 훑었다. 머릿속에서 아이디어가 재조합되고 수식이 해체되어 여러 항으로 나누어졌다. 어렵지 않은 단순한 힌트였다. 하지만 한 부분을 손보자 막힌 실타래가 풀리듯 머릿속에서 수식이 널뛰기 시작했다.
‘이거다!’
강우는 자신도 모르게 정신없이 마카로 칠판에 수식을 풀기 시작했다.
차도도를 향해 설명하던 그 자세는 사라지고 이제는 무념무상에 빠져 홀로 식을 전개하고 있었다.
의미를 품은 수식이 투명칠판을 가득 메웠다. 그런데도 그의 풀이는 끊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그는 차도도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완전히 혼자 수식에 몰입해있었다.
스윽- 스윽-
마치 신이 들린 듯 집중해서 수식을 전개해 나갔다.
갑자기 강우가 설명을 중지하자 차도도는 질문을 하려 했다.
그런데 강우의 표정이 이상했다. 수식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 표정은 완전히 넋이 나간 집중상태였다.
그 순간 차도도는 강우의 상태를 이해했다.
무아지경!
마치 스님이 득도한 것처럼 강우는 자신이 푼 수식에 완전히 빠져있었다.
빼곡한 수식의 향연! 투명칠판에 하얀 글자가 춤을 춘다.
‘강우가 지금 뭔가를 깨달았어.’
차도도는 강우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강우의 뒷모습이, 반쯤 보이는 옆 모습에서 은은한 광채가 나는 듯했다. 문제에 집중하는 과학자의 모습은 아름답다. 지금 그녀가 마주한 이 장면은 그녀 생전에 두 번째로 맞이한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거의 10년 전, 그녀를 과학으로 이끌었던 한 대학원생에게서 그녀는 과학자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보통 사람이 아이돌 가수를 접하는 희열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당시 그녀에게는 강연했던 그 대학원생이 그 누구보다도 훨씬 멋졌다.
그리고 최근 사이언스 페스타 강연에서 그녀는 그 모습을 어렴풋이 다시 목격했다. 강우에게서 그 대학원생의 잔상을 느꼈었는데 지금 강우는 그때보다 훨씬 강한 폭발적인 임팩트를 그녀에게 남기고 있었다.
가슴이 뛴다!
강우에게서 과학자의 아우라를 볼 수 있었다. 그를 눈에 담는 순간 그녀의 가슴은 짜릿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숨이 막힐 듯 가슴 깊은 곳에서 열기가 확 솟구쳤다. 지금까지 그녀는 다른 누군가에게서 이런 인상을 받지 못했다.
“아아!”
차도도는 나지막하게 탄성을 터트렸다.
탁.
어지럽게 써 내려가던 수식 전개가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한바탕 긴 숨을 내쉬던 강우가 적힌 수식을 다시 찬찬히 훑었다. 한두 군데 추가로 식을 첨가하여 완벽을 더한 강우가 마침내 몸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풀었어요!”
더는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된 일인지 차도도도 안다.
차도도는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렸다. 강우가 그녀에게 뛰어와서 안겼다.
그녀보다 체구가 더 큰 강우이기에 실상은 강우가 그녀를 안은 것이었지만 그게 중요할까.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한동안 시간이 정지한 듯 가만히 있었다.
“이게…… 하필이면 지금 풀리네요.”
득도의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더니 딱 그런 모습이다.
강우가 귓전에 대고 속삭이면서 내뱉는 숨이 차도도의 뺨을 간지럽혔다. 그 순간 차도도는 전율을 맛보았다. 지금 그녀에게 강우는 고등학생 제자가 아니었다. 마치 남자 친구, 아니 위대한 스승 같은 기분이었다.
“얼마나 고민했었어?”
“오랫동안요.”
그 말에서 느껴지는 무거움이 그 기간이 적어도 1년이 넘는다는 분위기를 전했다. 그 흥분을 나누기 위해 그녀는 강우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이윽고 몸을 뗀 강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아까 어디까지 설명했었죠?”
“괜찮아. 다음에 듣지 뭐. 요셉 교수에게 보낸 이 메일, 내게도 보내줘. 나도 살펴봐야 하니까.”
“물론이죠.”
“그리고 관련 자료도 무엇을 봐야 할지 알려줘. 책과 논문부터.”
“그럴게요.”
굳이 서로 합의를 주고받지 않아도 그들은 마음의 일치를 확인했다.
차도도는 강우와 함께 핵융합을 연구하기로 했다. 앞으로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곤란한 점이 발생하면 그녀가 방패막이가 되어줄 것이다. 적어도 강우가 성년이 될 때까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강우는 든든한 조력자를 얻었다. 고곽천재와 함께 다양한 연구과제를 수행할 환경이 만들어졌다.
“강우야, 시간 있지?”
“네?”
“저녁 먹고 가렴.”
당연히 강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점심때 분식집에서 혼자서 먹은 우동이 무척 서러웠는데 한꺼번에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 * *
차도도의 요리 솜씨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나 강우는 맛있게 먹었다.
사실 그 나이에는 무엇을 먹어도 맛있으니까. 저녁을 먹고 두 사람은 거실에 서서 창밖을 바라봤다.
하나둘 불이 들어오는 서울 야경은 강우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강우는…… 왜 물리학을 공부해?”
차도도가 옆에서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시선은 그를 향하지 않고 창밖에 머물러 있었다.
“글쎄요,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산이 있으니 산악인들이 산을 오른다고 하잖아요? 저도 탐구할 대상이 있으니 연구할밖에요.”
다소 선문답 같은 질문이 오갔다.
“그럼 왜 하필이면 핵융합에 관심을 가져?”
“제 꿈은 인류를 에너지난에서 해방하는 거예요.”
어찌 보면 오만한 발언이었으나 이것은 손강우 시절부터 품었던 그의 연구 목적이었다.
요셉 교수의 설명처럼 인류의 역사는 에너지 활용의 역사였고 핵융합 에너지 시대의 개막은 인류의 문명을 새로운 차원으로 바꿀 거라고.
지금 저 창밖을 빛내는 도심의 야경도 따지고 보면 에너지의 변화다.
그는 핵융합 에너지가 이 도시를 밝히게 될 날을 꿈꾼다.
오랜만에 강우는 과거 손강우 시절에 꿈꿨던 삶의 이상을 다시 떠올렸다. 그때보다 더 젊어진 만큼 더 많은 업적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옆에서 차도도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예전에 바닷가에서 그녀와 팔짱을 끼고 걸었던 때가 생각났다. 지금은 보는 사람도 없기에 훨씬 자연스러웠다.
“강우는 꿈이 크구나.”
“그 꿈이 실현 불가능하지 않거든요.”
방사능이 오염된 원자력 핵분열 에너지와 달리 수소 핵융합 에너지는 안전하고 무한하다. 다만 기술 문턱이 훨씬 높다. 이제 그 정체를 인류의 눈앞에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강우는 믿었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차도도가 조용히 응원했다.
말만으로도 강우는 고마웠다. 앞으로 그는 차도도를 연구 동료로 삼아 한층 노력할 것이다.
혼자서 연구를 수행했던 손강우와 달리 지금 강우 옆에는 연구 동료가 생겼다. 그때만큼 외롭지 않다.
한참 창밖을 바라보며 감상에 잠겼던 강우는 차도도를 돌아보았다. 그의 팔을 꼭 붙잡고 먼 곳에 시선을 두었던 그녀의 눈빛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밖에서 들어온 으슴푸레한 불빛에 음영이 드리워졌다.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는 듯 얼굴 윤곽이 선명했다.
“쌤?”
“응?”
“보내주신 사진요.”
“아, 그거…… 잘못 보낸 거야. 지워버려.”
쑥스러운가? 그런 것을 절대 잘못 보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계속 추궁하면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될 테니.
“사진 몇 장 더 보내주실 수 있어요? 예쁘던데.”
“지우라니까.”
거절하면서도 얼굴에 미소가 어려 있었다.